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몰리스 게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몰리스 게임> 포스터

<몰리스 게임> 포스터ⓒ (주)영화사 빅


아론 소킨은 처음부터 <몰리스 게임>을 연출할 계획은 아니었다. <소셜 네트워크>의 데이비드 핀처 감독과 한번 더 호흡을 맞추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제작자 에이미 파스칼이 아론 소킨에게 직접 연출을 해보라 제안했다. 어느 정도는 데이비드 핀처의 연출 스타일에 영향받은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몰리(제시카 차스테인)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한 오프닝 시퀀스는 이목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흡사 랩 하듯이 운율감이 살아있는 것 같다. 아론 소킨의 영화답게 기본적인 대사량도 많지만, 그보다 많은 분량의 내레이션이 양날의 검이다. 유명 인물의 자서전을 각색한 데다가, 내레이션이 계속 전개를 도와주면서 어쩐지 해피 엔딩일 것 같다. 이야기는 급박하게 클라이맥스를 향해 흘러가는데 반해 긴장감은 다소 결여된다. 

제시카 차스테인 캐스팅이 아닌, 다른 배우는 잘 상상되지 않는다. 지적이고 주관이 뚜렷하면서 역경이 있어도 꺾이지 않고 더 크게 한방 날릴 것 같은 이미지. 여기에 이보다 잘 부합하는 배우가 있을까. <미스 슬로운>에서도 노련하고 당찬 로비스트 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한 바 있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헤임달 역으로 친숙한 이드리스 엘바의 연기도 탄탄하다.  

<몰리스 게임>은 크게 3가지 시간대로 이뤄졌다. 몰리가 FBI의 급습을 당하면서 벌어지는 현재 진행형, 올림픽 출전을 위해 훈련하고, 대회 참가했던 과거완료형, 선수를 은퇴하고 웨이트리스에서 시작해서 포커 세계의 여왕이 되기까지의 과거 진행형이다. 무슨 영문법 교재 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달리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교차 편집으로 시간대를 자유롭게 오가는데 그럴 때마다 굳이 시점을 자막으로 명시하지 않고도 이해가 쉽도록 매끄럽게 연출했다. 포커에 푹 빠져 지냈던 유명인사를 추측해보는 재미도 있다.
 
 <몰리스 게임> 스틸컷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포커는 소재일 뿐, 도박을 미화하지 않는다

몰리는 포커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포커 하우스가 열린 첫날, 필요한 정보는 거의 구글링을 통해 알아낸다. 포커할 때 어떤 음악을 주로 듣는지 알아보고, 모르는 포커 용어도 그때마다 검색으로 습득한다. 정치학 전공으로 흐름을 읽어내는 데에 능하고, 운동으로 단련된 승부 기질도 있다. 지하세계 로열클럽 포커 하우스의 여왕이 된 이후에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찰리 채피(이드리스 엘바) 변호사의 딸이 읽고 있는 책이 아서 밀러의 <시련(The Crucible)>이고 후에 몰리의 대사에도 직접 인용된다. 

<몰리스 게임>은 몰리가 포커 하우스를 운영하는 내용에 많은 장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도박과 불법을 미화하는 영화가 아니다. 몰리는 로스쿨을 고려했을 만큼 준법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비록 음지의 사업을 운용하기는 하지만 최대한 법 테두리 안에서 유지하려고 애쓴다. 몰리는 포커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한 판에 작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만 달러의 수많은 승부를 지켜봤다. 블러핑이나 도박수를 던지지 않는 정석적인 포커 플레이어에 가깝다. 판사 앞에서도 담담하게 유죄를 인정한다. 마약범죄자들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고, 후에 어떤 수모를 겪을지도 알 수 없다. 판사는 법리적인 판단에 앞서 몰리가 재판에서 보인 올바른 태도 또한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몰리는 언제 판돈을 올려야 할지 언제 카드를 접어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한다.
 
 <몰리스 게임> 스틸컷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모든 것의 바탕은 신뢰

아론 소킨이 몰리 블룸의 자서전을 각색하면서 주목한 것은 두 부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어 퓨 굿맨>, <웨스트 윙>, <스티브 잡스>를 통해서도 아버지와의 갈등을 다뤄왔다. 몰리의 아버지, 래리 블룸(케빈 코스트너)은 혼인 서약을 깨고 외도를 한다. 그 행동은 어릴 적 촬영한 홈 비디오에도 남아 있듯이 몰리의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몰리는 신뢰를 지키는 것만이 사업을 지키고, 더 멀리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몰리가 계속 합법적인 하우스 운영을 하다가, 결국 불법적인 수수료를 받은 것도 고객의 배당금(신뢰)을 지키기 위함이다. 또한 몰리의 매력에 반한 고객들이 끊임없이 구애를 한다. 몰리는 그런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고 원칙을 지킨다. 아버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찰리 채피 변호사는 딸 앞에서 항상 모범을 보이고 싶어 한다. 처음 몰리와 만남을 하게 된 이유도, 딸이 몰리의 책을 읽고 팬이 됐기 때문이다. 법정에 설 때까지도 변호사 수임에 대해 깊이 고민하다가 마지막 순간이 돼서야 수락한다. 비록 몰리가 불법을 저지르긴 했어도 부도덕한 영혼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몰리는 검사와 형량을 놓고 협상하는 와중에도 실형을 각오하면서까지 고객 명부를 넘기지 않는다. 아무도 몰리를 대신해 나서는 사람도 없고, 지독히 외로운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찰리 채피 변호사는 몰리의 행동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재차 설득을 시도하면서 이유를 다그쳐 묻는다. "내 이름이니까요!" 몰리는 소리친다. "이제, 시련까지 읽어요?" 이쯤 되면 딸의 롤 모델, 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몰리는 자신의 신념을, 이름을 지켜낸다. 

<몰리스 게임>은 아버지와 딸 사이에 신뢰,  모든 인간관계 사이에 신뢰에 대한 이야기다. 
 
 <몰리스 게임> 스틸컷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몰리가 기꺼이 두 번 실패한 이유

영화는 다시 몰리가 스키 사고를 당하는 오프닝 시퀀스로 되돌아간다. 솔잎 하나로부터 일어나게 된, 심각한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다. 몰리는 들것에 실려나가길 마다하고 직접 두 발로 서서 걸어 나간다. 전광판에는 "몰리 블룸 완주 실패"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몰리가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한다.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우스에서 호구라고 불리던 브래드(브라이언 다아시 제임스)는 그렇게 돈을 잃으면서도 포커를 계속한다. 능숙한 포커 플레이어인 할랜(빌 캠프)도 브래드의 순수한 열정과 운에 거액을 잃고 만다. 인생도 포커 게임처럼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때로는 냉정한 승부사보다 열정을 잃지 않는 도전자가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영화 리뷰를 개인 블로그(브런치, 네이버)에 동시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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