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영화 <영원한 휴가> 포스터

영화 <영원한 휴가> 포스터ⓒ (주)안다미로

 
짐 자무시라는 영화감독을 떠올리면 우선 사방으로 뻗어 기묘하기까지 한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생각나고, 이어서 방랑하는 자들의 여러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예순을 훌쩍 넘었다는 데에 깜짝 놀란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천국보다 낯선>으로 그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당시 그의 나이는 사십 대 중반이었고, (이 영화를 찍을 때 그는 서른 언저리에 있었다) 나는 그를 청년 감독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2018년 지금도 그는 여전히 내게 청년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우리는 쉽게 한다.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용기를 주는 이 말이 사실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나이의 제약 아래서 자유롭기 어려운지를 반증해 주는 말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정 나이에 요구되는 조건들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짐 자무시가 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그의 물리적 나이와 내 머릿속 그의 모습은 충돌하고, 도시를 방랑하는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과 그의 모습이 중첩되어 그가 어쩌면 수 세기 동안 죽지 않고 모습을 달리해 떠돌아다니는 시인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할 때도 있다. 

짐 자무시가 만들어 낸 첫 번째 방랑자는 알로이셔스 크리스토퍼 파커, 알리라고 불리는 청년이다. 1980년 뉴욕 대학교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영원한 휴가>는 한 청년이 어떻게 뉴욕을 떠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영화다. 자신을 방랑자라고 소개하는 주인공 알리의 독백은 한 편의 산문시와 같고 그의 방랑은 두서없는 사색의 결과물과 같다. 알리가 마주하는 여러 만남들에 동참한 관객은 이들 만남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으려고 하지만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가진 다양한 모습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이야기의 점들을 연결하다보면 마지막엔 어떤 그림이라도 되겠지. 난 이곳, 이 사람에서 저곳, 저 사람에게 가는 것일 뿐, 크게 다를 바는 없어.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동안의 방들과 같아. 내가 시간을 보냈던 장소들처럼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가득하지만 잠시 후 새로움은 사라지고 두려움 같은 게 생겨나. 그땐 떠날 때가 된 거지."

사람들로 가득, 번잡한 뉴욕과 도시의 황량한 뒷골목을 교차로 비추는 것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되는데 메트로폴리스로서의 활기찬 뉴욕의 모습은 고속촬영으로 촬영됐지만, 뒷골목 장면은 1초에 24프레임의 정상속도로 촬영되었고, 전자에서 영상과 음향이 불일치하며 충돌하는 것과 달리 후자에서는 영상과 음향이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뉴욕, 그러니까 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모습은 환상이며 우리가 지금부터 볼 세상은 뒷골목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영화를 시작하는 것 같다. 

텅 비어있던 아파트가 싱글 사이즈 매트리스와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전신거울, 그리고 턴테이블과 의자로 채워지고, 아침인지 저녁인지, 이제 막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곧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잠옷 차림의 레일라가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갑자기 알리가 방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어디 있었냐는 여자 친구 레일라의 질문에 알리는 잠을 이룰 수 없어 마냥 돌아다녔다고 대답하고는 얼 보스틱의 'up there in orbit'를 틀어놓고 열광적인 춤을 춘다. 그의 말과 행동은 일방적이고 갑작스럽다. 춤을 멈춘 알리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고, 책을 읽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색소폰 연주자를 응시하며 전쟁의 폭격으로 이제는 폐허가 된 고향 집과 병원에 있는 엄마를 보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의 대사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에 가깝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주)안다미로

 
무너진 건물 사이사이로 잡초가 무성한,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 집에서 알리는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군인을 만난다. 헬리콥터 소리를 전투기 소리로 착각하는 참전 군인은 전쟁이 끝나고도 폭격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가 리얼리티가 아닌 영화의 화자인 알리의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공습에 뉴욕에 있는 건물이 무너져 내렸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1970년대 후반, 짐 자무시 감독이 이 영화를 찍을 무렵 미국의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은 아마도 '베트남 전쟁'이 아니었을까?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남길 만큼, 감독이 보는 전쟁의 파괴력과 영향은 강력했던 것 같다.

정신병원에 있는 엄마(그의 엄마 역시 전쟁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와의 만남은 속옷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스페인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미친 여인과의 만남과 다를 바 없고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의 일방적인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니콜라스 레이 감독(짐 자무시는 <이유 없는 반항>으로 유명한 니콜라스 레이의 뉴욕대 제자이자 그의 연출부이기도 했다.)의 <야생의 순수>를 상영하고 있는 극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역시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에 가깝다. 

유일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는 사람은 알리가 뉴욕을 떠나기 전 항구에서 만난,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한 프랑스 청년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청년은 알리의 이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알리와 닮아있다. 알리가 떠난 자리를 그가 채우고, 그가 떠나온 자리를 알리가 채우듯이 알리와 같은 방랑자는 어디에도 있고, 이들의 방랑은 이어달리기를 하듯 장소와 사람을 옮겨가며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니면 이곳에서 이곳으로. 나는 영원한 휴가를 떠난 여행객이다."

배에 오른 알리의 담담한 시선에 담긴, 멀어져가는 뉴욕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엔딩 장면은 영화의 시작에서 본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의 모습과 유일하게 일치를 이루는 뉴욕의 모습으로 롱 테이크로 길게, 무려 4분(엔딩 크레딧이 그 위로 올라가기는 해도)동안이나 계속되며 그 위로 뭉개진 멜로디의 색소폰 연주가 흐르는데, 직선으로 쭉쭉 뻗은 고층빌딩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지만 즉흥적인 알리와는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주)안다미로

 
수수께끼와 같은 대사들과 일관성 없는 이야기의 흐름은 마치 컨텍스트를 모르고 듣는 무명 시인의 낭독과 같다. <영원한 휴가>는 분명 학생 영화가 가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짐 자무시라는 아티스트가 감상(感想)을 영상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인상적인 영화다.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던 짐 자무시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마지막 학기에 교환학생으로 방문한 파리에서 매일같이 시네마떼끄에서 영화를 보며 영화에 흥미를 느끼고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대학의 영화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졸업 작품 <영원한 휴가>로 보여준 그의 가능성은 1984년 <천국보다 낯선>으로 증명 되었고, 이후로 그가 만들어 낸 작품들은 그의 이름이 영화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제각각의 이유로 떠나는 사람, 혹은 떠나온 사람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그들이 마주한 도시는 익숙하건 낯설건 언제나 조금 쓸쓸하고 때로는 황량하기까지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고독은 슬픔이 아닌 차분한 만족감으로 전달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유는 젊음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내가 그를 언제나 청년 감독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에 시작되어 뉴욕, 플로리다, 멤피스, 헬싱키, LA, 파리, 마드리드, 디트로이트를 거쳐 2016년 패터슨에 도달한 그의 여정이 어디로 향할지, 그의 팬으로서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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