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사랑받은 작품이 귀환을 알릴 때면 오랜 친구를 만날 때처럼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올해 <맨 오브 라만차>가 공연 소식을 알렸을 때는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더랬다. 정확하게는 #MeToo(미투)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차마 알돈자 윤간 장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장면은 과거에도 매 시즌마다 논란이 될 만큼 적나라했으니까. 다행히도 시대 감수성을 어느 정도 반영한 듯 제작사 측은 해당 장면을 전면적으로 축소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인간이 늙듯 이야기가 낡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 있는 것 아니겠나. 해서 원래도 좋은 공연이었던 이 작품이 얼마나 더 좋은 공연으로 거듭났을지 궁금했다. 그래도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아 서울 공연이 끝나고 한참 뒤 지방 공연을 봤지만.

각박한 현실에서 드림(Dream)을 말하는 자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오디뮤지컬컴퍼니


오래도록 사랑받은 공연에는 그 만큼의 이유가 있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이상을 말하는 돈키호테는 우리들 심금을 울렸다. 그것이 비록 풍차를 괴물이라 말하며 그를 무찌르러 가는 어느 한 미치광이 노인의 말이었을지라도. 기사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어 자신을 기사라고 착각하는 괴짜 노인 알론조 키하나는 돈키호테로 변신해 부하 산초와 함께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모험 중 당도한 여관에서 돈키호테는 여관 종업원 알돈자를 만난다. 알돈자는 여관의 허드렛일을 하고 노새끌이들에게 유린 당하는 등 밑바닥 삶을 살지만, 돈키호테는 그녀를 아름다운 여인 둘시네아라고 부른다.

사람들 모두가 돈키호테를 어느 미친 노인이라고 무시하듯 처음에는 알돈자도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나의 길을 가겠다는 돈키호테의 말은 알돈자를 감동시키고, 그녀는 마음을 연다. '임파서블 드림(Impossible Dream)'을 열창하는 홍광호의 돈키호테 앞에 그 누가 설득 당하지 않겠는가! 알돈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돈키호테의 신념을 따라 노새끌이들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선의는 폭력이 되어 돌아왔고, 알돈자는 돈키호테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오디뮤지컬컴퍼니


돈키호테가 현실의 알론조 키하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까라스코는 거울의 기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돈키호테는 거울에 비친 노인 알론조 키하나가 자신임을 깨닫고 쓰러진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작성하고 있던 알론조 키하나. 알돈자는 그를 찾아오지만, 돈키호테가 아닌 알론조 키하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허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돈키호테의 노랫말을 더듬거리며 따라 부른다. 마침내 기억이 꿈이 아니라 실재였음을 깨달은 알론조 키하나는 그녀의 노랫말을 이어 받는다. 돈키호테로서. 그러나 백발 노인이던 돈키호테는 끝내 '맨 오브 라만차'를 완창하지 못하고 목숨을 거둔다. 그리고 알돈자는 마침내 스스로를 둘시네아라고 선언하며 극(중극)은 종결을 맺는다.

알돈자의 임파서블 드림(Impossible Dream)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오디뮤지컬컴퍼니


기실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 이야기는 세르반테스의 극중극 형식을 통해 전해진다.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세르반테스는 함께 수감된 죄수들로부터 또 다른 벌을 받을 위기에 처한다. 이에 세르반테스는 재판을 요청한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연극의 형태로. 곧 이어 세르반테스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로, 그의 부하는 돈키호테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산초로 변신하며, 연극을 지켜만 보던 죄수들도 각자 어울리는 배역을 맡게 된다. 그 중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죄수 여인에게는 알돈자라는, 세르반테스의 말을 빌려 아주 특별한 역할이 주어진다.

그렇담 알돈자의 성장담은 세르반테스의 상상력을 통해 서사화됐을 테다. 그러나 이 성장담의 면면은 수용하기 힘든 수준의 '구닥다리'다. 돈키호테는 끝끝내 알돈자를 알돈자로서 인정해주지 않고 둘시네아로만 본다던가, 노기사의 이상적인 말에 꾀어 기사극에 참여하게 된 알돈자가 원수나 다름 없던 노새끌이들에게 선의를 베풀다가 윤간을 당한다거나, 돈키호테 죽음 앞에 마지막 순간에는 그가 일러준 가치대로 자신을 둘시네아라고 선언한다거나. 게다가 유린 당한 알돈자가 돈키호테를 찾아가 분노감을 표출한 뒤 스스로를 둘시네아라고 부르기까지 그녀의 감정 변화는 딱히 서술되는 장면이 없어 두 지점 간 간극은 한 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오디뮤지컬컴퍼니


'성적 폭력'이라는 갈등은 이번 시즌에서 역시나 심화된다. 10년이 넘도록 고수했던 장면을 대폭 축소한 점은 자부할 일이 될 수도 있겠다만, 노새끌이들이 알돈자를 때리고, 손을 결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강제로 치마를 내리는 액션은 참담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제 자리에 머물고 만 셈이다. 많은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아동이라면 그가 겪는 갈등으로 아동 학대를, 여성이라면 성적 폭력을 등장시키곤 한다. 그래도 <맨 오브 라만차>가 허황된 꿈도 꿈이라며,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며, 꿈을 꾸라는 극이라면 이 작품만이라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어찌 됐든 극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그렇담 알돈자를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것이, 그녀가 자신을 둘시네아라고 선언하는 결말이 과연 그녀도 행복하게 했을까. 안타깝게도 설령 노새끌이들을 피해 알돈자가 여관에서 도망쳤다고 한들 그녀는 어딘가에서 또다시 부엌데기 삶을 면치 못했을 테다. 그녀는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없는 하층민 여성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돈키호테의 이상주의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허울좋은 사탕발림이었을 뿐이다. 까라스코가 돈키호테에게 현실을 강요하는 폭력을 저질렀던 것처럼, 돈키호테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마침내 스스로를 둘시네아라고 부른 알돈자의 삶은 바뀌었는가? 아니,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테다. '해피 엔딩'은 알돈자에게는 '임파서블 드림'이었다.

2018년, 세르반테스에게 유죄를 선언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오디뮤지컬컴퍼니


그렇다면 알돈자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가? 바로 극 중 극의 작가이자 주인공 돈키호테를 연기하는 세르반테스다. 그래서인지 극의 꿈과 이상이라는 주제는 돈키호테 시점을 따라가야만 납득할 수 있다. 돈키호테의 꿈과 이상을 이루기 위해 알돈자는 비극의 여인으로, 산초는 맹목적인 부하로 소비될 뿐이다. 알돈자의 경우 더 참담한 건, 그녀가 겪는 성적 폭력이 돈키호테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결말의 감동을 배로 만들기 위해 도구화 되었다는 점이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극단적인 설정은 영웅을 다시 보게끔 한다. 분명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는 과거에 절절한 감동을 전했을 테다. 하지만 노새끌이들에게 알돈자를 친히 인도하는, '화냥년'이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는 2018년 관객들이 수용하기에 낡아도 너무 낡아있다.

그래도 지하 감옥 죄수들은 세르반테스의 연극에 감동을 느꼈을 테다. 알돈자를 연기한 여죄수를 시작으로 죄수들은 종교 재판의 부름을 받고 지하 감옥을 떠나는 세르반테스를 향해 '임파서블 드림'을 부른다. 그러나 이미 극(중극)은 너무도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시점에 치우쳐 진행된 터. 이 때문에 죄수들 심리의 진전은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모양새를 띤다. 더욱이 알돈자를 연기한 여죄수는 연극에 관심 없지 않았던가. 이에 그녀가 (연극에 동화됨을 설명하는 지점 없이) '임파서블 드림'을 선창하는 모습에서 문제점은 더욱 심화된다. 라만차의 재판에서 17세기 죄수들은 '무죄'를 선언했겠지만, 현대 관객들은 '유죄'를 외칠 따름이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 오디뮤지컬컴퍼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대 인식은 변화한다. 옛날 옛적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웃고 말았던 예능 프로그램 속 유머코드도, 설렘을 자아냈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박력 넘치는 모습도, 당연한 거라 생각했던 영화 속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장면도 현재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미디어를 기반으로 삼는 제작자들은 시대 인식을 담지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야기로 수 차례 공연을 거듭하는 뮤지컬은 예외일까? (창작자들에게는) 수고롭게도 무대는 현재 시점에서 꾸려지고 관객들 인식은 변화했다. 무대 역시나 진화를 거듭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머물지 말기를. 자, 이제 우리 2018년의 무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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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대단한 가치를 이야기하더라도 '재미'가 없는 극은 그 가치를 다 하기 힘듭니다. 그것을 소비해줄 관객이 없으니까요. 재미있게 쓰여진, 그러나 그 끝에는 오래도록 되새겨질 여운을 남기는 극을 찾기 위해 오늘도 객석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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