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포스터

영화 <공작>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착잡하고 복잡하다. 차라리 영화가 완전한 허구였다면 이토록 씁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천절한 안내로 시작된다. 사전에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관련 사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막히고 참담하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서서 <공작>에 담긴 진실이 무엇인지 가늠해본다.

조직의 폭력, '공작'
 
 영화 <공작> 한 장면

영화 <공작>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암약하는 공작원이다. 비록 살인면허를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007 제임스 본드처럼 전직 장교 출신이다. 깔끔한 턱시도 차림으로 연회장을 종횡무진하는 제임스 본드와 달리, 그는 지저분한 중국의 시장 골목을 배회한다. 그에게는 어떠한 첨단 무기도 제공되지 않는다. 양말에 숨기기 좋은 소형 카세트 녹음기와 주머니에 넣기 좋은 소형 드라이버 등 매우 아날로그적인 기계와 도구만으로도 훌륭히 임무를 완수해낸다. 환심을 사야 할 상대에게 가짜 명품 시계를 선물해야 하는 등 열악한(?) 근무 조건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이 가득하다. 고도의 심리전 끝에 그는 공작의 목적에 근접해 공작 대상국의 정치 수장까지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박석영(황정민 분)이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 역시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궁핍하고 가난한 조국의 외화벌이책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조국을 위한 돈이기에 돈을 가진 박석영의 접근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가진 사명감과는 별개로 자신이 권력이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권력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면 가차없이 버려질 것임을 안다. 그의 쓸모는 돈을 버는 것에 있으며 초집중된 권력은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단돈 10달러에 팔리는 동포들의 비참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는 눈을 뜬 듯 감고 있으며, 짐짓 감은 듯 뜨고 있다. 그의 이름은 리명운(이성민 분)이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영화 <공작>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박석영은 정체를 숨긴 채 리명운에게 접근하고, 리명운은 박석영을 자신의 정치 수장에게 소개한다. 박석영이 리명운의 장군 앞으로 인도된 순간, 이들은 마치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와 같아진다. 박석영의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리명운도 무사할 수 없다. 리명운이 박석영에게 가족을 소개할 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리석은 행동은 그들뿐 아니라 가장 소중한 가족까지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정전된 어둠 속에서 치열하게 마주한 리명운과 박석영은 어둠에 묻히듯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될 사람들이다. 박석영의 정체는 드러난 순간, 두 사람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 있다.

자신의 목숨줄이 리명운과 같이 매달려 있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박석영은 리명운을 새롭게 인식한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리명운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한 박석영은 리명운을 공작 대상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내와 아들을 둔 가장인 리명훈 역시 박석영처럼 매순간 긴장하며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쓰며 전진하던 박석영은 리명운 역시 맞은 편에서 위태롭게 외줄을 타고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박석영은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통상의 정보 획득 수단인 '공작'이나 '첩보' 활동은 기실 매우 비인도적이며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그 행위들은 국익이나 공익의 미명 아래 존엄과 자유를 가진 개인을 조직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에 '신뢰'라는 인간 관계의 중요한 축은 기능할 수가 없다. 허나, 조작과 속임수를 통해 원하던 정보에 근접하려던 박석영에게 리명운은 이 축을 작동시킨다.

리명운은 가족을 보이고, 집으로 초대하는 등 공작원 흑금성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박석영을 호출한다. '호연지기'가 아로새긴 넥타이핀을 선물하며 수줍어 하는 리명운의 모습에 박석영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공작되지 않은 리명운의 순수한 호감은 확장되기 어려운 것이기에 안타깝다. 목숨이 위협받은 긴장된 상황 속에서 조심스럽게 맺어지는 이들의 관계는 국가 혹은 조직이 개인에게 자행하는 폭력의 일면을 드러낸다. 불신을 기초로 하여 인성을 마비시키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더이상 자행되어서는 안된다. 애국심이나 사명감, 과도한 책임감으로 개인을 옭아매어 조직의 부품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치기 어린 '권력'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영화 <공작>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박석영은 상부 기관이 조국이 아닌 여당과 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해 움직이자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명령에 따르라는 상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박석영은 분노를 느낀다. 박석영은 자신을 수단화하며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의 민낯을 목격한다. 권력은 박석영이 헌신해 마지 않는 조국을 위해서 행사되기 보다는 권력 자신을 위해 행사되었다.

이제 박석영과 리명운, 일개 수단이었던 두 사람은 권력이 아닌, 그들의 사명감이 바랬을 목적을 위해 의기투합한다. 서로를 수단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가능해진 일일 터이다. 권력의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역으로, 권력의 최정점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공작'을 꾸민다. 두 권력의 이해 관계를 충돌시켜, 한 권력이 다른 권력의 이해 보전에 기여하는 것을 차단한다.

권력은 쥔 자의 속성을 복사하여 부려진다. 박석영과 리명운을 부리던 <공작>에 나오는 권력자들은 몸집만 커다란 매우 이기적인 어린 아이와 같다. 짐짓, 엄중한 듯 무게를 잡지만 포용력 있는 어른스런 모습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득권을 빼앗길까 쉼없이 모사를 하고, 나쁜 짓을 들킬까 두려워 거짓말을 일삼고, 혹여 책임을 지게 될까 전전긍긍한다. 행여 있는 곳을 들킬까 눈을 가리고, 전염병에 옮을까 피를 뽑아내고, 최면 상태로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어른처럼 큰 몸집을 하고 수하를 부리나, 어린 아이처럼 자기밖에 모른다. 떳떳하지 못한 권력은 결코 '호연지기' 하지 않았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영화 <공작>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두 사람의 합동 작전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낸다. '조직의 공작'을 '개인의 공작'으로 무마시킨다. 권력이 잠입시킨 트로이의 목마는 되려 권력에 타격을 준다. 명분없이 오로지 자기 보전을 위해 사용된 권력은 제어 당한다.

그러나, 누구도 박석영에게 조직을 배반했다, 조국을 버렸다 비난할 수는 없다. 그는 주입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이 아니다. 언제든 목적을 가질 수 있으며 목적을 향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당하지 않은 권력 행사에 반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결국, 영화 <공작>에서 철옹성 같은 권력에 제동을 거는 것은 '개인'이다. 권력과 조직의 목적에 함몰되지 않은 '위험을 무릅쓰는 개인'의 존재는 권력의 폭주를 막는 미약하나, 결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대체될 뿐이다. 그것을 쥔 자의 인성에만 의지하기에는 권력에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더이상, 잇속을 따지는 권력의 공작질에 개인이 희생 당하는 일들이 사라지기를 영화 <공작>을 보며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양선영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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