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아마도 고등학생이던 때였을 것이다. 그 시기에 작가 듀나의 칼럼 '목숨값: 버지니아 공대 사건을 바라보며…'를 읽었다. 이 칼럼은 제목 그대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루었다. 비슷한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을진데 당시 언론의 반응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가 바로 한국계 이민자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뉴스 속보와 가해자에 대한 분석, 사건의 여파 추적까지 해외에서 벌어진 다른 대량 살상 사건과 비교했을 때 보도의 질과 양은 정말로 달랐다. 당시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지금은 이를 무척이나 후회한다). 8살에 이민을 간 가해자와 우리의 공통점이라면 그저 한국땅에서 태어난 것뿐이다. 그게 그 사건을 보다 특별하게 여길 이유일까? 가해자가 다른 나라 출신의 이민자였어도 이 정도까지 관심을 기울였을까?

당시 나는 언론이 생명의 가치를 전혀 동등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일 것을 알기에 계속 이야기 한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사건에서 관심을 거두고 제대로 추모조차 하지 않으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꼈다. 모든 죽음에 공평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듀나의 칼럼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듀나는 애초에 목숨값이란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가령 기대수명과 인구의 생존율이 터무니 없이 낮았던 시대에는 목숨의 가치도 낮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쉽게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시대에도 공간에 따라서 상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 부당한 정부 때문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굶어 죽었다. 하지만 버지니아 공대 학살 사건과 달리 우리는 그런 죽음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왜일까? 듀나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인간의 목숨값이 싸기 때문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별다른 영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숨값'을 재는 일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 오드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듀나의 말투가 지나치게 냉정해 보여서도 아니었고 글의 내용이 위악적이어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그것이 처참한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짐짓 방관자 노릇을 하며 윤리적인 척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내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죽음이었다면 똑같이 반응할 수 있었을까? 그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내가 사는 도시에서 일어났다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일어났다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시시각각 죽어나갔지만 나는 어떤 죽음은 알지도 혹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자만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목숨값'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듀나의 글은 담담한 어체로 쓰여졌지만, 나는 누군가 나의 귀에 대고 큰 소리를 지른 느낌이었다.

이 일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영화 <언노운 걸>을 본 이후였다. 작품의 내용은 요약이 필요 없을 정도로 복잡하지 않다. 영화의 주인공인 의사 '제니'는 인턴인 줄리앙과 신경전을 벌이던 날, 밤 늦게 진료소에 울린 벨을 무시한다. 제니는 이후에 벨을 누른 소녀가 근처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 소녀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다 진료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지, 살해당한 건지 아니면 사고로 죽은 것인지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영화의 제목처럼 소녀의 신원조차 알 길이 없다. 만약 자신이 문을 열어주었다면 그녀가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속에서, 제니는 소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수소문에 나선다.

나는 했지만 제니는 하지 않은 일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 오드


사실 처음 영화를 볼 때 나는 제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죽은 소녀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수는 있다. 자신의 실수로 아까운 생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자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니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녀는 소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가기로 예정된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비교적 초라하고 돈도 못 버는 지역진료소에 남는다. 그리고 이 선택을 한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환자로부터 폭행을 당할 위험을 겪는다. 또한 지역의 폭력배들은 제니를 찾아 협박하며 소녀의 신원을 밝히는 일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그런데도 소녀의 죽음에 관한 단서를 지닌 인물이 자신을 지나치자 곧바로 그녀는 그들을 쫓는다. 한 마디로 자신의 방관으로 누군가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진 이후 제니는 꿈꿔온 삶의 경로를 바꾸고 성공의 가능성을 버리며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대체 왜? 무슨 동기로? 무슨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 오드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를 이해할 단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 내내 제니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소녀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며 의사가 되기를 포기한 인턴 줄리앙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전부다. 제니가 어떤 배경을 가졌고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언노운 걸>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장면도 전무하며 살고있는 집이 나오는 순간은 몇 초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제니에게 거리에서 비명횡사한 가족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상처와 한이 되어 소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도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본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제니의 행동이 과연 거창한 계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누군가 열렬히 쫓아온 꿈을 포기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하는 것은 주변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만약 제니가 소녀의 신원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름조차 없는 묘지에 가족도 모른 채 묻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이민자이건 부랑자건 우리와 일면식이 있건 없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물론 줄리앙이 의사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죽은 소녀가 홀로 쓸쓸히 땅 속에서 식어간다고 해도 제니의 인생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을 것이다. 촉망 받는 자리에서 그녀는 승승장구하며 성공가도를 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제니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녀는 책임의 경중을 따지지도 '목숨값'을 재지도 않았다. 조건 없이 모든 생명에 공평한 태도를 취했다.

내가 제니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녀가 하지 않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목숨값'을 따지는 일. 그래서 제니의 선택이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죽은 소녀 때문에 그녀가 자기의 인생까지 걸겠냐고 생각했다. 그것이 누구든 한 생명이 희생된 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지 못했다.

죽은 자들이 거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회

<언노운 걸>에서 제니가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하다. 소녀의 신원을 알고 가족들에게 연락해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것.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게 목표가 아니다. 누굴 괴롭히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제니의 질문은 단 하나다. 그 소녀의 이름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지만 추적의 과정에서 제니는 외면과 반발, 위협에 직면한다. 누군가는 귀찮은 일에 휩싸이기 싫어서, 누군가는 자신의 부정이 드러나길 두려워해서 혹은 경찰들이 동네를 들쑤시는게 마뜩치 않아서 제니에게 반발한다.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 오드


나는 생각했다. 이들이 제니처럼 '목숨값'을 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소녀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겼다면, 망자가 묘비에 이름을 적고 가족들의 애도를 받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면. 슬픈 것은 그 인물들의 행동이 내게 전혀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영화의 절정에서 사실상 소녀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결국 제니를 찾아오고 사건의 전말을 고백한다. 그 남자에게 제니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진실을 대신 말을 할 수 없으니 당신이 직접 경찰에게 이야기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느냐는 반문에 그녀는 답한다. 죽은 소녀가 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반박이 다시 돌아온다. 그러자 제니는 다시 대답한다.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롭겠죠."

그녀의 말처럼 한 사람의 죽음이 곧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은 자들은 우리에게 늘 말을 건다. 단지 처한 조건과 능력에 따라 이를 들을 수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연못 위에 돌이 떨어지면 물결이 퍼져나가다 가장자리에 이를 수록 점점 옅어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위치에 따라 상이하다.

제니를 찾아온 남자는 소녀를 죽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외면하려고 해도 죽은 자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반면 제니는 영화 속에서 소녀의 죽음을 외면한 캐릭터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온전히 존중할 줄 알았다. 그 누구도 신원불명 상태에서 애도의 과정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망자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었다. 나는 궁금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사족 같은 이야기.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다른 영화와는 달리 감정적 울림이 많지는 않다. 이는 제니가 사건의 '외부인' 위치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독들이 부러 그녀의 행동을 공들여 부각하거나 숭고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노운 걸>은 제니의 모든 여정을 일상을 비추는 것과 한치도 다를 바 없이 화면 위로 담는다. 나는 영화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망자가 자신의 생명을 존중받는 일에는 어떠한 연민도 특별히 더 뛰어난 감수성도 필요 없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윤리이고 모든 이의 책임이어야 한다. 나는 다르덴 형제의 시선이 보편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나부터 변화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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