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래서 거장들의 첫 영화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저수지의 개들> 영화 포스터

<저수지의 개들> 영화 포스터ⓒ 미라맥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커서 비디오 대여점 점원이 되었고, 하루 종일 영화를 보며 토론회를 벌이고 손님들에게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영화들을 추천해주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했던 그는 틈이 나는 대로 글을,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썼고, 수년의 시간을 투자해 영화를 찍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재능은 있었는지 그는 완성한 시나리오를 영화사에 파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팔았다고 그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완성되지 않으면 그가 쓴 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촬영에 들어갈 것 같았던 영화가 무산 되는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곳에서 과연 청년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들은 무사히 완성되고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었을까?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미라맥스


1992년 <저수지의 개들>이 개봉했을 때, 새로운 영화의 등장에 관객들은 물론이고 영화계까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는 낯선 스타일의 영화는 이후 수없이 많은 젊은 영화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 가장 위대한 데뷔작이자 미국 독립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우리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스타일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들이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 속에 모두 들어있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는 수다스러운 대사들, 단순한 줄거리와 복잡한 플롯, 노골적이고 과격한 폭력(대사 포함),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 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식당 테이블에 정체를 알 수 없는 8명의 남자들이 둘러앉아있다. 둘을 제외하고는 까만 양복을 입고 있으며 연령대는 20대부터 60대까지(아마도?) 다양하다. 그 중 미스터 브라운(쿠엔틴 타란티노)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마돈나의 노래 'Like a virgin' 가사의 뜻에 대해 자기 나름의 분석을 늘어놓는데 극의 진행이나 캐릭터 설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심심풀이 수다에 불과하다.

이런 대중문화에 대한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수다는 앞서 말했듯이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한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대사들은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종업원에게 줄 팁을 꺼내는 중에 미스터 핑크(스티브 부세미)가 자신은 팁 같은 건 주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린다. 왜 팁을 주지 않는지, 왜 팁을 줘야만 하는지 설전이 오고가는데 여기에서도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에 대한 정보를 읽을 수는 없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꽤나 수다스러운 영화가 될 것이라는 정도의 예감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나면 영화는 점프해서 운전석에 앉은 미스터 화이트(하비 케이틀)와 총을 맞고 뒷좌석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미스터 오렌지(팀 로스)를 보여준다. 그제 서야 관객들은 조금 전 식당에 있던 남자들이 범죄자들이었구나 하고 짐작한다.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미라맥스


보석상을 털기 위해 모인 다섯 명의 범죄자는 조(로렌스 티에리)와 그의 아들 에디(크리스 펜)가 이번 범죄를 위해 모은 사람들로 서로 본명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관계들이다. 미스터 화이트, 미스터 오렌지, 미스터 핑크, 미스터 브라운, 미스터 블론드, 미스터 블루까지 이번 작업을 위해 이들이 부여받은 이름은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한 조의 대책 중 하나였지만 오히려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꼴이 되어버린다. 

누군가의 배신으로 가게의 비상벨이 울리기도 전에 이들은 경찰에 포위되고, 훔친 물건들을 제대로 가지고 나왔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각자 도주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미스터 브라운과 미스터 블루는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미스터 화이트와 미스터 오렌지가 미리 약속한 창고에 먼저 도착한다. 이어서 미스터 핑크(스티브 부세미)와 미스터 블론드(마이클 매드슨)가 도착하고 이들은 서로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은 채 조를 기다린다.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미라맥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창고에서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시에 중간 중간 각각의 캐릭터가 어떻게 이 범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이는 대부분의 타란티노 영화에서 사용되는 서술 방식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펄프 픽션>에서는 영화의 줄거리와 전혀 무관해 보이던 첫 번째 시퀀스가 마지막 시퀀스와 만나기도 한다(같은 상황, 다른 시점으로 마지막 시퀀스가 첫 번째 시퀀스의 연장임을 보여준다). 

무력하게 리더인 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이들 범죄자들은 누가 경찰의 끄나풀인지 추리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관객들도 마찬가지인데 '누가 범인일까?' 하는 궁금증은 영화 중반부에 사실은 잠입 경찰이었던 미스터 오렌지의 이야기가 나오고부터 '과연 미스터 오렌지의 정체는 밝혀질 것인가?'로 바뀌게 된다.

미스터 오렌지의 이야기가 묘사되는 방식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롭다. 조 일당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마치 배우가 대본 연습을 하듯 셀 수도 없이 많은 연습 끝에 자신이 겪지도 않은 일화(대마초가 가득 든 가방을 들고 경찰들과 수색견이 있는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온)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영상화하는데 성공한 이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저수지의 개들>은 범죄영화지만 손에 땀을 쥐는 추격신도 액션신도 없다. 도둑들이 주인공임에도 보석상을 터는 장면은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이 영화의 목표는 서스펜스와 스릴이 아니다. 모든 아마추어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의도된 것처럼 보인다. 저예산 영화여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이러한 한계가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개성이자 장점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미라맥스


폭력적이고 피가 낭자한 장면(분수처럼 피가 솟거나 마치 관객의 얼굴에 피가 튀는 것 같은)은 타란티노 영화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인데, <저수지의 개들>에서는 미스터 블론드가 70년대 밴드 '스틸러스 휠'의 'Stuck in the middle with you'을 들으며 자신이 납치해온 젊은 경찰을 고문하는 장면이, 귀를 절단하고 구타를 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에도 보는 것 이상의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고통스러워하는 경찰과 마치 명상을 하듯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미스터 블론드의 대조되는 모습이 관객의 불편함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감독이 참 짓궂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영화는 인물들의 행위에 관객을 설득하지도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스터 블론드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마지막 장면은 꽤 충격적이다. 규모가 큰 조의 조직이 너무도 허술하게 무너지는 결말에서부터 개연성을 따지고 들어가자면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지만 관객들은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게 된다.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 미라맥스


영화 제작사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팔던 청년은 그 시나리오들이 영화화되기도 전에 자신의 데뷔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두 번째 연출작으로는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30대 초반에 거장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오늘 그의 이름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그는 지금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고 로비 등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 1969년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 중이다. 2019년에 개봉하는 이 영화에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과 그 일당이 살해한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의 이야기가 포함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가 이 끔찍한 사건을 어떻게 그려낼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