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는 멀쩡한 제목과 포스터를 가진 영화들이 유독 한국에만 들어오면 엉뚱한 이름과 홍보 카피를 얻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이런 일에 치를 떨며 분노했지만 이제는 조금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결국 영화도 산업이며 이 업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냉정하다. 작품이 흥행하지 않으면 감독의 경력이 위태로워진다.

또 창작 작업이 얼마나 중노동인지는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잘 알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야기를 한 명의 관객에게라도 더 전하는 것은 어찌보면 홍보하는 사람에겐 직업 윤리나 다름이 없다.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물론 <잉그리드 서쪽으로 가다(Ingrid Goes West)>와 같은 작품이 <언프리티 소셜 스타>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여전히 심란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요즘의 나는 수입된 영화의 제목과 홍보 카피가 어색하게 느껴지면 질문을 해본다. 왜 저렇게 지었을까? 이 유추의 과정은 짜증을 내는 것보다 생산적이며(왜냐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대중적'이라고 여기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최근에 내가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 작품은 영화 <한나>였다. 이 영화의 홍보 카피 중 하나는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나였다.'

의아했다. 정말 그럴까? 내가 궁금증을 가진 것은 주인공인 '한나'가 '노년'의 '여성'이어서는 아니였다. 그런 삶에 우리가 공감할 보편적인 지점이 한치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나이든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는 모두 그녀였을 수 있다. 다만 내가 질문을 하게 된 것은 한나가 너무도 소외된 삶을 살고 있었으며 영화의 연출이 그녀의 그런 위치를 부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소외된 한나의 삶
 
 영화 <한나> 스틸사진

영화 <한나> 스틸사진 ⓒ 영화사 마농

 
제목처럼 영화 <한나>는 주인공 한나의 일상을 담고 있다. 관람을 하다 보면 참으로 정직한 제목이다 싶을 것이다. 카메라는 한나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며 그녀가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청소를 하는 소소한 순간까지 미동도 않은채 모두 롱테이크로 비추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들이 솔직히 괴로울 정도로 길어서 중간에는 '내가 왜 저 사람이 화병에 꽃을 담는 장면까지 보고 있어야하지?'하는 질문이 들 정도다.

사실 한나 역시도 카메라 만큼이나 시종일관 정적이기 그지 없다.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과 피로의 흔적을 제외하면 별다른 감정도 동요도 나타나지 않는다.(여담이지만 놀라운 사실은 주연인 샬롯 램플링이 최소한의 절제된 표현만으로도 한나가 어떤 사람인지 관객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이 영화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탁월한 시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런 한나의 남편은 모종의 사건 때문에 감옥에 가있으며, 이 과정에서 부부와 아들의 관계는 틀어졌고 그래서 손주의 생일 파티에 찾아간 한나는 방문을 거부당한다. 물론 한나는 일을 하고 연극을 배우러 다니지만 주변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에 한나는 홀로 심지어 주변부에 존재한다. <한나>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사건'이라 부를 일들이 한나를 비추는 화면 밖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문 너머에서, 화면을 벗어난 어딘가에서 연인들은 싸우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제발 만나달라며 소리를 지른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한나는 주인공이지만 다른 영화에서라면 '행인 1'이나 '승객 2' 정도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배역에 그 정도의 호칭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건의 순간에 한나는 대사조차 하지 않으므로.

'한나'라는 캐릭터가 지닌 소수자성
 
 영화 <한나> 스틸사진

영화 <한나> 스틸사진 ⓒ 영화사 마농

 
이 영화에서 한나는 두 번 정도 강렬한 감정을 표출한다. 하나는 한나가 가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없어 당황하는 순간인데, 우리는 이 장면의 끝에서 사실은 그녀가 연극 수업을 받는 중이었으며 또한 한나의 감정도 연기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게에서 꽃을 고르던 한나는 거리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유리창 너머로 이를 보게 된다. 카메라에 담을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조명 받을 수 있는 삶은 따로 있고, 한나의 것은 그렇지 않게 여겨진다는 것일까.

나머지 하나는 한나가 아들에게 '누구도 반기지 않으니 우리를 내버려달라'는 말을 들은 이후의 장면이다. 그녀는 지하철 화장실에 앉아 처절하게 오열한다. 그러니까 스크린에 비해 작고 초라한 무대나 누추한 화장실에서가 아니라면 한나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일 수 없다. 역설적으로 작품이 그런 삶에 촛점을 맞추었기에 그녀는 이 영화에서 중심에 선다.

우리는 누군가 세상에서 밀쳐지고 소외되는 데에 늘상 격렬한 폭력이 동반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은연 중에 계급과 성별, 연령에 따라 개인에게 어울리는 공간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사회는 소수자들이 침묵할 장소를 은밀히 지정해 놓고 그 곳에서 조명을 치워버린다. 어둑하고 낡은 아파트나 지하철의 화장실과 같은 장소들, 누구도 흥미가 없고 다가가고 싶어하지 않는 공간들. '수감자의 아내', '아들에게 버림 받은 엄마', '노년의 1인 가구 여성'인 한나도 그런 자리를 배정 받은 소수자들 중 하나다. 누가 더 소외되었나를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지만, 솔직히 나는 젊은 동성애자인 나보다 한나가 더욱 소수자성이 강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는 한나와 같은 사람에게 더욱 관심이 없다.

'우리는 모두가 한나였다'가 의미하는 것 
 
 영화 <한나> 스틸사진

영화 <한나> 스틸사진 ⓒ 영화사 마농

 
그리고 나는 이제 영화가 왜 한나의 사소한 일상을 집요하고 길게 담았는지 이해한다. 밀쳐진 삶이라고 가치가 없는 삶은 아니다. 그런 인생에 일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비참하리만치 사회에서 비가시화 되어있고 그래서 누구도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어딘가에선 먹고, 마시고, 집을 정돈하고, 잠을 청한다. 한나는 그리고 한나와 같은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한나>의 롱테이크는 이 당연하지만 쉽게 무시되어온 사실을 치열하게 인지시키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한나의 남편이 왜 감옥에 갔고 어쩌다 가족 관계가 파탄이 났는지 설명하지 않은 게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관객이 한나의 행적을 알고 그녀를 판단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녀가 그런 삶을 살만한 일을 저릴렀다고 평가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며 선입견 없이 한나의 일상에 함께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외된 자리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적막을 체험할 수 있다. 때문에 내게 <한나>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퀴어'한 영화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나>는 소수자의 삶을 세상에 기입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며 윤리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연극수업에서 한나는 자신이 준비한 연기를 보여주려다 실패하고 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지하철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열차가 출발하자 한나와 같은 자세의 탑승객들이 무수하게 화면을 지나간다. 이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정도만 다를 뿐 우리가 인생에서 늘 주인공일 수는 없다. 심지어 기회가 찾아온 순간에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실패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누구나 소외의 경험은 한 번쯤은 하기 마련이다. 화려하고 주목 받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이 외로움에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한나였다'는 말이 그런 의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나의 삶이 우리의 것은 아니지만 때로 나는 그녀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인생이 견딜 수 없이 하찮다고.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나간 한나를, 그 곁에 끈질기게 서있던 카메라를 생각한다. 나는 감히 나의 인생을 하찮다고 말해선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나에 대한 큰 모욕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쳐진 이들의 삶을, 때로는 밀쳐지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기 위해.
한나 샬롯 램플링 소외 소수자 우리는 모두가 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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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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