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비스(신성록)가 제루샤(임혜영)에게 고백하고 있다.

제르비스(신성록)가 제루샤(임혜영)에게 고백하고 있다.ⓒ 달컴퍼니

  
아무리 좋아해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대를 만날 경우가 살면서 딱 한 번쯤은 있기 마련이다. 혹여 마음을 고백한 뒤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지는 않을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하는 고민에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만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의 두 주인공 제르비스와 제루샤도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공연을 보는 내내 마음을 꽁꽁 숨기려 노력하는 귀여운 두 사람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알고 보면 귀여운 키다리 아저씨 제르비스
 
삼연으로 돌아온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고아원 가장 큰 언니 제루샤가 자신의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처음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를 알게 된 건 10대 무렵 소설을 통해서였다. 집안 책장에 꽂혀있던 명작 동화 중 하나였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낭만적인 단어 때문이었을까. 책에 금방 빠져들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무대에서 다시 만난 <키다리 아저씨>는 예전보다 더 나를 설레게 했고 따뜻하게 만들었으며 사랑에 대한 용기를 줬다.
 
공연 보는 내내 나의 입 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던 데는 쾌활하고 톡톡 튀는 제루샤가 큰 몫을 했지만 키다리 아저씨 제르비스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키다리 아저씨>를 소설로 읽었던 어린 시절 나는 제루샤가 그랬듯이 키다리 아저씨를 키 크고 돈이 많은 엄청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그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아저씨'라는 어른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뮤지컬 속 키다리 아저씨는 어른이 아닌 '소년'이었다. 어쩌면 제루샤보다 감수성도 더 풍부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내가 그동안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까. 제루샤의 편지를 읽느라 약속까지 잊어버리는 제르비스를 보면서 '아저씨도 나처럼 서툰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부잣집 도련님인 제르비스는 고아원의 큰 후원자였다. 항상 남학생들에게만 후원을 해왔지만 제루샤의 수필을 읽고 글 솜씨에 반해 처음으로 여학생에게 후원을 시작했다. 제르비스는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제루샤에게 한 달에 한 통씩 편지를 받았다. 다만 절대 답장은 안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런데 답장을 안 하기에는 제루샤의 편지가 너무나 발랄했다.

답장이 안 온다는 걸 알면서도 제루샤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대머리세요?" "백발이세요?"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그걸 읽은 키다리 아저씨 제르비스는 "나 늙었대"라며 시무룩해 한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답장을 썼는데 끝내 부치지는 못했다.

대신 직접 제루샤를 만나러 갔다. 본인이 키다리 아저씨라는 사실을 숨긴 채 원래 모습인 부잣집 도련님 제르비스의 모습으로 다가갔다. 제르비스는 제루샤에게 맨해튼, 윌로우 등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주며 그녀의 인생 속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편지로 이어진 사랑
  
 제루샤 (강지혜)쓴 편지를 제르비스(송원근)가 읽고 있다.

제루샤 (강지혜)쓴 편지를 제르비스(송원근)가 읽고 있다.ⓒ 달컴퍼니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물들어 갔다. 이미 마음은 깊어질 때로 깊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무려 4년이나 마음을 숨겼다. 제루샤는 갑자기 연락이 끊긴 제르비스에 대한 마음을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털어놓았고, 이 사실을 접한 제르비스는 안타까워 하면서도 '제루샤를 바라보기만 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은 대부분 '제루샤의 편지'로 흘러간다. 한 달에 한 번씩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제루샤의 생활을 알 수 있고 그걸 읽는 제르비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편지를 쓰는 건 오직 제루샤이지만 제루샤가 쓴 문장들을 제르비스가 읽기에 그의 마음도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는 장면은 극히 일부지만 오히려 서로를 못 보는 상태에서 노래하고 말하니 애타는 마음이 고조된다. 무대의 앞부분은 주로 제루샤가 돌아다니는 학교와 방이고 뒤 쪽은 제르비스의 서재다. 제르비스는 제루샤를 항상 볼 수 있지만 제루샤는 언제나 키다리 아저씨를 상상만 한다. 이러한 극의 내용이 무대의 영역과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표현되니 아름다우면서도 애잔했다.
 
말하고 글을 쓰는 주체는 제루샤지만 감정의 높이를 더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건 제르비스였다. 그는 제루샤의 편지가 도착하면 하나하나 마음에 담은 후 서재 책장에 압정으로 고정시켜달아 놨다. 편지가 쌓일수록 제루샤를 향한 마음도 커졌다.
 
제르비스가 제루샤에게 빠진 이유
 
난생 처음 고아원을 벗어나 대학 생활을 시작한 제루샤에게 세상은 참 낯선 곳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알고 있는 내용들을 제루샤만 몰랐다. 셰익스피어가 누구인지, 나이팅게일이 누구인지 몰라서 수업 시간에 망신당한 적도 많았다. 남들보다 모르는 게 많았기에 배움의 기쁨도 컸다. 후에는 "나는 사회주의자가 될 것 같아" "여성은 참정권이 왜 없는거지" 등의 말을 하면서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제루샤가 성장하는 모습을 키다리 아저씨는 편지를 통해 읽었고, 제르비스는 곁에서 지켜봤다. 그러면서 때로는 키다리 아저씨의 힘을 이용해 제루샤의 생활을 통제하며 다른 남자를 못 만나게도 했다. 하지만 제르비스에게 제루샤는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르비스가 4년 동안 자신이 키다리 아저씨라는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제루샤가 멀리 달아나 버릴까봐.
 
말이 4년이지 실제로 이 시간을 겪은 두 사람도 참 대단하다. 4년 동안의 시간을 2시간으로 압축한 공연을 보면서도 나는 애가 타고 못 견디겠는데 그 두 사람은 어떻게 참았을까. 나를 이렇게 애 태우는데 성공한 <키다리 아저씨>의 매력은 노래에도 가득하다.

'컬러 오브 유어 아이즈'는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제르비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 느꼈던 감정을 편지로 들려주는 곡이다. '나의 맨하튼', '나 늙었대', '존 그리어 고아원의 제일 큰 언니' 등 <키다리 아저씨의> 노래들은 하나 같이 다 '키다리 아저씨'스러운 노래들이다. 궁금한 마음을 담은 설레는 노래, 서로를 향한 사랑이 귀엽게 표현되는 노래 등 이 작품에 꼭 맞는 사랑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다.
 
편지의 매력이 고스란히
  
 제루샤(유리아)와 제르비스(강동호)가 마침내 마음을 고백한 뒤 포옹하고 있다.

제루샤(유리아)와 제르비스(강동호)가 마침내 마음을 고백한 뒤 포옹하고 있다.ⓒ 달컴퍼니

 
편지는 가장 따뜻한 말하기 방식이다. 쓰는 동안 상대를 생각하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들려주기도 한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선택하면서 신중해지고 따뜻해지기 마련이다. 편지를 쓰는 사람의 시간도 담겨있고 읽는 사람의 시간도 담겨있다. 키다리 아저씨와 제루샤가 편지를 통해 모든 시간을 함께 공유했듯이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사랑도 참 빨리 빨리다. 메신저는 보내자마자 읽을 수 있고 편지를 보내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지금 시대만의 매력도 있을테지만 가끔은 이 두 사람처럼 편지를 쓰면서 상대를 향한 마음을 종이 위에 담아보는 게 어떨까. 편지로 전하는 사랑 이야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한 가지 정말로 확실한 건 내가 이때 까지 본 모든 뮤지컬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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