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실제 내용과는 전혀 다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카피를 담은 선정적인 포스터.

영화의 실제 내용과는 전혀 다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카피를 담은 선정적인 포스터. ⓒ 매일경제신문


1983년 겨울이었다. 짙은 어둠 속 담배 연기 자욱한 전남 여수의 시민극장,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당시 여수의 3대 극장은 시민, 태평, 덕일극장이었다. 모두 2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시민극장은 그나마 시설이 가장 좋았다. 사실 상영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리던 제니퍼 빌즈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으니까.

영화 <플래시댄스>. 이 영화는 오십 평생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영화였다. 이미 서울에서는 9월에 개봉했고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관객동원으로 일찌감치 1위를 차지했다지만 전라도까지 내려오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 영화에 '스트립쇼'가 등장한다는 입소문은 시골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실제로 관객의 눈요기를 위해 추는 춤이겠지만 '스트립쇼'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호객의 효과가 충분했다. 게다가 귀가 닳도록 들어온 아이린 카라의 주제곡 덕분에 이미 역대급 볼만한 영화로 정평이 나 있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수에 <플래시댄스>가 들어왔다. "오, 왓 어 필링!(What a feeling)" 헉, 그런데 청소년 관람 불가였다. 역시 명작에는 '관람 불가' 딱지가 따라오나 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대수랴. 오히려 금도의 선을 넘고 싶은 피 끓는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세밑 시골극장 매표소. 장인이 손으로 직접 그려놓은 제니퍼 빌즈의 요염한 자태를 묘사한 파격적인 그림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영화 포스터는 더욱 우리를 자극했다. '뜨겁다 더 뜨겁다, 닿고 싶다 더 닿고 싶다', '지성과 미모와 탱탱 익은 바디!' 등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카피.

게다가 핫팬츠에 어깨를 드러내고 다리를 벌려 앉아 있는 여주인공을 집중 부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선정적이고 문제적인, 유치한 포스터야말로 영화공급사와 서슬 퍼런 검열 당국의 말도 안 되는 합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매표소 누나와 안면이 있는 친구를 앞세워 굽신거려 간신히 표를 사고 무사히 극장에 입성하는가 싶었다. 밝은 빛에 익숙해 있던 눈은 어둠을 맞자 시력을 상실한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주위가 인지되나 싶더니, 교외지도 나온 다른 학교 학생주임에게 걸려 혼나는 녀석들이 보인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가슴을 졸였지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오니 어느새 걱정은 사라진다. 이토록 진심으로 국기에 대해 맹세를 하는데 설마 잡아가기야 하겠나. 이어 <대한뉴스>가 흘러나온다. '19금' 영화 상영을 앞두고 대통령이 등장한다는 게 말도 안 되게 웃기는 일이지만 당시로는 당연한 의례행사였다.

영사기로 쏘는 불빛이기에 중학생의 체격과 시야로는 앞 사람들의 머리로 가려 안 보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제니퍼 빌즈를 본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모든 걱정 따윈 잊을 수 있었으니까.

영사기의 화질도 많이 떨어졌지만, 음향만큼은 진심으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오직 내 머릿속에 있는 건 춤을 추는 주인공이 선사하는 황홀경, 그것 하나뿐이었다. 배경음악이나 목소리는 그저 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영화 <플래시 댄스> 포스터.

영화 <플래시 댄스> 포스터. ⓒ 파라마운트 픽쳐스


영화는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룬다'는 뻔한 결말과 신데렐라 신드롬에 기댄 빈약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용의 흐름이 다소 빈약하더라도 풍성한 볼거리와 매력적인 영상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18세 소녀 알렉산드라 오웬스(제니퍼 빌즈 분)는 대도시의 허름하고 우중충한 창고를 개조한 집에서 개 한 마리만 데리고 혼자 산다. 낮에는 제철소에서 용접 일을 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플로어 댄서로 일하며 꿈을 키운다.

알렉산드라가 일하는 제철소의 소장인 닉 헐리(마이클 누리 분)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꿈을 실현해줄 것을 결심한다. 닉과 알렉산드라는 연인으로 발전하고, 결국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꿈을 이루게 된다.

그랬다. 뻔한 줄거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파격적인 서양문화와 영상에 목말랐던 그 시절, 제니퍼 빌즈의 충격적인 댄스는 청춘들의 유일한 판타지이자, 힘겨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해방구였다. 한때 영화 속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춤 장면들이 제니퍼 빌즈가 아닌 대역배우가 연기했다는 문제가 제기됐지만, 여전히 내 기억 속의 제니퍼 빌즈는 최고의 댄서로 남아있다.

'What A Feeling!'. '페임(Fame)'의 주제가를 불렀던 아이린 카라(Irene Cara)의 노래이자 이 영화의 주제곡. 이 곡은 영화 인트로와 오디션 보는 장면에 흘러나온다. 그런데 결정적인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은 흘러 나올 때마다 이곳저곳 객석에서 하얀 담배 연기를 유발했다. 한숨처럼 빨아들이는 담배 연기는 강한 빛을 발하며 스크린 사이로 사라진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영화에는 에로티시즘이 곳곳에서 묻어 나왔다. 영화 속 가장 심쿵하는 장면은 바로 이거였다. 어느 날 밤, 알렉산드라와 닉은 집에서 피자를 먹는다. 그 앞에서 앉은 채 서슴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속옷을 벗어 던져 버리는 알렉산드라. 그날 밤 그렇게 둘은 사랑을 나눈다.

하필이면 이 장면에서 영사기에 걸린 필름이 닳아 스크린에 비가 내리고 음영도 없이 입혀진 자막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잘라먹지 않은 게 그야말로 천만다행이다. 이윽고 마른침을 삼키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관객들은 그저 야속하다.

성냥 타는 냄새와 담배의 첫 향기와 섞이니 그렇게 냄새가 구수할 수가 없다. 아, 이럴 때 담배라도 한 모금 빨아봤으면 소원이 없으리라. 그 와중에 객석 가운데쯤에서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드는 귀한 가르침을 주는 달인도 있다. 필름 돌아가는 소리와 그 빛을 따라 움직이는 담배 연기는 그 어떠한 디지털 기술이라도 감히 흉내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본 브레이크 댄스와 샤워 댄스를 표현한 감성적 영상은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영화관을 나오며 그길로 레코드점에서 테이프를 샀고, 이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린 카라의 'What a feeling'만이 아니었다. Machael sembello의 'Maniac'과, Donna summer의 'Romeo'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사 없이 부를 수 있다.

퀴퀴한 담배 냄새와 스크래치로 알렉산드라의 벅찬 감동을 전했던 1983년 겨울 여수 시민극장. 그곳에서 <플래시댄스>가 전해준 아날로그의 추억들. 이제 그 어떤 디지털 기술로 대신할 수 있을까?

상영시간 95분, 황홀함은 어느새 끝났다.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극장을 빠져나오며 햇빛에 눈이 너무도 시렸던 게 아니었다. 실눈을 뜨며 내 눈에 들어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치 알렉산드라가 꿈꿨던 세상처럼 보였다.

춤이 무엇인지 브레이크댄스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그 장면들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왓 어 필링!'

극장 플래시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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