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무대 예술은 이야기의 재료로 실존 인물의 생애를 택하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 위인전 식의 교육적 목적을 바라는 관객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창작자들은 실제 사건을 신선한 재료 삼고, 픽션(Fiction)을 조미료 삼고, 스토리텔링 방식을 조리 방법 삼아 어떻게 간이 적절하고 먹음직한 음식을 만들까를 고민하면 된다.

특이한 점은 무대 예술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삶은 주력 메뉴라는 점이다. 여타 장르와 비교했을 때도, 무대 예술에서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무대 위에 세워, 그들의 삶과 음악으로 이야기를 펼쳐내는 경우가 많다. 클래식 장르에 록 음악을 더한 뮤지컬 <모차르트 오페라 락>, 살리에르 시점에서 천재적 음악가 모차르트를 바라 본 연극 <아마데우스>, 두 사람 오페라 제작 과정을 담은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등 수많은 무대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그들의 삶은 재현됐다.

더욱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삶은 '세기적 라이벌'이라는 입증된 레시피도 있다. 옳다구나! 레시피에 적힌 대로 푹푹 삶았더니 분명 맛있지만 이미 먹어본 맛이기에 조금 질린다. 아무리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라고 한들, 미각 세포는 쉽게 자극에 익숙해지고 따라서 인간은 계속해서 새로운 맛을 찾는 것 아니겠나. 그럼 뭔가 더 넣어볼까? 다른 조리 방법으로 익혀볼까?

뮤지컬 <살리에르>는 이와 같은 도전 정신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도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모차르트와 그 살리에르라는 재료를 이용해 만든 음식이지만, 무언가 더 첨가하고 다른 조리 방법으로 익힌 음식이라 전혀 다른 맛이 난다.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포스터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포스터ⓒ HJ컬쳐


이야기의 구성은 단순하다.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 최고의 궁정 악장이던 살리에르 앞에 모차르트라는 한 음악가가 찾아온다. 그의 음악에 매료된 살리에르. 이어 살리에르의 검은 욕망은 젤라스라는 인물로서 표출된다. 살리에르의 질투심을 상징하는 젤라스는 살리에르가 모차르트 악보를 훔치도록 하며, 그의 악보를 불태우게끔 한다.

황실을 조롱하는 내용의 가사를 썼다는 이유로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퇴출 당하고 대중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모차르트, 그의 집에 살리에르가 찾아온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르에게 죽기 전 '백조의 노래'를 완성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살리에르는 그를 돕지만 젤라스는 이를 방해한다. 이윽고 모차르트는 숨을 거둔다. 허나 그럼에도 젤라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침내 살리에르는 자신을 평생 괴롭히던 젤라스로부터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시 쓴 익숙한 이야기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HJ컬쳐


뮤지컬 <살리에르>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살리에르 시점에 기대어 서사를 진행한다. 연극 <아마데우스>가 존재하는 한 여기까지는 별반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차별점은 <살리에르>의 경우 두 사람 경쟁적 구도를 앞세우지 않았으며, 살리에르가 관찰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이 극은 살리에르의 시기와 질투심을 극대화 하고자 그의 내면에서 비롯된 인물 젤라스(질투)를 작품 전면에 등장시킨다. 

이 같은 양식은 그간 새롭지 않았던 서사에 무료함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세기를 재패한 두 음악가의 대결, 이 뻔하디 뻔한 서사를 탈바꿈하는 재치란! 더군다나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그 이야기는 두 사람이 화해하는 지점까지 충분한 서사가 쌓이지 않아 개연성 측면에서 아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리에르>는 이 서사적 아쉬움을 일부 해결한다(그렇다고 해서 이 극이 서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부분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살리에르 내면의 질투심을 육체에서 분리해냄으로써 갑작스럽게 느껴질 법한 갈등 완화를 어느 정도 해소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주요 스토리는 '살리에르의 열등감'이다. 따라서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이후 살리에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32년이라는 세월이 생략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극은 두 장면을 이어 붙이는 선택을 꾀하는데, 그렇다면 문제점은 싹뚝 잘라낸 이 두 지점을 어떻게 봉합하느냐다. 드라마처럼 '몇 년 후'를 써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의 흐름을 설명할 만한 몇 장면을 추가하기에도 자칫하면 분위기가 흐려질 위험이 있다.

창작자로서 퍽 난감했을 이 상황에 젤라스는 좋은 해결책이 된다. 살리에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너(젤라스)'라고 발표하는 순간, 그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문에 휩싸이거나, 이로 인해 미쳐버렸다거나,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다는 서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도 살리에르 자살 기도를 납득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젤라스는 이 멀고도 먼 두 지점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낭독 뮤지컬의 한계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HJ컬쳐


기실 이 작품은 중소극장에서 한 번, 대극장에서 한 번 공연된 적이 있다. 비록 흥행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수차례 재관람 하는 팬들을 양산하며 뮤지컬 애호가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성장했다. 그런데 대극장으로 발돋움했던 공연이 다시 중소극장으로, 이 번에는 낭독 뮤지컬 형식으로서 돌아왔다. 이 때문에 <살리에르>는 대극장에서 150분(인터미션 포함)이던 러닝타임을 80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압축해야 했다.

이 같은 문제에 창작자들도 퍽 난감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창작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길고 긴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압축하여 설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에서 전개는 34년 전 살리에르가 작성한 일기를 모차르트가 읽는 형식으로써 전해진다. 그러나 이 방법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대사는 (이 작품의 핵심인) 곡을 진행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쓰이고, 음악은 제 갈 길을 향하고 말았다. 서사적으로 쌓아 올려진 감정이 없는데 고음의, 절규를 부르짖는 음악에 이입될 리가 있겠나. 물론 배우들 열연은 인상 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윤은 이전 시즌과 같은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는 명연기를 보여줬다.

더욱이 라이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던 음악을 피아노 한 대가 책임지도록 한 선택은 이 극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만다. 대극장 공연으로 확장된 뮤지컬을 중소극장으로, 더군다나 낭독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하려면 대규모 오케스트라 연주를 고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MR이라는 융통성 있는 선택지가 있지 않은가. 분명 이 극의 절대적인 매력은 '귀를 호강시키는' 음악이 차지한다. 아름다운 음악은 살리에르의 웅장한 음악을, 모차르트의 화려한 음악을 연상시키곤 했다. 그러나 피아노 한 대가 연주하는 밋밋한 반주에서는 살리에르의 고뇌를 느낄 수도, 모차트트의 자유로움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두 음악가의 대결도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열어둔 가능성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HJ컬쳐


그럼에도 낭독 뮤지컬로서 이 극이 무의미하기만 했냐고 묻는다면 분명 유의미한 점도 있긴 했다고 말하고 싶다. 많은 등장인물을 주인공 세 명으로 압축시키고 살리에르의 기구한 삶 앞에 소비되었던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도 덜어냈으니 말이다. 지난 시즌 공연에서 테레지아는 미쳐가는 살리에르를 보살피는 헌신적인 아내로, 카트리나는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뮤즈로써 소비될 뿐이었다. 반면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는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지 않고도 이 극이 진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또한 부수적인 인물들을 삭제하며 주인공 세 명만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 것은 다음 시즌의 서사적 완결성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당장은 아쉬움이 남지만)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하고 그 빈 자리에 세 명 서사를 (이를 테면 모차트르 안의 젤라스, 그의 죽음 같은) 채운다면 다음 시즌에서는 더욱 탄탄한 공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낭독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 장면ⓒ HJ컬쳐


이번에 <살리에르>는 '익숙한 그 맛'을 '새로운 맛'으로 변화시켰다. 비록 이번 시즌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는 낭독 뮤지컬이라는 형식상 맛 보기에 불과했을 테고, 이것만으로 그 가치를 다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다음 시즌에도 변화를 거듭해 더욱 먹음직스런 음식으로 거듭나길. 아쉬움은 낭독 뮤지컬만의 일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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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대단한 가치를 이야기하더라도 '재미'가 없는 극은 그 가치를 다 하기 힘듭니다. 그것을 소비해줄 관객이 없으니까요. 재미있게 쓰여진, 그러나 그 끝에는 오래도록 되새겨질 여운을 남기는 극을 찾기 위해 오늘도 객석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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