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뉴커런츠 초청작 영화<선희와 슬기> 연출한 박영주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뉴커런츠 초청작 영화<선희와 슬기> 연출한 박영주 감독. ⓒ 유성호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이후 영화에 대한 꿈이 커진 박영주 감독은 이제 막 출발선에서 한 걸음을 옮겼다. 전작 단편 < 1킬로그램 >이 69회 칸영화제 씨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받았을 당시 "휘둘리지 말자"고 했던 다짐대로 그는 꾹꾹 장편을 준비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무대를 밟고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선희와 슬기>다.

유독 올해 영화제 출품작 중 아이, 청소년을 다룬 작품이 여럿인데 이 영화도 그중 하나다. 예쁘장하고 똑똑해 보이는 선희(정다은)가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다 어떤 비극을 겪게 되며, 삶의 터전을 떠돌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잔잔한 분위기지만 제법 스릴러적 요소도 있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가 부모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채 나쁜 선택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 자체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계의 중요성  
 


영화제가 한창 중후반으로 넘어갈 즈음 박영주 감독을 만났다. 그는 첫 장편으로 부산영화제의 초청을 받은 것에 대해 "칸영화제에 갔을 때보다 솔직히 더 마음에 와닿는다"라며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바로 만날 수 있으니 더 좋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미 한 차례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온 그는 "왜 선희가 그런 선택들을 하는지 관객분들이 가장 궁금해하셨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 영화에서 선희는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거나, 암표를 산 뒤 친구들에게 기획사에서 일하는 사촌오빠가 줬다며 티켓을 넘기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미움을 사 아무도 모르는 보육원으로 흘러가고 그곳에서 전혀 다른 이름으로 생활한다. 물론 거기서 멈추면 좋겠지만, 거짓말은 계속 이어진다. 왜 이런 이야길 구상하게 됐는지부터 감독에게 물어야 했다.

"사실 학창시절 영향이 크다. 여고를 나왔는데 제게 영향을 준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모임도 주도하고 인기가 많던 친구가 다음 학기에 어느 순간 따돌림을 당하고 있더라. 알고 보니 그 친구가 거짓말하고 이간질한 게 들통나서였다. 이동 수업으로 우연히 그 친구 옆에 앉게 됐는데 제게 서울로 유학 간다며 여러 말을 하더라. 말을 지어내는 느낌이었다. 근데 주눅 들어 있던 표정이 그 말을 하면서 살아나는 게 보이더라. 

그 표정이 오래 기억 남았다. 나쁜 의도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친구에겐 그런 말이 절실하다는 느낌이었다. 대학교에 와서도 비슷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어서 이런 친구들에 대해 얘기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도 물론 나중에 거짓말로 상처받긴 했다. 속상했고 원망도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씨앗처럼 품고 있던 궁금증을 마침 새롭게 들어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장편 제작 지원작을 뽑는다는 공고에 풀기로 했다. 물론 쉽진 않았다. 박영주 감독은 "저도 물론 평소 솔직하려고 애쓰지만, 거짓말을 하긴 하는데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를 쓰려 하니 왜 이 친구가 거짓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더라"며 나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제가 실마리를 잡은 건 관계였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서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이해했다. 저 역시 어떤 관계에서 소외된다고 느낄 때 거짓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행동을 하니까 말이다. 거짓말은 순간을 회피하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고, 습관적으로 관심을 끌기 위해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자신을 잃은 아이, 자신을 표현하는 아이
 

 영화 <선희와 슬기>의 한 장면.

영화 <선희와 슬기>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70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장편으로 치면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그만큼 집중도가 높다. 박영주 감독은 "원래 100분 정도 됐는데 관객분들이 인물들의 심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크게 쳐냈다"고 말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여중생A>에 출연한 정다은을 캐스팅 한 이유 역시 궁금했다.

"캐스팅이 너무 어려웠다. 선희도 되었다가, 슬기도 돼야 하는데 어떤 배우가 좋을지 여러 사람을 만나보던 차였다. 지인이 <여름밤>이라는 단편에 나온 정다은씨를 추천하더라. 촬영했을 당시가 다은씨가 중3으로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 만났는데 깜짝 놀랐다. 정말 중학교 3학년의 생각인가 싶을 정도로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더라. 자기 생각을 말할 줄 아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따로 제가 디렉션을 주거나 주문을 많이 하지 않았다. 마치 선희처럼 그 대사를 할 것 같더라. 단지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전 배우를 많이 믿고 있었다."

도피처로 보육원을 택한 선희는 우연히 버스에서 들은 슬기라는 이름을 쓴다. 그리고 사진작가 지망생인 친구 방울이를 만나며 영화는 또 다른 희망을 암시한다. 물론 결말은 전혀 다르게 흐르지만, 감독의 이런 설정은 충분히 관객에게 어떤 환기를 주기에 충분하다.

"선희 입장에서 보육원 원장님을 제2 엄마로 생각했을 것이다. 외롭고 사람의 관심을 갈구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친구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다. 선희에겐 보육원이 천국일 것이다. 천국에 왔으니 자기 자신을 살면 되는데 결국 또 다른 선택을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랑받기에 충분한데...  

(선희의 마지막 친구인) 방울이라는 캐릭터는 자기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인물이라 뭔가 작품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넣은 것이다. 예전에 제가 미술을 배웠는데 아그리파를 그릴 때 신기하게 다들 자신들의 얼굴이 나오더라. 어쩔 수 없이 (예술을 할 때) 자기가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같은 아그리파인데 제 친구는 얇은 선을 쓰고, 전 거친 선을 쓰고 있더라. 선희는 자기가 없어진 친구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행복해지자는 다짐에 대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뉴커런츠 초청작 영화<선희와 슬기> 연출한 박영주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뉴커런츠 초청작 영화<선희와 슬기> 연출한 박영주 감독. ⓒ 유성호

 
결국 <선희와 슬기>는 자신을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극과 슬픔을 말함과 동시에 행복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역시 박영주 감독과 이어지는 질문이다. 문창과 시절 90번이 넘는 공모전에서 떨어졌던 경험, 한예종 시험에서의 첫 낙방, 그리고 상업영화 연출부에 들어가 경험을 쌓고 다시 한예종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을 그다.

"나다운 것이 무엇일까.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계속 묻고 있다. 어렸을 때 자존감이 낮았던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도피처로 글쓰기를 했다, 지금도 자기표현, 나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긴 한다. 작품을 하면서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나다운 것을 고민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좋아하게 됐다. 

전처럼 누가 어떻게 대한다고 해서 상처받거나 그러지 않는다. 제가 느끼는 나와 남들이 느끼는 내가 다르잖나. 누구보다 날 사랑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느끼는 내가 나일까? 여전히 답을 찾고 있지만 조바심 느끼지 않고 편하게 알아가려 한다."


펜보단 카메라를 드는 것이 맞는 옷처럼 느껴진다고 박영주 감독은 말했다. 칸영화제 경험 이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단다. 다만 조금 관심을 더 가져주시는 분들이 생긴 정도라고. 그래왔듯 그는 자신의 작품을 뚜벅뚜벅 준비할 기세다. 전부터 꿈꿔온 코미디 소재가 있지만 당장은 여성이 주인공인 범죄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첫 장편을 찍고 나니 관객분들에게 조금 더 가가간 느낌이다. 제가 엄청난 대작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기도 했다. 근데 (영화 일이) 생각과 다르고 어렵더라. 겸손하게 하겠다. 당장 제가 무슨 거장이 될 순 없겠지만 제 나이에 맞는 솔직한 감독이 되자는 생각이다. 타협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근데 절대 타협하지 말자. 유혹이 있어도 끝까지 고민하는 감독이 되고 싶다. 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보이는 영화를 하고 싶다. 저만의 시선과 연륜이 필요한 부분이라 일단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뉴커런츠 초청작 영화<선희와 슬기> 연출한 박영주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뉴커런츠 초청작 영화<선희와 슬기> 연출한 박영주 감독.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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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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