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빨간 마후라>

영화 <빨간 마후라> ⓒ 한국영상자료원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영화 <빨간 마후라>의 노래다. 요즘은 거의 들을 수도 없는 이 노래를 어쩌다 흥얼거리면 아이들의 눈은 동그래진다.
 
"무슨 노래예요?"
"군가 같은데 어떻게 엄마가 알고 있어요?"
"응?........ 후후."

 
아이들에게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곤 하지만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노라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내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중부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단발머리 껑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 때, 아버지는 서울 중구청 옆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셨다. 가죽을 자르고, 고무풀로 붙이고, 망치질을 하고. 나는 그런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자투리 가죽으로 소꿉장난을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구두를 만드느라 투박해진 손만큼이나 무뚝뚝했던 아버지였지만 막내였던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해주셨다.
 
아버지 구둣방에서 가까운 곳에 중부시장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끝나는 부분까지 한 블록 정도는 될 정도로 야채, 과일, 생선, 정육 등은 물론 자잘한 좌판까지 꽤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건어물이 유명하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한 쪽으로는 간편한 먹거리를 파는 곳과 다양한 식당들이 있어 아버지는 저녁시간에 한잔 술이 생각나면 가끔 그 곳을 찾곤 하셨다. 그럴 때면 나도 항상 함께였다. 어린 나에게 있어 중부시장은 온갖 것들을 구경할 수 있고 뭔가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약장수의 감칠 맛 나는 노래와 엿장수의 짤깍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잘 어울리는 구수한 타령이 들리는 재미있는 세상이었다. 그 중 가장 특별한 즐거움은 극장이었다.
 
들쑥날쑥한 시장 끝자락에는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2층 건물이 있었는데 그 곳에 중부극장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가한 오후시간이면 내 손을 잡고 그 곳에 가곤 했었는데 그런 날이면 마냥 즐거웠다. 극장 위에 멋지게 그려진 영화 포스터는 궁금함을 갖게 했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극장 안으로 들어갈 때는 특별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우쭐감이 생겼다. 두툼한 문을 밀고 들어서면 순식간에 어둠으로 바뀌는 긴장감을, 푹신한 의자에 앉으면 마치 부자가 된 것 같은 안락함을 느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아버지는 먹을 것이 담긴 판을 목에 두르고 돌아다니는 점원을 불러 주전부리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보통에서 벗어나는 특별함이었다.
 
 영화 <빨간 마후라>

영화 <빨간 마후라>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가 시작되면 흑백화면이 펼쳐진다. 생전처음 보는 커다란 화면은 그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 숨죽이는 가운데 낭창한 목소리로 엄숙하게 전해주는 대한뉴스, 그리고 시작되는 영화 <빨간 마후라>.
 
그 때는 비행기 장면이 많이 나왔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나와 달리 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이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단골집에 들러 막걸리도 한 잔 드셨다. 낮술은 안 드셨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은근히 엄마 잔소리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빨간 마후라>의 여운을 더 느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뿐인가? 아버지는 그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빨간 마후라>를 보기 위해 중부극장을 찾았다. 엄마 잔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극장으로 향했고 나도 그 곁을 따랐다. 한 달도 넘게. <빨간 마후라>가 끝날 때까지.

"막내야, 이 애비는 말이여, 하늘을 날고 싶어야. 영화에서처럼 비행기를 운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디 이제는 너무 늦었고, 앞으로는 비행기를 타고 싶구먼. 생각해봐야. 저기 저 하늘에 오르면 이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어쩌면 저 구름도 만져볼 수 있을지도 몰라야. 어디 그 뿐인겨? 비행기가 먼 나라로 데려다줄 테니 세상 구경도 할 수 있어야. 내가 비행기 타면 너는 꼭 데려갈 테니 너는 어서어서 자라거라. 알겄지? 그 때는 꼭 비행기를 태워줄 꺼이니. 암, 태워주고 말고."
 
구둣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눈길은 하늘에 닿아 있었고 어느새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버지 손을 잡고 꼭 비행기를 탈 것이라는 기대감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현실은 아버지의 꿈을 쉽게 이루지 못하게 하였고 아버지도 더 이상 비행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영화 <빨간 마후라>

영화 <빨간 마후라> ⓒ 한국영상자료원


그 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영화를 보며 많은 것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빨간 마후라>는 가슴 한 쪽에 아릿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본 영화가 주는 설렘으로, 중부극장의 또 다른 세상으로, 아버지의 꿈으로, 그리움으로.
덧붙이는 글 극장에서 생긴 일 공모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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