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 Revolution Erie Productio


글쓰기는 외로운 일일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대답한다. 이따금 글을 쓰며 그 속에서 나는 사람을 만난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 읽으며 글을 배워갔던 책의 작가들. 내가 처음 서점에서 직접 구매해 읽었던 책은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영화, 내 영혼의 순례>였다. 어린 시절,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문장이 좋아 책을 곁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 책에서 유독 내 머릿속에 남은 표현은 '오롯이'였다. 나는 그 단어를 그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오롯이. '온전히'나 '완벽히'와는 다른 부드러운 수용의 태도가 느껴지는 표현. 나는 그 단어를 쓸 때마다 선생님을 떠올린다. 그 표현의 건너편에서 선생님의 얼굴을 본다.

그래서일까, 때때로 나는 글을 쓰면서 부러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보곤 한다. 한때 그 사람은 엄마였다. 말과 글을 배우던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엄마와 함께 보냈다. 그러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을 리는 없었다. 물론 아주 어린 아이였던 때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림들이 있다. 추운 겨울날, 한 동네에 살던 이모들이 우리 집에 모여 차를 마시던 풍경.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귤을 까먹으며 엄마와 이모들의 대화를 들었다.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부드럽게 조곤조곤 오고가는 말의 억양과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모습이 남아있다. 나는 그때 배웠다. 제대로 된 대화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프라이즈 위너>가 보여준 글쓴이의 자세

영화 <프라이즈 위너>는 작가 테리 터프 라이언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에블린 라이언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다. 에블린은 터프를 비롯해 무려 10명의 아이들을 양육했다. 이렇게만 봐도 그녀의 삶은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문제는 남편인 켈리가 무능한 데다 그나마 받은 급여는 죄다 술값에 쓰는 등 가계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에블린에게는 이 난관을 돌파할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콘테스트의 귀재였다. 신문의 시 쓰기 응모부터 광고 카피와 노래 작사까지, 썼다 하면 에블린은 우승을 거머쥐었고 그렇게 받은 상품과 상금으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말하자면 테리 터프 라이언의 작가적 능력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셈이 아닐까.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 Revolution Erie Productio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에블린이 글을 쓰는 장면을 허투루 묘사하지 않는다. 일상의 기쁜 순간부터 마음 아픈 상황까지 그녀에겐 모두 글의 소재가 된다. 콘테스트에 응모를 해야 할 때면 그녀는 메모지를 손에 쥐고 어느 때보다 집중력 있게 몰두한다. 이때에는 남편의 빈정거림조차 좋은 아이디어가 된다. <프라이즈 위너>의 백미는 에블린이 다른 콘테스트 응모자들과 모임을 가지는 장면이다. 이들은 서로의 응모작을 검토하며 단어 하나가 가지는 의미, 전달하는 느낌,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장의 운율을 검토한다. 서로가 서로의 글을 검토하며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관광 상품의 홍보 카피, 샌드위치 광고의 노래 가사면 어떠랴. 때로 한 줄의 문장이 한 권의 책보다 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에블린에게서 발견했던 엄마의 모습

사실 <프라이즈 위너>는 특히 페미니스트로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니었다. 그렇게 좋은 재능을 가지고도 에블린은 무능하고 초라하며 때로는 폭력적인 남편을 견디고 포용한다. 심지어 그녀는 결혼을 위해 멀쩡한 직장을 포기하기도 했다. 물론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들을 기르며 삶의 만족을 찾았던 에블린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1950~1960년대 미국이다.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 에블린이 그 시대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여지가 있었을까?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이 지점을 충분히 탐구하지 않은 채 그녀를 행복하고 씩씩한 캐릭터로만 그리는 것이 계속 찜찜했다. 그리고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그 감정을 떼어내고 작품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런 에블린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부끄럽게도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원래 집에만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사진첩에서 본 젊은 시절의 엄마는 여행을 떠나고 번화가로 외출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결혼 이전 엄마의 삶이 얼마나 가능성으로 충만했고 즐거웠는지 나는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엄마가 '엄마'가 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지 이제는 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는 엄마의 말을 믿지만 동시에 심란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작품의 원작을 쓴 작가이자 에블린의 '똑똑한 딸'인 터프다. 그녀는 질문한다. 결혼을 후회한 적은 없냐고. 20년 동안 집안에 갇혀 요리하고 청소하고 제멋대로인 애들만 돌봐 왔는데 자신이라면 매일 화를 냈을 거라고.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도시에서 지내면서 신문사에서 글을 쓰는 멋진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냐고. 그러자 에블린은 답한다. 지금도 멋진 인생이라고. 그리고 화를 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지 예쁘고 당당한 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고. 그리고 그녀는 터프에게 말한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살든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 Revolution Erie Productio


나를 위한 '용서하기'

체념일까?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포기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에블린은 딸인 터프도, 그리고 관객인 나도 완벽하게 설득한다. 남편의 잘못으로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후 그녀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고 다시 한 번 가족을 지켜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와중에도 터프는 그러지 못한다. 에블린에게 말한 것처럼 그녀는 아빠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에블린의 답은 뜻밖이다. 그녀는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아빠를 용서해줘, 아빠를 용서해야 너도 이 멋진 날을 즐길 수 있단다."

그때서야 나는 '순간을 즐기고 싶다'는 말이 단지 얄팍하게 입 좋은 말이 아님을 알았다. 삶이 초라하다고 그 삶을 사는 사람까지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집과 가족들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속에서도 에블린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글쓰기)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나름의 업적을 쌓아나갔다(그리고 나는 글쓰기가 단지 인정받기의 수단이 아님을 다시금 배웠다). 그녀가 남편을 연민하고 사랑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는 에블린이 자신의 성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불안과 분노 속에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멋진 날을 즐기기 위한, 그야말로 나를 위한 용서하기. 에블린의 관대함과 긍정은 다름 아닌 그녀의 통찰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에블린의 선택이 최선이었나는 여전히 따져볼 여지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삶을 단순히 '희생'과 '인내'로 정리하고 싶지도 않다. 보다 에블린의 의도를 존중하는 해석을 하고 싶다.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 Revolution Erie Productio


에블린이,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가끔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 나도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재잘재잘 이야기 하곤 한다. 보통은 우쭐대고 싶은 마음에 그러지만 늘 큰 코를 다친다. 추론과 고민만으로 엄마도 이미 예상했던 정보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얼마 전 서부 영화 속 카우보이들이 실제로는 대부분 비백인 이주민이나 흑인 노예들이었다는 글을 읽었다. 무릎을 탁 칠만큼 놀라운 이야기였기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답은 예상과 달랐다.

"엄마도 예전부터 영화를 보면서 의심하긴 했어, 왜 백인들이 험한 카우보이 일을 할까? 그들은 이미 흑인 노예가 있었는데 말이야."

돌이켜 보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늘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작고 소박한 것에도 온화한 관심을 드러낼 줄 알았다. 그리고 늘 이런 이야기를 반복했다. '여기엔 무엇을 넣었기에 이런 맛이 날까? 개들은 신기해. 왜 자기 꼬리를 쫓으면서 빙글빙글 돌까? 저기 목련 핀 거 봐, 어떻게 키웠기에 저렇게 클까? 아들, 저기 저 건물 좀 봐, 특이하지? 왜 저렇게 지었을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코웃음을 쳤지만 엄마는 그 자리에서 생각을 시작했다.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서 추론하고 퍼즐을 맞춰 나갔다. 그 곳이 주방이건, 동네 골목이건, 지하철 안이건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사소한 존재에게도 수수께끼와 의미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것은 훌륭한 작가의 자질이다. 에블린에게서 엄마를 보았듯, 이번에는 엄마의 얼굴 위로 에블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글을 쓰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계속 질문한다. 이 이야기가 글로 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람들에게 이 글이 필요한가. 나는 너무도 소박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부끄럽게도 때로는 질투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초라한 조건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가. 내가 보다 더 능력 있는 글쓴이였다면, 더 화려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하지만 서 있는 장소가 어디였든, 무엇이 보였든,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자기가 마주한 세계를 긍정하고 애정을 담아 포용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었던 엄마를 그리고 에블린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잡는다. 내가 배운 글 쓰는 사람 본연의 자세를 다시 취하고자 노력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글을 쓸 때에 주변에는 누구도 없다. 오직 나뿐이다. 하지만 자판을 두드리는 손 위로,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겹쳐져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혼자지만 결코 홀로 쓰지 않는다. 이를 깨닫는 것은 눈물이 날만큼 일상에서 가장 충만해고 행복한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손길들 중 하나가 엄마의 것임을 이제는 안다.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영화 '프라이즈 위너' 스틸 컷 ⓒ Revolution Erie Productio



프라이즈위너 엄마 글쓰기 줄리앤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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