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오디션 ⓒ 픽사베이


어렵고도 지난한 작업이었다. 옆에서 살짝 엿본 영화 오디션 현장은. 비단 독립 예술영화여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 아역 배우여서도 아니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주인공 배역 중 한 명이 아역 캐릭터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함께 작업한 감독은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배우는 단순한 아역이 아닌 한 사람의 배우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건 이런 뜻이었다.

"아이들이 연기를 꿈으로 가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에 연기라는 일의 대부분은 자신을 예쁘게 표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보고, 목격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가슴에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일인 것 같습니다. 표현하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친구들과 어른들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금의 이 문화가 아이가 아이를 연기하기보다 어른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의 아이를 연기하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재롱잔치일 뿐이지요. 아이가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줄 알게 되는 것은 역시 어른들의 연기에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관련 기사 : 1명당 20시간씩 3개월 걸린 오디션... 드디어 만난 완벽한 아역 http://omn.kr/npt1)


그래서일까. 참으로 공을 들였던 걸로 기억한다. 주변 영화인들의 추천도 받았고, 일반 공고도 냈으며, 소속사 관계자들로부터 프로필도 받았다. 우선 그 프로필을 가지고 감독과 프로듀서, 작가와 조연출이 상의를 거듭했고, 수십 명의 배우들 중 1차 명단을 추렸더랬다.

오디션 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먼저였다. 이후 프로듀서는 한 명 한 명 소속사 관계자와 배우 부모들과 통화를 해서 약속 날짜를 잡았다. 그렇게 잡은 아이들의 연기를, 감독은 참으로 꼼꼼히도, 사려 깊게 관찰했다.

대본 속 주어진 연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인물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또 말투나 걸음걸이 등 평소 모습은 어떠한지 등등. 무엇보다 감독은 영화 속 배역으로 걸어 들어가 온전히 그 인물로 살아 낼 수 있는지를 예민하게 느끼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내용의 오디션은 배우 한 명에만 2~3시간 씩 걸리기 예사였고, 몇 주간 여러 명의 아역들을 만나는 일은 확실히 '일'이요, 주요한 작업이었다. 시간이 돈인 프리랜서들이라지만,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캐스팅을 원하는 이들이 영화인들이라지만, 그런 작업은 단순히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떤 충만함과 예민함을 요하는 작업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돈이라니. 2년 전 기억을 길어 올린 이유는 다 그 돈이란 비겁한 변명, 아니 납득이 가지 않은 핑계 때문이리라. 최근 논란이 된 영화 <님의 침묵> 제작진이 배우에게 오디션 비용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그렇기에 한마디로 경악스러웠다.

만원짜리 배우 오디션, 그 어이 없음에 대하여
 
 논란이 된 민지혁의 페이스북 일부. 제작사가 오디션을 받은 배우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논란이 된 민지혁의 페이스북 일부. 제작사가 오디션을 받은 배우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 1일, 배우 민지혁이 '만원', 아니 '오천원'이란 오디션 비용을 고발한 페이스북 글을 실시간으로 봤다. 즉각, 어디 그런 오디션이 있을까, 또 저예산 영화를 빙자한 일종의 사기는 아닐까 의심까지 들었다. 제발 아직 신인인 젊은 배우들이 그런 감독, 프로듀서와는 일하지 않기를 빌었다.

다음 날, 어김없이 논란이 불거졌다. 기름을 부은 것은 150억 대 예산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해당 영화의 감독이 복수의 매체와 한 인터뷰였다. 그는 한 매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는 배우에게 받는 오디션 비용을 마치 관행인 듯 규정하고 있었다. 지난 3일 <스포츠조선>과 해당 감독이 한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오디션에 응모한 배우는 총 5000명이었고, 제작사는 이중 117명의 배우와 이틀 간 오디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해당 감독은 이 인터뷰에서 "간식 거리 준비와 (오디션 장소) 청소비 등을 위해 5000원 씩 오디션비를 받은 것"이라며 "소액의 오디션 진행비를 걷는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앞서 많은 제작자 역시 소액의 진행비를 받았으며 유명한 배우가 주연을 맡은 모 영화 역시 오디션에서 진행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 감독은 (동생 배우가 당한 사례를 소셜 미디어에 폭로한) 민지혁이 제작사가 오디션 참가들에게 걷은 오디션 비용을 사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왜곡해서 주장했다는 억울함까지 토로하고 있었다. "할리우드 등 외국 같은 경우 오디션에 소액의 진행비를 받는 건 일반적인 일"이란 부연이 곁들여졌다.

반론이 빗발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소셜 미디어상에선 오디션 비용이란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피해자가 나온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영화 관계자들의 글이 넘쳐났다. 더욱이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 제작사로부터 오디션 비용을 받았다는 배우들의 과거 소셜 미디어 글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당 감독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해당 감독은 인터뷰 말미,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민지혁 배우와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민지혁의 SNS 글을 가장 먼저 보도한 매체의 편집국장과 보도 기자 세 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명예훼손 고발 운운한 그 감독의 소신
 
 영화

영화 ⓒ 픽사베이


"어이가 없다 없다 화가 나네요..."

연극계 출신이자 최근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 배우는 논란을 접한 뒤 위와 같은 분노를 표출했다. 경력 수십 년 차의 배우라서 더더욱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한데,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미심쩍었는지, 아예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어디 오디션이 만만한 일이겠는가. 영화, 드라마에 여타 영상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경쟁은 치열해졌다. 더군다나 배우 풀이 늘어나면서, 이른바 제작사 사무실 앞에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놓고 가는 열의 넘치는, 작품을 하고자 하는 신인, 배우들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그러한 신인급 배우들의 '프로필 돌리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감독, 제작자도 부지기수다. 또 오디션은 물론 지인들의 소개로라도 '좋은 배우'를 만나고자 하는 감독, 제작자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코자하는 작품의 배우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바에야 애정을 기울이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비용을 거둘 영화인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예산이 넉넉하다면 당연히 집행되거나 책정돼야 할 제작비는, 진행비는 뒀다 어디다 쓰느냔 말이다.

또 그런 취급을 받아야 했을, 그럼에도 꿈을 위해, 미래를 위해 만 원을, 오천 원을 내면서까지 오디션을 봤을 배우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앞으로도 이런 피해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재발 방지가 필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배우 민지혁 역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후배들의 피해를 막고, 제작사 사칭이 맞다면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설명한 것 역시 같은 의도였을 것이다.  

이렇게 그 오디션 비용이 그 감독의, 그 제작자의 '소신'이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그런 소신을 추구하려는 감독들이, 제작자가, 프로듀서가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는커녕 이번 논란으로 자연스레 불신을 받고 도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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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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