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의 신녀 시미(정은채 분).

<안시성>의 신녀 시미(정은채 분).ⓒ 영화사 수작

 
고구려와 당나라의 645년 대격돌을 다룬 영화 <안시성>에는 신비한 여성이 등장한다. 주몽의 계시를 받는 고구려 신녀 시미(정은채 분)다. 시미는 안시성 전투 직전의 주필산 전투 때 당나라군에 붙들렸다가 고구려 진영으로 귀환한다. 돌아온 뒤에는 고구려의 패전을 예언하며 안시성의 투항을 권유한다.

<안시성>의 신녀는 주몽의 활을 보관하고 있으며 전투행위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속의 안시성 전투에는 이런 정황이 묘사돼 있지 않다. 이 경우에는 기록이 없다 하여 그런 역사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외국 역사서와 달리 삼국사기에 신녀에 관한 기록이 극히 적은 것은 이 책이 유학자들의 관점에 입각한 책이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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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에서처럼 신녀들이 국가권력을 위해 일한 사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 편에 따르면, 신라 박혁거세 사당의 초대 제사장은 그의 딸 아로 공주였다.

고대 사제들은 신비한 영적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다. 아로 공주가 최고 사제가 됐다는 것은 그가 샤먼(무당)이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샤먼들의 세계인 신녀 조직에서 영적 능력 없는 일반인이, 아무리 공주일지라도, 최고 사제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은 일본에 편입돼 있는 오키나와의 역사에서도 신녀들로 조직된 국가 기관이 발견된다. 오키나와 왕국(유구 왕국)의 황금시대로 손꼽히는 쇼우신왕(재위 1477~1526년)의 주요 치적에도 신녀 조직의 정비가 포함된다.

쇼우신왕의 집권기는 조선 성종·연산군·중종과 겹친다. 최근 개봉된 영화 <물괴>에 나오는 경복궁 괴물 출현 사건(1527년)이 발생하기 전년도까지 재위한 임금이다. 오키나와 출신 역사가인 호카마 슈젠의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쇼우신왕의 업적 중 하나로 신녀 조직의 재편을 언급했다.
 
"고유 신앙에 뿌리를 둔 신녀들을 국가적으로 재편성하고, 기코에오오키미(聞得大君)를 정점으로 하는 종교조직을 정비했다."

최고 신녀인 기코에오오키미를 정점에 둔 신녀 기관을 정비한 게 쇼우신왕의 치적 중 하나였다. 고대 국가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재정 확충이었다. 전쟁을 벌여 남의 나라 백성이나 농토를 빼앗은 것도 농업생산을 증대시켜 조세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로 돈에 민감했기 때문에, 옛날 국가 역시 이익이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왕국의 황금기를 구가한 쇼우신왕이 신녀 조직을 정비한 것은 그것이 국가적으로 이로웠기 때문이다. 국가를 통합하고 민심을 다독이는 등의 일에 무녀 기관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미.

시미.ⓒ 수작

 
기원전 5세기 인물인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도 신녀와 국가권력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역사>에는 자기 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 정치권력을 위해서도 일하는 신녀들이 등장한다.

지금의 터키에 리디아 왕국이 있었다. 리비아가 아니라 리디아다. 이 왕국 최후의 군주는 크로이소스(재위 기원전 560~546년)였다. 그는 동쪽에서 팽창해 오는 페르시아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서쪽 그리스 및 남쪽 북아프리카 신녀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페르시아와 한판 대결을 펼쳐도 되겠는지 물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 상황을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서술했다.
 
"마음을 그렇게 정한 그는 헬라스의 신탁소들과 (북아프리카) 리뷔에의 신탁소에 물어보기로 하고 각지로 사절단을 파견했으니, 더러는 델포이로, 더러는 포키스 지방의 아바이로, 또 더러는 도도네로 갔다. 또 더러는 암피아라오스와 트로포니오스와 밀레토스의 브랑키다이로 파견되었다."

리디아 왕국이 그리스 및 북아프리카 신탁소에 있는 신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것은, 이 지역 고대 무녀들이 다수의 국가권력을 위해 일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각지에서 수집한 무당들의 예언을 기초로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오늘날처럼 과학적 방법으로 지식을 축적한 전쟁 전문가들이 드물었으므로, 샤먼들의 신통력에 기대어 개전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에서 크로이소스를 리디아왕국 최후의 군주라고 소개했다. 그가 최후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은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받은 신녀의 점괘는 '네가 이긴다'였다. 페르시아와 싸우면 이길 거라는 예언이었다. 크로이소스는 결국 나라를 망쳤다.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조인성 분)은 신녀의 예언과 달리 전쟁을 결심했다가 승리를 거둔 반면, <역사> 속의 크로이소스는 신녀의 예언대로 전쟁을 결심했다가 패배를 맛봤다. 공통점은, 양쪽 신녀 다 '돌팔이'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신녀들은 국가권력과 제휴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 혹은 전 사회적 존경도 받았다. 이슬람교 <코란>에서도 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코란> 제2장 '암소의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믿음을 가지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래에 강물이 흐르는 낙원을 가질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라. 그 과실이 매일의 양식으로 주어질 때 그들은 '전에 받은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이처럼 비슷한 것을 받으며, 청순한 배우자를 데리고 영원토록 살 것이다."

카이로대학에서 유학하고 사우디와 카타르에서 교수로 있었던 김용선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해설에 따르면, '청순한 배우자'는 고대 아랍 신화에 나오는 신녀를 지칭한다. 의로운 남성들과 함께하지만 영원히 처녀로 존재한다는 여성들이다. 신녀와의 영원한 동거에 대한 환상이 존재했을 정도로 신녀들이 경외감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 역사 기록에서 신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 왕국들은 신의 권위를 기초로 수립됐다. 그랬기 때문에 신과 교류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신녀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양만춘(조인성 분).

양만춘(조인성 분).ⓒ 수작

 
한편, 고대 국가에서는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전쟁터에도 동행했다. 이들이 전쟁터에서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점을 쳐서 상대방 진영의 사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기원전 11세기 강태공의 병법서일 수도 있다고 알려진 <육도>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전투 개시 시점을 결정할 때뿐 아니라 공격 방향을 결정할 때도 점을 쳤다. 그래서 장군이나 참모 중에 무속인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이나 스파이를 활용해 상대방 군영의 기밀을 알아낼 수 있지만, 그런 것들로도 결코 수집할 수 없는 내밀한 정보도 적지 않다. 상대방 지휘관이 내일 어떤 전술을 선택할지 등등은 알아내기 어렵다. 이런 경우에는 지휘관이나 참모의 감(感)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고대에는 그런 '감'을 종군(從軍) 무속인들한테서 얻어냈다. 합리적 방법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그런 식으로 획득하고자 했다. 무속인이 제공하는 그 '감'이 맞든 안 맞든, 지휘관은 그것을 통해 확신이란 것을 가질 수 있었다. 확신을 갖고 전투에 임하는 것과, 불안감을 갖고 전투에 임하는 것의 차이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전쟁이 났을 경우, 신녀들은 당연히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군 무속인이 되어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 않더라도 국가를 위해 자신의 영적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주나라의 행정체제를 정리한 <주례>에 따르면, 나라에 재앙이 생기면 여무(女巫) 즉 신녀가 곡하고 노래했다. 다른 나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안시성>의 시미처럼 직접 종군하지 않더라도 신녀들은 승전을 위해 자기 신에게 열심히 기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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