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오야 하나요(왼쪽), 미카미 치에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오야 하나요(왼쪽), 미카미 치에 감독. ⓒ 유성호

 
일본에게 전범국 오명을 쓰게 한 2차 세계대전은 피해국에게도 큰 상처였지만 일본 스스로에게도 큰 상처였다. 단순히 패전해서가 아니다. 제국의 야심을 품고 밖으로 눈을 돌렸던 일본 정부와 군대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인 자국민마저 죽였다는 사실, 그것도 단순히 희생시킨 게 아니라 철저한 계획이었다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초청된 <오키나와의 소년병>이 바로 그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영화를 연출한 미카미 치에, 오야 하나요 감독을 지난 6일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 비프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각각 아나운서와 기자 출신으로 그간 오키나와 미군 부대 주둔 문제 등 사회성 다큐멘터리를 다수 만들어 온 언론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오키나와 전투 끝 무렵을 담고 있다. 일본 내 전쟁 중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 전투와 관련해서는 그간 투항하라는 미군과 거기에 저항한 일본군의 사연들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선 10대 소년으로 이뤄진 비밀 부대가 있었다.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지역 소년들을 전쟁에 동원 시킨 것. 이 사실을 짚으며 다큐는 미군에게 기밀을 누설할 것을 두려워한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을 스파이로 몰아 죽이고, 말라리아로 죽게 하는 등 살인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묵직하게 그렸다.
 
"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도 오키나와 전투 때문"
 
인터뷰를 진행한 때는 마침 태풍 콩레이가 부산에 직접 영향을 미치던 날이었다. 안부를 묻는 질문에 미카미 치에 감독은 "오키나와는 태풍이 참 자주 오는 태풍의 도시라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미카미 치에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미카미 치에 감독. ⓒ 유성호

- 오키나와 전쟁에서 벌어진 이런 비극을 일본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을 것 같다.
미카미 : "물론 많이들 모른다. 심지어 오키나와 분들도 고향을 지키기 위한 소년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이들 모르신다. 전쟁 때 말라리아 역시 우연히 생긴 걸로 알고들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을 막기 위해 군대가 벌인 일임을 잘 모르고 있다."
 
- 이 영화를 어떻게 기획하게 됐으며 얼마나 준비했나. 두 분 모두 오키나와 미군 기지 주둔문제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오셨다.
미카미 : "작년 5월부터 시작했다. 원래는 TV 프로로 기획했는데 방영이 불발됐다. 어차피 취재를 시작한 것이니 영화를 목표로 하자고 생각하며 10개월간 촬영했다. 일본에선 전쟁 관련 작품은 보통 7월 무렵에 한다. 그때가 종전이기 때문이다(해당 영화는 일본에서 이미 지난여름 개봉했다 - 기자 말).
 
태평양 전쟁에서 오키나와 전은 일본에겐 특별하다. 유일하게 미군과 지상전을 벌인 전투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회 문제의 원인을 따져보면 이 전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군 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도 오키나와 전투 때문이다. 일본 군대가 국민을 지켜준 게 아닌 오히려 학살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오야 : "둘 다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미카미씨는 미군 문제에 꾸준히 관심이 있었다. 미군 기지 중 70%가 오키나와에 있는데 또 새로운 미군 기지를 만들려고 하더라. 이건 절대 막아야 한다. 왜 막아야 하는가 그걸 주장하기 전에 이 영화로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 영화는 당시 참상이 벌어졌던 지역주민을 방문하면서 인터뷰하는 형식이다. 또 학살 당사자인 군인 장교에 대한 증언도 받는데 다들 흔쾌히 응하진 않았을 텐데.
미카미 : "그렇다. 대부분 많이 거절했다. 전화로 먼저 상황을 설명드렸는데 거절하기에 몇 번씩 직접 찾아갔다. 소년부대 이야기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을 것도 도저히 주민들 입장에선 말 못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5인 1조로 소년부대가 (게릴라) 활동을 했는데 다 친척이거나 지인들이었다. 5명 중 2명이 살아 돌아왔다고 했을 때 사망자의 부모나 친척들은 시신이라도 찾고 싶어했을 것 아닌가. 생존자 가족 입장에선 도저히 입 밖으로 관련 내용을 꺼낼 수 없었지. 오야씨는 과거에 직접 해당 지역에 가서 살면서 주민들과 친밀해지는 시간을 가졌더라."
 
오야 : "전 오키나와 출신이 아니다. 도쿄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외국에 나갔다가 이후 오키나와 하테루마 섬에 가서 1년 정도 살면서 주민분들과 교류하면서 영상을 찍었다.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증언하신 내용이 있다. 지금 돌아가신 분들도 계신데 허락을 구해 그 분들의 증언을 영화에 사용하게 됐다."
 
미카미 : "사실 10년 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하자고 했다. 주민들과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아온 셈이다. 오키나와 지역 연구자들의 말을 듣고 10대 소년부대가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일반부대와 특별한 차이는 모르고 있었다. 취재하면서 비밀 전략이 있었고, 게릴라 전이 존재했다는 걸 알게 됐지."
 
"천황에 충성하던 국민을 국가가 직접 죽인 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오야 하나요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오야 하나요 감독. ⓒ 유성호

- 취재하면서 스스로 놀랐던 적이 있는지.
오야 :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하나 순서를 정할 수 없을 정도다. 하테루마를 취재하면서 정말 놀랐던 게 정부가 겉으론 피난을 위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는데, 말라리아가 창궐한 그 섬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식량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명도 있었는데 다른 측면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해보니 강제 이주 6개월 전부터 철저히 기획한 것이더라. 전쟁 중 자국민을 죽인 사건이라고 하면 어떤 미친 한 군인이 총으로 쏴 죽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테루마 사건은 천황에 충성하던 국민을 국가가 직접 죽인 셈이었다."
 
미카미 : "한국은 전쟁 때 지상전을 주로 했잖나. 일본 본토는 공습만 있었다. 지상전은 오키나와만 유일했다. 전 그곳에서 주민들이 스파이로 몰려 죽었고, 서로를 의심했다는 그 부분에 놀랐다. 패전이 확실시되자 일본군 일부가 (오키나와 특정 지역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병사들 입장에선 주민들이 자신의 존재를 미군에 발설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또 일본은 그때까지 한 번도 자신들이 패전했다는 걸 자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주민들은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미군에 발설하지 않는다면 이웃 주민이 자신을 신고할 수 있으니 서로를 의심한 것이지. 이게 지상전의 아픔인 것 같다. 서로 의심하고, 밀고하고."
 
- 학살을 자행한 이들은 모두 일본군 엘리트였다. 일부 증언에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더라. 반성의 기미가 없었나.
미카미 : "나카노 학교라고 스파이를 키운 학교인데, 대부분 20대 중반의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는 머리가 굉장히 좋은 장교들이었다. 영화엔 매년 희생자를 위해 위령제를 지내는 분이 있잖나. 그분처럼 책임감이 있는 사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가해자이지 않나. 또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도 있었다. 어쨌든 속죄는 아무리 한다고 해도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 역시 가해자지만 동시에 전쟁의 피해자기도 하다. 하지만 그 죄는 속죄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야 : "엘리트 맞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떤 명령도 철저히 따르는 군인이었다. 군인으로서는 100점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킨 건 국민이 아닌 권력과 나라였다. 민간인을 지켜야 한다는 전쟁의 제1원칙을 안 지킨 것이다."
 
- 영화엔 기밀을 발설할까봐 스파이리스트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걸 기준으로 주민을 죽였으니 곧 살생부 아닌가. 국가가 국민을 스스로 죽인 셈이다.
미카미 : "정말 그렇다. 지금의 자위대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전쟁한다고 하면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하는 게 정석인데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섬에서 전쟁을 한다고 하면 식량과 무기를 확보해놓고 해야 하잖나. 당시 상황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주민이 그곳에 살고 있으니 그들의 노동력과 식량을 이용하면서 나중엔 죽인 것이지. 기밀을 알고 있다면서. 그런 학살의 진실을 지금의 일본 자위대가 몰랐을까. 다 확신범이다. 그때는 주민을 죽여야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때 당시의 군 지침서가 여전히 남아있다. 방위성에 가면 그걸 열람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모두 하나의 세트처럼 작용했다."
 
- 최근 일본 해군이 욱일승천기를 걸고 한국 제주도에서 열리는 관함식에 참석하려 했다가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 역시 군국주의의 상징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이 사실을 두 감독이 잘 모르고 있어 추가로 설명을 보탰다 - 기자 말).
오야 :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그런 행사를 하는 것인가? 기회가 되면 육군 자위대의 엠블럼도 봐달라. 일본도가 엑스자 모양으로 겹쳐져 있다. (해군보다) 더 전쟁을 원하는구나, 구 일본군에 대한 존경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지점을 살펴봐 달라."

- 부산영화제에 마침 이런 과거사 청산을 화두로 삼은 다큐멘터리들이 초청됐다. <오키나와의 소년병>도 그렇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을 지적하는 작품 또한 있다. 
미카미 : "오키나와 전쟁 때 일본 국민이 치른 희생이 컸다(약 20만 명 사망). 근데 미군보다 일본군에게 희생당한 게 더 크다. 이에 대해 국가는 한 번도 사죄하지 않았다. 자기 국민에 대한 것도 이런 자세인데 심지어 해외 다른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사과를 일본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오야 하나요(왼쪽), 미카미 치에 감독.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영화<오키나와의 소년병> 오야 하나요(왼쪽), 미카미 치에 감독. ⓒ 유성호

오키나와의 소년병 일본 자위대 태평양 전쟁 욱일승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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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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