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여성차별이 존재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사례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면, 그 사람들은 되묻는다. "그건 그냥 개인의 잘못 아니야?" 그렇다. 일상들 속의 수많은 사건이 개별로 흩어져 있게 되면 그 사회구조의 작용 방식은 개인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회 속, 영화의 시나리오 속에서 표상되는 약자, 피해자, 범죄의 대상은 대부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여성이다. 클리셰가 아니라 여성이 약자인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은 때때로 상상을 통해 이 구조를 도치시키며 이 상황을 낯설지 않으냐고 반문하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앞서서 언급한 인권 감수성은 고이 안방에 모셔둔 분들은 "그건 단순히 캐릭터일 뿐이고, 극 중 세계일 뿐이지 않아?"라는 말을 남길 뿐이다.

여기서 여성인권영화제의 탁월한 기획 능력이 보인다. 그 일상적인 순간들이 반복되는 순간 우리는 어떠한 도치라는 도구 없이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인권영화제에서 내가 만난 영화는 낯선 구조를 차용하지 않고 그냥 각각의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경험들을 나열할 뿐이다. 이를 통해 여성인권영화제에서는 여성도, 남성도 모두 적나라하게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예술은 시대상을 담고 있고, 그렇기에 모든 작품은 당시의 곪은 부분을 그대로 담게 된다. 그 흩어졌던 연결고리들을 모은 것이 여성인권영화제였고, 그 경험들을 한데 모으는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다.

GV : "숨바꼭질", "지구별", "가을단기방학", "못, 함께하는"

 영화 <가을단기방학> 스틸 사진

영화 <가을단기방학> 스틸 사진ⓒ 정가영 감독


작년에 상영작 한 회만 보고 나오려던 나를 눌러앉게 한 단편들이다. 이 세션에서 틀린 4편의 영화("숨바꼭질", "지구별", "가을단기방학", "못, 함께하는")는 이혼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여성의 삶이 단일화될 순 없듯, 각각의 단편이 풀어내는 스토리와 감정의 결, 영화가 뿜어내는 에너지들은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고통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듯, 4편을 서사가 끝나면 우리는 이들의 공통된 상처와 감정선을 어느 순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구별'과 '가을단기방학'에 그려지는 9살-11살 정도 되는 아이들은 상업 영화에서 주목받는 아이의 극대화된 감정들과는 달리 덤덤하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나이마다, 그 순간마다 각자의 상처와 고민이 있듯 영화는 아이들의 고민과 상처를 어른의 시선에 맞추지 않는다. 영화 4편을 통해 바라본 이혼가정을 보며 우리는 객체였던 아이들을 주체로서 끌어낼 수 있게 된다.

이혼이라는 개인의 선택 아래 소외된 아이들을 드러나자 이런저런 떠오르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아이들의 고통은 아이들의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부여한 것인가. 아버지의 부성애는 왜 억압되어 있는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가족 구성원과 결혼체제가 오히려 '비정상'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단편 개개로 움직이지만, 단편의 연결들이 함께 호흡하는 순간 나는 세계의 균열을 만났다. 그 균열은 질문과 의혹들을 만든다. 현재에 대한 변화의 시작은 바로 이 균열에서부터 시작된다.

피움톡톡 : 말하기의 힘( Faces of Harassment)-절망과 희망의 공존

브라질 전역을 휩쓸었던 #MyFirstHarassment(#내가 겪은 첫 번째 여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는 여성폭력 문제를 사회 공론장의 수면 위로 떠 오르게 했다. 그 연장선에서 Faces of Harassment(여성폭력에 마주하기; 말하기의 힘) 캠페인을 진행했고 검은 버스 안에서 실제 여성들은 (이 중 일부는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여성폭력 경험을 고백했고 두 번째 내가 본 영화는 140명 중 24명의 인터뷰에서 가해자 그 인터뷰를 모은 작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울며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계속 묻던 사람, 가면을 써야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가까스로 암흑 속에서만 이야기하는 사람. 그들이 앞을 보며 하는 이야기에 어느 순간 꼭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들이 나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다시 절망이 나를 짓눌렀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 끝에 " 단지 그게 끝이에요."라고 붙였다. 가해자들에겐 "단지" 그것조차 안 될 뿐인 사건에 우리는 얼마나 아팠던가. 옷을 그렇게 짧게 입어서 당할 만하고, 가족조차 내가 여지를 줬으니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세상. 성폭행을 당하고도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피해자들. 신고하고자 하나 가해자와 주변의 삶을 걱정하고, 그 사람이 풀려나고 보복을 두려워했기에 넘어갔던 피해자들.

이 세상의 평화가 얼마나 많은 여자의 침묵과 희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걸까. 그렇게 이 세상은 평화를 유지하는 동안 여성의 속은 다 좀먹어 들어갔다.

그렇게 수많은 나이자 그녀들을 마주하다 보니 그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내가 겪었던 일을 다시 그 누구도 안 겪었으면 좋겠어요."

가면을 벗지 못한 그녀들보다 더 많은 수의 가면을 벗은 그녀들이 자신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말이 자신을, 청자 역시 바꾸고 있음을 그래서 그들의 말하기는 하나의 변화가 되고 있었다.

씨네 토크 : 닫힌 문 뒤에는(Behind closed doors)&완전히 안전한(Safe Space)

 영화 <닫힌 문 뒤에는> 스틸 사진.

영화 <닫힌 문 뒤에는> 스틸 사진.ⓒ 안나 홀 감독


여성인권영화제가 얼마나 다양한 주제를 고민했는지 하루 안의 상영시간표에서도 드러났다. 이혼 가정의 자녀와 성폭행 피해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데이트 폭력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영국 템스 벨리 경찰서에서 접수된 실제 데이트 폭력 3개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닫힌 문 뒤에는'은 애인과 사회 사이의 데이트 폭력, 비슷하지만 '완전히 안전한'은 공동체 내의 데이트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극단적인 장면과 믿기지 않는 현실들이 나열됐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뼈에 금이 가고, 두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그 순간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게 만든 정도의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들은 다들 미미한 처벌을 받고 풀려난다. 유화정 젠더 연구자는 이 과장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이 이런 일들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덧붙이셨다. 김재희 법률사무소 대표께서는 이런 영국의 미비한 법률 처벌보다도 못한 우리나라 현실에 부럽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공동체 내에서 데이트 폭력이 일어났을 때 개인적인 문제, 사생활의 문제라며 넘어가 버리는 상황은 우리네 일상 속에서 여성들이 입을 닫게 되는 그 말들과 너무나 유사했다. 일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새삼 다시 나의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너무나 무거웠다. 우리네 삶은 왜 이리도 버거운가.

일상과 투쟁, 그 따뜻한 순간


여성의 문제가 언제 심각하지 않았겠느냐 마는, 내가 본 7개 영화는 심각한 주제들만을 다루었다. 영화 곳곳에서 여성의 삶이 스러지는 걸 가만히 목도하는 자의 죄책감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편치 못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영화가 조명하는 고통을 넘어서서 일생을 통해 이겨내는 여성들의 힘을 알고 있기에 마냥 연약하게 비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스크린이 꺼지고 불이 켜진 뒤 관객들의 분위기에서 해소되었다. 이혼가정, 성폭행, 데이트 폭력. GV, 피움 톡톡에서도, 씨네 토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피해 경험자들의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누구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현장의 분위기는 유쾌했다. 같이 웃고 욕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말들로 서로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힘이 되어주었다. 우리 이 같은 공간 아래 같이 버티고 있음을, 그래서 그 고통이 '우리'를 스러지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영화가 아닌 영화제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현장이었다.

가해자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 같지만 우리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악바리 쓰며 여기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 사실을 서로가 확인시켜주었다. 여성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 속에 같이 공감하며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남성들도 많았다. 연대의 공간, 위로와 공감의 순간이 영화제 그 모든 순간 이뤄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이야기에 조명 

숨어있고 침묵해오던 이들이 발화하고 본인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그 침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세상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란스러움에 한 풀 더 보태기 위해 이번에도 필자는 기꺼이 함께할 것이다. 그 안에서 또 어떠한 거대한 개인의 서사와 마주하게 될지, 그 서사와 이어지는 나와 다른 관객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어떤 불꽃으로 연결될지 기대된다. 제12회 여성인권 영화제는 오는 9월 12일(수)부터 9월 16일까지 CGV 압구정에서 진행된다. 친구, 연인, 가족, 동료들과 손에 손잡고 함께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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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른이라는 경계에서 현실을 바라보되 이상을 지키길 강요받는 청년으로 살아가며, 정의로운 방황을 통해 이 시대의 여성이 바라 보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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