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프>의 한 장면ⓒ JTBC


이수연 작가가 달라졌다. 그 변화는 미묘하지만, 그런만큼 오히려 확연하다. 그런데 그 변화는 긍정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tvN <비밀의 숲> 이후 1년 만에 내놓은 JTBC <라이프>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고 있다. '역시 이수연!'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는 한편,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한다', '드라마가 늘어진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완성도 높은 수작이라 호평 받았던 <비밀의 숲>

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비밀의 숲>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는 <비밀의 숲>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매우 도발적인 말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사람들이 tvN <비밀의 숲>에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소위 '드라마 왕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이수연 작가의 극본이 특별했던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밀도와 섬세함의 차이다. 검찰을 다룬 드라마는 숱하게 많았다. 그런데 <비밀의 숲>은 검찰 조직을 해부하듯 세밀했고, 인물들도 살아 숨쉬는 것처럼 촘촘하게 연결해 놓았다.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사건들, 꼬리를 무는 인과관계와 기존 관념을 뛰어넘는 반전은 이전의 검찰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과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이수연은 사회의 한 단면을 통해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한다는 목적의식이 또렷했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지지의 두 번째 이유는 주인공들을 '동료 관계'로 설정한 뚝심을 끝까지 밀고 갔다는 점이다 돌고돌아 결국 '기승전멜로'로 전개되는 기존의 드라마들과 차별화된 부분이었다. 지금에야 무리한 로맨스를 고집하지 않는 경향이 케이블을 중심으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지만, 당시 <비밀의 숲>의 검사 황시목(조승우)과 한여진(배두나)는 오해 없는 나이스한 관계로 시청자들에게 많은 응원을 받았다. 

집요할 정도로 촘촘히 구성된 사회 고발이 몰고오는 쾌감. 한국 드라마의 공식과도 같았던 멜로의 부재. 이 두 가지 특징이 합쳐져 이수연의 드라마는 특별해졌다. 그의 드라마에는 목표를 향해 뻗어가는 강력한 추진력이 있고, 목적한 것을 쟁취하는 강인한 근성이 있다.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이수연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라이프>에서 이수연 작가가 보여준 변화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프>의 한 장면ⓒ JTBC


그런데 달라졌다. 병원 내의 구조적 문제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드라마의 구조에는 큰 변동이 없다. 말 그대로 '의학'을 다뤘던 기존의 의학 드라마와 달리 병원 내의 '정치'를 다루는 관점의 차이도 이수연답다.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의 신념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그려내고 있다. 문제는 '멜로'다. 

이수연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람의 감정만으로 끌고 가는 멜로나 가족극은 제가 취약한 부분"이라며 드라마 작가로서 자신의 약점을 고백한 적이 있다. <비밀의 숲>에서 멜로가 완전 배제된 건 그런 이유가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약점을 보완하기보다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전략 말이다. 하지만 <라이프>에서는 <비밀의 숲>과 달리 멜로 라인이 여럿 감지된다.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는 '새글21'의 기자 최서현(최유화)과 핑크빛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고, 그의 동생 예선우(이규형)는 형의 친구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이노을(원진아)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왔다. 여기까진 명확한 라인이다. <라이프>에는 이밖에 상당히 애매한 관계가 등장한다. 바로 상국대학병원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이노을이다. 

대명그룹 조 회장(정문성)의 명을 받고 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투입된 구승효는 냉철한 인물이다. 황시목과 달리 감정이 존재하지만, 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런 구승효가 자신의 인간미를 드러내는 대상이 바로 이노을이다. 따라서 이노을은 드라마 진행에 있어 꼭 필요한 캐릭터였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구승효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조승우-원진아의 관계, 어딘가 아쉬운 이유는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프>의 한 장면ⓒ JTBC


"얼마나 싫었을까? 내가 계속 말 시켜서. 자르려고 벼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게, 내가 왜 아무나 따라갔을까요? 어떤 사람인지 다 들었으면서. 왜 믿었을까." 


다만, 구승효와 이노을, 두 인물이 얽히는 설정에 의문이 가는 게 사실이다. 이노을이 구승효를 데리고 병원 구석구석을 보여준다거나 사장실을 다짜고짜 찾아가는 건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또, 면직처리를 당한 후 그의 반응은 '속상함'이다. 지극히 감정적인 반응에 치우쳐 있다. 당연히 연기도 남자친구에게 단단히 삐친 모습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 설정에 문제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를 러브라인이라 단정짓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구승효가 이노을에게 보이는 감정은 분명 호감이지만, 이노을의 그것은 아리송하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원진아의 연기 탓인지 알 수 없다. <비밀의 숲>에서 황시목-한여진의 파트너 관계를 이상적이라 여겼던 시청자들로서는 당황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오해의 여지를 없애버린 배두나의 연기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프>의 한 장면ⓒ JTBC


예진우와 최서현의 관계도 애매하다. 두 사람은 일정한 호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직업적으로 얽혀있기도 하다. 의사와 기자인 그들은 필요에 따라 서로를 '이용(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하기도 해야 하는 사이다. 그럼에도 예진우와 최서현은 서로에 대한 감정 때문에 자신의 일에 혼란을 겪는다. 상대방이 곤란할까봐 기자로서 해야 할 질문을 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곤란에 처하는 게 안타까워 유족에게 부검을 설득하는 식이다. 

<라이프>에서 그려지는 멜로는 뭔가 어설프다. 적당히 이성적이고, 적당히 감정적이다. 이도저도 아니다. 물론 멜로 라인의 중심에 선 연기자들의 연기가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캐릭터 설정에 비해 너무 어린 원진아의 캐스팅이 무리였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건, 굳이 '멜로 라인'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워낙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반전시킬 캐릭터와 관계가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공적인 일과 사적인 관계를 구분하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걸 강조하려던 것이었을까. 설득력이 떨어질 뿐더러 매력적이지도 않은 멜로 라인. 멜로에 자신이 없다면 이수연의 성장통일까. 새로운 방식의 멜로 활용 방식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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