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남성 캐릭터는 형사 아니면 조폭밖에 없냐'는 관객들의 자조 섞인 투정엔 근거가 많다. 실제로 남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주로 제작되는 최근 충무로의 근작들을 살펴보면 경찰, 범죄자, 군인 혹은 역사적 인물 등의 범주에서 캐릭터가 지나치게 복제되는 느낌을 받는다.

남성 캐릭터는 정말 '형사' 혹은 '조폭'의 얼굴로 등장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다. 성별을 떠나 인간의 속살을 깊이 있게 파고든 매력적인 영화 남성 캐릭터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뇌와 사랑, 성소수자 전기 영화
 
 영화 <톰 오브 핀란드> 스틸 컷

영화 <톰 오브 핀란드> 스틸 컷 ⓒ 아이 엠


지난 8월 말 개봉한 <톰 오브 핀란드>는 화가 토우코 라크소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보수적인 핀란드 사회의 군인이었던 토우코가 비밀리에 그려온 '게이 포르노' 작품들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아이콘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제목 '톰 오브 핀란드'는 토우코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만든 예명으로, 성소수자 예술가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눈의 나라 핀란드와 여름의 캘리포니아를 넘나들며 고뇌하고 사랑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핀란드 국민배우 페카 스트랭이 재현했는데, 북유럽 영화에 친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 만나기에 알맞은 얼굴이다.

핀란드는 이 영화를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제출했는데, 캐릭터 '무민'과 함께 핀란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임이 이렇게 증명되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2009년 작 <밀크> 역시 성소수자 캐릭터의 삶을 그린 명작으로 꼽힌다. <밀크>는 미국 최초로 커밍아웃한 정치인인 하비 밀크의 마지막 8년을 그린 영화로, 뉴욕의 평범한 회사원에서 캘리포니아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최초로 시의원에 당선되기까지의 일생을 담았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 하비 밀크의 생애를 무한한 존중의 시선으로 재현한 데다가,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숀 펜은 실존인물의 이미지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정열과 애도의 정서가 알맞게 결합되어 영화의 온도를 완성했다.

상류층 지식인 남성의 부끄러운 틈새
 
 영화 <더 스퀘어> 스틸 컷

영화 <더 스퀘어> 스틸 컷 ⓒ 아이 엠


2017년 제7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더 스퀘어>는 스웨덴 상류층 엘리트의 위선과 허영을 재기발랄한 언어로 풍자한다. 국립 미술관 큐레이터인 크리스찬(클라에스 방)의 '어딘가 나사 빠진 하루'를 보여주며 그가 지식인의 가면을 쓰고 얼마나 한심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식이다.

지갑과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하질 않나, 그걸 찾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편지를 써 어느 허름한 아파트에 돌렸다가 곤경에 처하고, 결국엔 업무상 큰 실수를 저질러 직업을 잃을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루스 외스틀룬드 감독은 멋진 외양의 남성 상류층 지식인 캐릭터의 속성을 비튼 뒤 그 안의 허점을 공략해 캐릭터의 인간된 매력을 한층 더 살려냈다.

제작년 개봉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이레셔널 맨>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비이성적인 남자'인 주인공을 한껏 조롱하는 화법의 작품이다. 철학과 학생인 '질'(엠마 스톤)이 교수 '에이브'(호아킨 피닉스)에게 매력을 느끼고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삶의 의지를 찾겠답시고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반복하는 에이브의 모습에서 번지르르하게 들리던 그의 철학 이론이 개똥철학으로 전락하는 순간들이 여성 캐릭터의 시선에서 고발된다. 제70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을 경유해 폭로되는 멍청한 남성성은 그 자체로 코미디다.

아프고 병든 남자들의 50가지 그림자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스틸 컷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스틸 컷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배우 매튜 맥커너히에게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HIV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 '론'의 이야기다. 에이즈 환자에게 상상되는 보통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굉장히 마초적이고 방탕한 성생활을 즐기며 입에는 거친 욕을 달고 사는 인물이다. 심지어는 극심한 호모포비아로 '모든 에이즈 환자는 동성애자다'라는 그 시대의 편견에 캐릭터의 속성으로서 맞서기도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한부를 선고받고 절망과 무력함에 바둥거리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불법 약물 밀수 등의 부정한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보이며 서사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생존률 50%의 척추암에 걸린 스물일곱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 50/50 >은 지난 2011년 개봉해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젊은 나이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된 절망 속에서도 영화는 미국 록밴드 모글리스의 'I'm Good'을 테마로 '그래도 괜찮다'고 다정하게 다독인다. 주인공 '아담'은 잠깐 절망했다가도 다시금 일어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철없는 친구와 싸우기도 하며 그렇게 행복한 엔딩으로 나아간다.

남성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을 넘어... 장진 유니버스의 가능성
 
 <굿모닝 프레지던트> 스틸 컷.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진 감독

<굿모닝 프레지던트> 스틸 컷.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진 감독 ⓒ 소란플레이먼트


국내 작품, 특히나 상업 영화에서는 전형화되지 않은 캐릭터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다. 2000년 이후 흥행 영화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주로 남성이 주인공을 맡지만 그 역할은 경찰이나 범죄자, 전형적인 아버지 상, 군인 혹은 역사적 실존 인물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 문법에서 벗어난 소수의 작품들을 흥행에 실패했다.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목록을 살펴보면 이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독특한 캐릭터의 힘을 믿고 보다 다채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연출자로는 장진 감독이 있다. 물론 장 감독 역시 초기작에서는 다소 전형화된 남성 주인공들을 영화에 등장시켰으나, 이후엔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퀴즈왕>(2010) <로맨틱 헤븐>(2011) <하이힐>(2013) 등등의 작품을 통해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을 탄생시키며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는 로또에 당첨된 대통령과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미남 대통령을, <하이힐>에서는 여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 형사의 모습을 그리며 새로운 캐릭터들에 숨을 불어넣었다.

남성 중심 서사가 주를 이루는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캐릭터가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남성 캐릭터마저도 특정한 설계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상도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풍성한 캐릭터는 더 풍성한 서사를 만들고, 풍성한 서사는 우리 관객들에게 풍요로운 영화의 향유를 허락할 것이다.
영화 남성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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