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라는 직업은 다른 사람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원래 자기와는 다른 인물이 되어 가상의 삶을 살게 되지요. 하지만, 모든 배우가 늘 원하는 배역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급 스타 배우가 아닌 이상 자기가 하고 싶은 배역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한때 정상에 섰더라도 나이를 먹고 신체 능력이 저하되어 젊은 시절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출연작의 수준도 조금씩 떨어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세계 최고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지금은 형편없는 졸작에 이름을 올리기도 합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한 최악의 선택
 
 영화 <오 마이 그랜파>의 포스터.

영화 <오 마이 그랜파>의 포스터. ⓒ 판씨네마(주)

 
세계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로버트 드 니로 역시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지난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오 마이 그랜파>(Dirty Granpa)에서 그랬죠. 제이슨(잭 에프론)은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 대신 부모가 원하는 안정적인 로펌 변호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할아버지 딕(로버트 드 니로)이 다짜고짜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자기를 플로리다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는 거였죠. 제이슨은 며칠 후 결혼식을 앞두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괴짜 할아버지의 여정에 동행합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렇게 최악은 아닐 것 같았습니다. 미국식 막 나가는 코미디 영화일 것은 분명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재미가 있을 줄 알았거든요. 출연진도 나쁘지 않습니다. 드 니로의 손자 역할로 나오는 주인공 잭 에프론은 <나쁜 이웃들>(2014) 같은 비슷한 장르의 영화에서 나왔을 때 꽤 웃겼고, 드 니로의 상대역인 오브리 플라자 역시 연기파 코미디언으로 손꼽히는 배우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우선 억지스러운 코미디 장면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인물 설정이나 극의 맥락과는 관계없는 막장스러운 행동으로 웃기려 들거든요. 영화 내내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던 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뼈대로 삼을 만한 플롯 역시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노년 세대의 도움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줄거리 자체는 드 니로의 또 다른 출연작 <인턴>(2015)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그 영화와는 달리, 플롯이 제대로 안 서 있고 캐릭터도 평면적이어서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는 30대에 갓 접어든 1970년대에 그 시기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대부 2> <택시 드라이버> <디어 헌터> 등에서 눈부신 연기를 펼치며 정상에 올랐고,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분노의 주먹> <폴링 인 러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등 좀 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변화무쌍한 정극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상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서, 특히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의 대가로 인정받았죠.

그런 그가 코미디 연기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은 <애널라이즈 디스>(1999)와 <미트 페어런츠>(2000)가 연이어 성공한 이후부터였습니다. 근래 들어 보여 준 꼬장꼬장하거나 괴팍한 아버지/할아버지 이미지는 이때 형성된 것입니다. 두 영화 다 자기만의 개성이 있고 그렇게 된 이유가 분명한 배역이었기 때문에, 드 니로가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 영화는 드 니로의 그런 이미지만 활용했을 뿐, 배우가 자신의 연기력을 보여 줄 만한 순간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굳이 그를 캐스팅한 이유가 단지 이름값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어 좀 화가 날 정도로요.

아직 그의 연기를 볼 기회는 있다
 
 영화 <오 마이 그랜파>의 스틸컷

영화 <오 마이 그랜파>의 스틸컷 ⓒ 판씨네마(주)

 
배우가 나이 들면 할 수 있는 역할 자체가 줄어듭니다. 일반적인 상업 영화에서 주인공 캐릭터는 대부분 20대에서 40대입니다. 따라서 60대 이상이 되면 주인공 캐릭터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역할로 물러서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로버트 드 니로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선구안도 좋은 편이어서 60대에 들어선 2000년대 중반 이후 작품들이 모두 걸작은 아니라도 나름의 개성은 있었습니다. 반면 <오 마이 그랜파>는 자칫 이 노배우가 경력에 오점을 남기고 이대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다행히 이 영화 이후에 출연한 작품들은 나름대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현재는 알 파치노와 함께 출연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 < The Irishman >의 촬영을 마쳤고, 호아킨 피닉스가 새로운 조커로 나오는 DC의 내년 기대작 < Joker >를 찍고 있죠.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를 볼 기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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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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