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낭군님>.

<백일의 낭군님>. ⓒ tvN

9월 10일 첫 방송을 탄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은 제1회분에서 조선시대 혼인 장려책을 보여줬다. 기우제를 올려도 비가 내리지 않자, 나라에서 20세 이상 노처녀·노총각의 혼인 장려정책을 펼쳤다. 대상자들을 관아에 모아놓고 반강제로 짝을 지어주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벌어지는 일들이 이 드라마의 스토리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어릴 적에 만나 호감을 갖게 된 홍심(남지현 분)과 원득(도경수 분)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돼 홍심은 역적의 딸로 전락해 몸을 숨기게 됐고, 원득은 그 역적 사건으로 아버지가 왕이 됨에 따라 세자의 신분을 갖게 됐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홍심과 원득이 혼인 장려책을 계기로 만난 뒤에 펼쳐지는 스토리를 드라마에서 볼 수 있다.
 
아동용 유교 교재인 <소학> 해설서 <소학집주>에 따르면, 옛날에는 여성 20세, 남성 30세에 결혼하는 게 이상적이었다. 이 나이를 넘기면 노처녀·노총각으로 불렸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국가의 의무 속에 음양의 조화가 있었다. 국가가 천지만물 차원에서 음양을 조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도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책무와 관련해 "국정 전반을 통할하고 음양을 다스리며 국가를 경영한다"고 했다. 삼정승도 임금을 도와 음양을 조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이 20세·30세가 지나도 결혼하지 못하는 것 역시 음양의 부조화로 인식됐다. 천지만물에 고장이 생긴 것으로 간주됐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혼인 장려를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결혼 적령기를 넘길 경우에는 한성부 및 도(道)가 도움을 제공하고, 사안이 심각할 경우에는 호조·감영·읍에서 별도의 지원을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이 혼인 장려규정을 지금 말로 바꾸면, 백성들이 결혼을 못하면 서울시청과 도청이 지원하고, 사안이 심각한 경우에는 기획재정부·도청·읍면이 나서서 별도 지원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된다.
 
<경국대전>은 조선 건국 93주년인 1485년부터 시행됐다. 이는 종래의 성문법과 관습법을 망라한 것이었다. 위 혼인 장려규정도 이 법전에 의해 최초 규정된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전해지던 정책을 성문화한 것에 불과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경국대전> 시행 이전인 1472년에도 정부가 노처녀들에게 혼수비용을 지원했다. 지원 품목은 쌀과 콩이었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곡물이 화폐처럼 사용됐으므로, 지금으로 치면 혼수비용으로 현금을 지원한 거나 마찬가지다.

미혼자들을 불러놓고 강제로 짝지어줬다는 것은 드라마 속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재정 지원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미혼자가 늘어나는 것은 '연애의 기술'을 몰라서가 아니라 경제가 안 좋아서라는 것을 그때 위정자들도 알고 있었다. 일부러 '소개팅'을 주선하지 않아도, 재정 지원만 해주면 알아서들 결혼하리라 기대한 것이다.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20세 이상에 대한 지원 정책이 언급됐지만, 실제로는 성별로 차이가 있었다. 여성의 경우에는 20세 이상 혹은 25세 이상을 대상으로 했고, 남성의 경우에는 대체로 30세 이상을 대상으로 했다. 몇 살 이상을 지원할 것인가는 그때그때 재정 형편에 따라 조정됐다. 
 
 조선 후기 결혼식.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황해도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복도에서 찍은 사진.

조선 후기 결혼식.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황해도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복도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혼인 장려책은 음양의 조화를 촉진하는 차원을 떠나, 정치적 계산에 입각한 정책인 측면도 있었다. <백일의 낭군님>에서처럼 가뭄 같은 천재지변 때 왕들은 이따금 이런 정책을 고려했다. 가뭄이 생기면 기우제를 지내는 동시에 혼인 장려책도 함께 검토한 것이다.
 
가뭄은 일반 백성들의 생업뿐 아니라 특히 지주층의 이익을 위협했다. 그래서 가뭄이 지속되면 보통 백성들뿐 아니라 지주들의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일반 백성보다는 지주들의 반발이 좀더 신경 쓰였다.
 
평범한 백성들의 경우에는, 대규모 봉기를 조직하지 못하는 한, 웬만해서는 임금한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힘들었다. 반면에, 지주들은 달랐다. 양반 관료의 대부분이 지주 가문에서 배출됐기 때문에, 지주들의 불만은 언제라도 곧바로 임금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지주들은 '임금 지지율'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지주들의 동향을 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뭄이 계속돼 농업 경영에 지장이 초래되면, 임금은 기우제 같은 것으로 시간을 끌면서 그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왕들은 혼인 장려책을 내놓곤 했다. 노처녀·노총각들한테 한이 쌓이고 쌓여 음양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가뭄이 생긴 것으로 보이니 이를 해소할 목적으로 혼인 장려책을 펼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혼인 장려책이 가뭄 해소에 직접적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을 사람들은 옛날에도 얼마 없었다. 하지만, 이 정책 속에는 일반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측면뿐 아니라, 지주층과 왕실의 이익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왕들은 혼인 장려책을 통해서도 지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혼인 장려금을 지원해 가구 수가 늘어나고 신생아가 태어나면, 머지않아 산업생산 증가 및 세수 증대의 효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가구 수와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국가한테는 직접적 이익이 됐다. 혼수품 지원 명목으로 무상 제공한 쌀·콩 이상으로, 국가는 더 많은 것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어느 시대나 고용주들은 인구 감소를 우려한다. 인구가 줄면 노동 공급이 감소할 뿐 아니라, 노사관계에서 고용주가 불리해지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지주들도 똑같이 계산했다. 양인이든 노비든 소작농 후보군이 많아야 장래의 농업경영을 보장할 수 있었다. 인구 증가는 지주층의 장기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뭄 때 국가가 혼인장려책을 실시하면, 지주들은 당장의 가뭄 해소에는 도움이 안 되더라도 혼인 장려책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정책이 자신들에 대한 군주의 성의 표시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이런 정서가 지주층 사이에 확산되면, 가뭄으로 인한 불만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혼인 장려책은 천재지변으로 민심이반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일반 백성뿐 아니라 여론 주도층인 지주들의 입을 틀어막는 동시에 왕실 자신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결혼을 미뤄왔던 두 사람뿐 아니라, 긴장관계에 있는 왕실과 지주층 양쪽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일석다(多)조'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백일의낭군님 혼인장려 노처녀 노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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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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