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살아남은 아이> 메인포스터

영화 <살아남은 아이> 메인포스터ⓒ 엣나인필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남은 사람들에게는 사랑했던 이를 떠내보내는 그 시간 자체가 고통이 된다. 그의 죽음이 제 아무리 의로운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의인이라며 한동안 유난일 세간의 칭송과는 달리 가족들에게는 소중한 이를 잃었다는 상처일 뿐이다. 누군가의 빈자리는 현재적 온기만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온기의 곁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온기의 미래성까지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온기는 모두 식어버린, 얕은 체취만 남은 유품들이 현재 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그의 죽음이 처음 알고 있었던 대로 의로운 것도 아니었다면 어떨까? 남겨진 이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세상을 떠난 자는 아무런 말이 없고,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남겨진 이들의 의지뿐이다. 신동석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물에 빠진 친구 기현(성유빈 역)을 구하고 대신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은찬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찬의 부모와 그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방황하며 흔들리던 기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02.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와 죽은 아들이 살려낸 친구의 관계라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세 인물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관계의 변화를 잘 그려낸다. 영화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히는 것과 피해자 가족과 가까워진 인물인 기현이 가해자 무리에서는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다는 두 가지 설정을 적절히 섞어 딜레마를 이끌어낸다. 여기에서 핵심은 기현이라는 인물의 위치인데 그는 한 쪽에서는 가해자로서, 또 한 쪽에서는 피해자로서 여겨진다. 특정 무리와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일에도 어깨에 힘을 주고 나설 수밖에 없는,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내어줘야 하는 인물로 말이다.

이 표현의 극대화를 위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은찬의 부모인 성철(최무성 역)과 미숙(김여진 역)이 기현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전반부와 은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있던 기현이 고해를 하면서 시작되는 관계의 파국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작되는 후반부로 말이다.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에 걸쳐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은찬이 유일하다. 성철과 미숙은 타인에 의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선행적인 행위를 취할 수 없는 피동적인 입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기현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전반부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가 작품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다른 부분이 여기에 있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엣나인필름


03.
이 작품은 중심이 되는 세 사람 성철, 미숙, 그리고 기현의 심리를 세심하게 잘 표현했는데, 그 중에서도 성철과 미숙의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의 연출은 이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섬세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은찬을 기준으로 부모인 성철과 미숙은 동일한 쪽에 서게 되는데,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 역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 그 차이를 감독은 놓치지 않는다. 준영(박찬 역)을 만나고 돌아온 날 밤에 아들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두고 성철과 미숙이 말다툼을 벌이는 일이 대표적이다.

미숙이 아이를 갖자며 성철을 설득했던 일과 성철이 미숙 몰래 기현을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치고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은 방식의 차이일 뿐, 결국에는 모두 나름대로 자식의 상실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부모의 몸부림과도 같다. 아들 은찬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눈 앞에 둘 수 없는 미숙의 입장에서는 그 대신 은찬이 생전에 원했던, 동생을 갖게 해달라던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 반면 성철의 경우 이와 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면서까지 구하고자 했던 이, 기현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그 아픔을 씻어내고자 한다.

04.
앞서 설명한 부분이 미숙과 성철, 두 사람의 미세한 입장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면, 살아남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기현의 쪽에서는 그가 처해있는 상황 자체가 문제가 된다. 처음부터 그가 알려진 것처럼 은찬과 친한 친구가 아니라는 것과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은찬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는 관객들이 믿고 있던 사실과 은찬의 부모가 믿고 있던 이야기를 전복시킬 숨겨진 사실에 불과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그의 처지를 도와줄 부모도 없고, 자신을 스스로 지킬 만큼의 경제적 여유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가 성철을 만나기 전까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유추하게 해주고, 사고가 있던 날과 그 이후의 시간들 속에서 왜 진실을 감출 수밖에 없었는지를 암시하는 증거가 된다.

그가 은찬의 부모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진실을 고백하기로 결심한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의 삶에 성철과 미숙이 내어준 마음의 자리는 더없이 과분하다. 그가 그동안 가질 수 없었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살아남은 아이>라는 타이틀은 우리가 지금껏 생각했던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상에 살아남게 된 아이'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말라 죽어가던 기현이 두 사람의 사랑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고백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사랑에 그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심을 표하는 일뿐이었으며, 그가 가진 것 역시 진심뿐이었다는 것. 그리고 기현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고 만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엣나인필름


05.
이 작품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기현에 의해 진실이 드러난 뒤에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는 희생자의 부모뿐이라는 것이다. 진실이 드러난 뒤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드러난 뒤에 '본격적으로' 그려진다고 이야기 한 것은 이미 그 전부터 위로나 격려를 가장한 폭력이 은찬의 가정에 가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자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지정식까지 마련하는 공무원은 물론, 장학재단 설립을 빌미로 성철을 치켜세우는 학교, 아들의 목숨 값으로 받은 보상금에나 관심이 있는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가 그런 모습이다. 이 영화 속에서 애도의 순수함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며,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어느 정도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기현의 고백 이후의 상황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가해자로 여겨지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물론, 유일한 증언자가 되어줄 수 있는 준영과 준영의 가족조차도 그들에게 가해질 이후의 문제들을 회피하기 위해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은찬은 준영에게 가해졌던 불합리한 행위에 맞서다 가해를 당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한가지 더 눈여겨볼 부분은 성철과 미숙의 태도다. 처음에 아들의 죽음에 다른 모습을 보였던 두 사람이 더 이상 비극적일 수 없는 상황 앞에서는 동일한 태도를 보인다. 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아들의 억울함 앞에서는 결코 다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들 모습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06.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현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폭력적인 상황들은 그가 가해자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점이 있지만, 그에게만 가해진다는 점에서는 부당한 부분도 없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은찬의 부모가 결코 알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해 진실을 밝힌 유일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모습들은 성철 자신의 무지와 사실을 알고 나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 진실도 모른 채 자신들의 슬픔만을 채워보려고 했던 지난 시간들을 사죄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엣나인필름


07.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이제야 정식 개봉을 하게 되기는 했지만, 이미 지난 2017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 입소문이 퍼지며 개봉만 기다리게 했던 작품이다. 지난해 부산에서는 국제평론가협회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1년 동안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장편상은 물론,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까지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작품에 경력이란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작품을 만나게 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첨예한 사건을 중심에 두고도 그것을 파헤치려는 쪽이 아닌, 그 사건과 관련된 이들의 심리와 감정을 표현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았던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며, 그 노력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고 작품의 깊이로 치환되며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를 볼 때 어떤 지점에 매력을 느끼는지, 어떤 부분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는지는 관객들마다 모두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다양성 영화 수준의 볼륨에도 불구하고 이런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감정적인 부분을 표현해내는 깊이와 세심한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섬세함의 측면에 있어서는 '올해의 발견이 아닌 올해의 영화'라는 선재물의 홍보 타이틀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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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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