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영화 <뷰티풀 데이즈> 연출한 윤재호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영화 <뷰티풀 데이즈> 연출한 윤재호 감독. ⓒ 유성호


단편과 다큐멘터리로 꾸준히 경계인의 삶을 그린 윤재호 감독이 올해 빛을 본 것일까. 그가 처음 선보인 장편 극영화 <뷰티풀 데이즈>가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2년 전, 단편 <히치하이커>로 칸영화제를 찾았을 때 그는 지금 이 영화의 기획을 기자에게 전한 바 있다. 

초고의 제목은 <엄마>였다. 20살 무렵 한국을 떠난 뒤 프랑스에서 14년을 지낸 윤재호 감독은 끊임없이 경계와 모성에 천착해 왔다. 탈북자 이야기를 다룬 그의 전작 다큐멘터리 <마담B>에 상상력을 더한 작품을 배우 이나영과 오광록이 품은 결과물이 <뷰티풀 데이즈>였다. 영화는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사는 한 남자(오광록)에게 시집간 여자(이나영)가 다시 혼자 한국으로 떠났고, 14년 뒤 엄마를 찾아 아들 젠첸(장도윤)이 한국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이번 영화로 탈북자, 경계인 이야기에 감독 본인만의 정서적 종지부를 찍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에 그가 웃어 보였다. "정리라기보단 이제 진짜 시작인 것"이라며 "<마담B>가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식으로 열린 결말로 끝났듯, 이 영화 역시 제목처럼 아름다운 날이 언젠가 올 것 같은 설렘, 기대감을 주며 끝난다"고 운을 뗐다.

어두워 보이지만 사람의 이야기
 


"2011년 <약속>이라는 단편으로 파리에 갔을 때 만난 조선족 아줌마의 사연이었다. 민박집을 하시는 아줌마는 9년간 중국에 둔 아들을 못 보고 있다고 하셨고, 그때부터 분단과 탈북자분 등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다. 7년 동안 <마담B>도 만들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뷰티풀 데이즈>는 2016년에 썼던 이야기다."

영화 속 캐릭터는 대부분 표정을 잃었고, 거친 현실을 살아내고 있지만 느껴지는 감정만큼은 뭔가 따뜻하다. 탈북을 돕는 브로커마저도 일말의 따뜻한 심성을 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블랙 아니면 화이트로 생각하겠지만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며 윤 감독은 "애매한 사람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오히려 인간적이었다"고 답했다. 

"이야기를 떠나서 사람의 이야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든, 엄마의 한국인 애인(서현우)이든 결국 제가 만난 인물에서 나온 것 같다. <마담B>에 중국인 남편이 나온다.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여성을 데려오는 사람인데 매우 나쁘게 볼 수도 있다. 물론 브로커나 그런 사람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 세상에서 제가 경험한 인물들은 다들 되게 인간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니까. 캐릭터에 그런 점을 반영했다.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건도 영화에 있긴 하지만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구성상 초반엔 편견을 넣기도 했다. 관객이 보기에 한국인 남편이 나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그런 편견을 넣었다. 살면서 우린 많은 편견을 갖고 살잖나. 하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그 편견이 깨지고 서로가 이해하며 한발 다가갔을 때 뭔가 일어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의 남북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누군가 다가가면 상대도 한 발 다가오는 그런 긍정적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부산영화제 공개 후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은 아무래도 그의 가족이었다. 여기서 숨은 이야기 하나를 감독이 공개했다. 실제 윤재호 감독의 아버지가 영화에 잠깐 출연했다는 사실. "바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손님이 아버지였다"며 그는 첫 번째 관객인 그의 가족의 반응을 들려줬다.

"배우를 하고 싶어 하셨더라. 예전에 술 드시다가 키가 작아 오디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하소연하신 게 기억나서 출연을 부탁드렸다. 영화를 보시고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누나 역시 눈물 흘리면서 좋아하더라. 그리고 제 조카가 중학생이다. 사실 전 이 영화를 10대와 20대가 많이 봤으면 해서 최대한 쉽게 구성하려 노력했다. 의외로 조카가 다 이해했더라." 

이나영과 오광록의 대비
 

 영화 <뷰티풀 데이즈>의 한 장면.

영화 <뷰티풀 데이즈>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 주역들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부집행위원장(왼쪽부터), 윤재호 감독, 배우 이유준, 이나영, 장동윤, 오광록, 서현우가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 기자회견에 참석해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뷰티풀 데이즈>는 단편과 다큐멘터리로 두각을 나타낸 윤재호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며 배우 이나영이 <하울링> 이후 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작품이다.

▲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 주역들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부집행위원장(왼쪽부터), 윤재호 감독, 배우 이유준, 이나영, 장동윤, 오광록, 서현우가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 기자회견에 참석해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뷰티풀 데이즈>는 단편과 다큐멘터리로 두각을 나타낸 윤재호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며 배우 이나영이 <하울링> 이후 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작품이다. ⓒ 유성호

 
발상은 경계인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동시에 가족을 묻고 있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지는 <뷰티풀 데이즈>가 묻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배우 오광록과 이나영이 부부로 출연하는 모습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좋은 미덕이 된다. 감독에게 인물 설정과 캐스팅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오광록 선배님은 이 영화를 기획하면서 얘기를 조금씩 드렸다. 2012년 때 뵀는데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분이다. <히치하이커>를 함께 하려다 선배님이 다른 일정이 있어 못했다. 독특한 음색에 개성도 강한 느낌이라 젠첸의 아버지로 어울릴 것 같더라. 시골 아버지의 소박함이 있으면서도 뭔가 묘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제안 드렸다. 

엄마 캐릭터가 중요해서 고민하다가 (제작사) 대표님이 이나영 선배를 얘기하시더라. 제가 영화 일을 안 할 때부터 TV로 보던 그분. 전 이나영 선배가 좋은 게 카메라와 조명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 달라 보인다. 색깔에 따라 모습이 달라 보인다. 제가 바라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겉은 (상황에 따라) 달라 보이면서도, 동시에 내면에 있는 가느다란 기둥은 유지하는 느낌을 말씀드렸다. 연기도 그래서 절제를 부탁드렸고. 굉장히 추상적 요구였는데 그걸 해내시더라. 감탄하면서 봤다."


윤재호 감독이 작품에서 경계인으로 놓는 인물은 대부분 여성이다. 모성에 대한 특유의 감성이 있는 것 같다는 물음에 그는 "어떤 의도가 있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보니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있더라. 2003년에 만든 단편, 그 이후에 만든 단편에도 여성이 등장한다. 저도 부산 사람이라 그런지 감정 표현을 잘 못한다. 작품을 하면서 그런 (그리움의 감정을) 걸 표현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나 다른 사회도 대부분 남성 중심 사회이지 않나. 여성이 불리하기도 하고. 이걸 다르게 인간적인 이야기로 표현하고 싶었다. 강조하기보단 자연스럽게 말이다." 

윤재호 감독은 영화 안에서 여자가 누워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살포시 안아주는 장면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았다. 유일하게 서로에 대한 애정표현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나영 선배가 오광록 선배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그 장면을 세 번 정도 찍었다. 세 컷 모두 느낌이 너무 좋아 고민이 많았다. 물론 여러 제안이 있었다. 입맞춤할 것인지, 껴안기만 할 것인지 여러 제안이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안아주듯 연민인지 사랑인지 확실치 않은 묘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있듯 태아가 되는 느낌을 보이고 싶었다. 마치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되듯 말이다. 사랑이 곧 모성과 연결될 수 있고... 

<마담B>를 보면 떠난다는 아내에게 같이 살면 좋을 것 같지만 떠난다고 하니 그래도 보내야지라고 말하는 남편이 등장한다. 그 말이 제겐 되게 따뜻하게 들렸다.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을 가진 남자였다. <뷰티풀 데이즈>에서도 떠난 여자를 찾으러 가는데 그건 정말 여자를 데리러 가는 게 아닌 구속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브로커에게 돈 주고 데려온 것도 자유를 찾아줄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건데 (그렇게 데려온 여자가) 떠나겠다고 하니 받아들이는 거지. 그녀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마담B>에 나오는 중국인 남편도 그런 얘길 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날들을 위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영화 <뷰티풀 데이즈> 연출한 윤재호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영화 <뷰티풀 데이즈> 연출한 윤재호 감독. ⓒ 유성호

 
정리하면 <뷰티풀 데이즈>는 경계인을 통해 가족을 묻고 나아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 셈이다. 이 질문을 윤재호 감독에게 되물었다.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 그리고 '뷰티풀 데이'에 대해서. 

"살다 보면 여러 일이 반복되잖나. 삶은 어떤 상황이 와도 계속된다. 탈북해서 한국에서 사는 여성 분들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신다. 인생은 긴데 행복한 순간은 짧고, 잠깐이라도 행복하면 잠깐이라도 함께 남편과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재혼을 필요에 의해 하는 분도, 정말 좋아서 하는 분도 있고 정말 다양하다. 사랑이라는 걸 정해놓고 사는 게 아니었다.

가족은 꼭 사랑해서만이 사는 게 아니잖나. 마음이 맞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친구도 가족이 될 수 있고, 피가 안 섞여도 누구와도 가족일 수 있다. 전 어떤 상황, 어떤 기준으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가족에 대한 기준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 역시 가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가족은 무엇인가 그런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하나로 정의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 편견을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말하는 가족보다 개인이 말하는 가족을 찾는 게 중요하다.

프랑스로 가기 전 세상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래서 떠났지. 전작 <레터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가족은 변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시선이 변해있지 않나. 저도 그렇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봤을 땐 가족도 부정적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더라. 영화를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이해하려고 하고, 사람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말이다. 다들 그렇게 보실 수만 있다면 인종과 나라를 떠나서 모두에게 뷰티풀 데이가 오지 않을까."

 

"차기작은 호러물..."
지난 공식 기자회견에서 윤재호 감독은 호러물을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꾸준히 선보인 작품들과는 완전 다른 결이 예상된다. 그 이야기를 더 묻고 싶었다. 여러 이야기를 쓴 게 있지만 윤재호 감독은 호러물을 하게 될 것 같다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남녀가 주인공이다. 상업적 특수성을 활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주의에 대한 호러영화가 될 것이다. 완벽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랄까. 큰 가치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작은 가치를 지켜나가자 이런 생각이 담길 것 같다."

뷰티풀 데이즈 이나영 오광록 윤재호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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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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