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식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식이 진행되고 있다. ⓒ 이희훈


"우리의 사법체계는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 체제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를 역대 헌정사를 통해 절실히 인식하고 만들어낸 역사와 경험의 산물이다. 이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다."

작년 9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퇴임사에서 내뱉은 일성이다. 이 퇴임사에서 또 양 전 대법원장은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법관 독립의 원칙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제도로, 법관에게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의 독립을 지켜야 할 헌법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을 따름"이라고 강조했다.

촛불혁명 이후 '적폐청산'을 거치며 가장 빈번하게 드는 생각은 바로 '언어의 오염'이다. 구속·수감 중인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이나 '민주주의', '독립'과 같은 단어의 원뜻을 훼손시켰다. 그 '국민'들 앞에서 정색하고 내뱉은 언어의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위법과 불법을 얼마나 저질렀는가. 

사법농단 사태의 '윗선'으로 지목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역시 다르지 않다. 과연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양 전 대법원장과 같은 인사의 입으로 훼손돼도 좋은 것인가. "법관 독립의 원칙"이 "국민을 위한 제도"라고 말했던 저 교언영색을 역사에 기록되도록 허용해도 되는 것인가.

29일 <뉴스룸> '앵커 브리핑'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퇴임사를 거론한 손석희 앵커 역시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철옹성

 29일 방송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29일 방송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 JTBC


"'대법관의 숫자를 늘리면 되는데, 왜 상고법원을 더 만들겠다고 했을까?' 이런 기자의 질문에 대한 법조계 인사들의 답변은 매우 간단했다고 합니다. '대법관의 희소성을 지키겠다는 거지요'.

대법관이 고귀한 이유는 숫자가 적기 때문인데 숫자가 늘어나면 그만큼 권위가 떨어진다는 논리…. 즉 법원의 힘은 거대하게 불리되 권위는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그들은 그 핵심과제를 얻어내기 위해서, 법관의 독립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법 가치를 거래의 장물로 내어놓았다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대법원이 박근혜 정권과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법관독립의 원칙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손 앵커 역시 그런 양 전 대법원장의 과거 '언어'를 길어 올려 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그 법관들만의 고귀한 언어 말이다.

"'과거 왜곡의 광정'. 대외비라는 빨간 표시가 선명히 박혀있는 이 보고서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7월에 작성됐습니다. '광정'은 무슨 뜻인가…. 나름 한자어에 익숙한 세대지만 그 단어는 사전을 뒤져본 이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잘못을 바로잡아 고침', 아무튼 대법원이 '광정'하여 체제수호. 즉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했다고 자평한 이른바 '성과'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유신 시절 긴급조치에 따른 체포·구금·고문 등 피해에 대해서도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 그런데 그들은 왜 하필 '광정'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중략) 소위 사회의 엘리트라 불리는 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그 언어들 사이로 보다 높고 견고한 권력의 철옹성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고위직일수록, 전문직일수록 전문용어를 통해 저들만의 성채를 쌓는 행위가 기득권 수호의 발로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부정한 권력을 위해 철저히 복무했을 때는 양상이 달라진다.

또한 사법농단과 같은 부역은 '화이트 리스트'와도 또 다르다. 상고법원 설립 자체가 '대법관의 희소성'과 법원의 힘과 권위를 위한 것이었음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나 권력 놀음일 수 없다. 사법부야말로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 여겨지고, 또 그래야만 하는 삼권분립의 주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앵커 브리핑에 앞서 이날 <뉴스룸>이 전한 <법원에 막힌 '사법농단' 수사…압수수색 영장 90% 기각> 소식은 참담함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영장 기각율 90%가 던져준 참담함

 29일 방송된 JTBC <뉴스룸>의 한 장면.

29일 방송된 JTBC <뉴스룸>의 한 장면. ⓒ JTBC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재판거래 의혹 등을 밝히기 위한 사법농단 수사가 시작된 것이 지난 6월입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적극 협조하겠다는 선언이 있었지만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에 대한 압수수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검찰이 법원에 대한 강제수사를 위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의 90% 정도가 기각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법농단 수사가 잇단 영장 기각 앞에 가로 막혔다는 지적입니다."

손석희 앵커의 서두에 이어 전해진 숫자는 실로 놀라웠다. <뉴스룸>은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팀이 지난 두 달 동안 서울중앙지법에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은 모두 180여 건"이라며 "이 가운데 160여 건이 기각됐고, 발부된 것은 20여 건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이 90%의 영장 기각률을 도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럴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JTBC가 지난해 전국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발부율을 분석해 본 결과, 지난 5년간 압수수색 영장의 평균 발부율은 99%였다고 한다. JTBC는 "특히 서울중앙지법은 2016년 한 해 동안 1만 7410건의 압수수색 영장을 심사했는데, 이 가운데 기각된 것은 145건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어렵지 않다. 대법원이 쌓아올린 그 권력의 성채가 여전히 사법부 내에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법원 대상의 압수수색 영장만 90%가 기각되는 현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이러한 수치야말로 사법부의 제 식구 감싸기의 극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장 담당 판사들은 자료의 '임의 제출 가능성'이나 '추가 소명' 등을 기각 이유로 설명합니다. 특히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를 지목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 40여 건 중 단 2건만 발부됐습니다. 재판거래 의혹 문건 등이 작성된 관련 부서 등에 대한 영장은 모두 기각됐습니다."

이대로라면, 사법농단 사태를 '광정'하는 일은 앞으로도 요원해 보이지 않는가. 그 견고한 대법원의 철옹성을, 사법부란 성채를 과연 뿌리 째 뒤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낸 국민들은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99%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과 90%의  영장 기각률이란 숫자가 던져 준 참담함은 '언어'의 오염보다 훨씬 심각하고 생생한 '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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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화 기자, 오늘은 프리랜서 글쟁이. 살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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