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금토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김태리 분)은 의병의 모습 외에 다른 모습도 보여준다. 서구문명 수용 시기, 이른바 개화기 '신여성'의 맹아(원형)적 형태까지 보여주고 있다. 상대역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고애신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나가 영어를 배우고, 전통적 혼인 관념인 중매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다. 정혼자인 김희성(변요한)한테 얽매이지 않고 노비 출신인 유진 초이와 애틋한 감정을 교환한다. 유진 초이와의 관계서 썸도 타고 자유연애도 하고 있다.

현재 <미스터 션샤인>은 1905년 이전 즉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속 고애신 같은 신여성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부각된 시점은 이로부터 15년이나 20년 정도 흐른 1920년대 초중반이다.

촛불혁명 이후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1919년판 촛불혁명인 3·1운동 이후에도 여성들의 역량이 높아졌다. 그런 현상을 이끈 신여성들은 숫자로는 소수였지만 새로운 여성 문화를 이끌어가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처럼 15년이나 20년 정도 뒤에 등장할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애신을 '신여성의 맹아'라 부른 것이다.

'신여성' 윤심덕... '나 자신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목소리

 노래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노래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 위키커먼스


신여성으로서 두각을 보인 인물 중에 가수 윤심덕이 있었다. 그는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데이냐"로 시작하는 <사의 찬미>를 일본 이토 레코드사에서 녹음한 뒤, 유부남 애인 김우진과 함께 부산행 선박에서 현해탄으로 뛰어들었다. 신여성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분위기에 맞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신여성들이 추구했던 가치관은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독립적 인격체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화가 겸 문인이자 신여성으로 유명했던 나혜석은 <인간 선언>에서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의무 같이/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나를 사람으로 만드는/사명의 길을 밟아서/사람이 되고져"라고 읊었다.

그런데 '신여성'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그리 나쁘지 않다. 이 말 자체에서는 부정적 느낌이 생기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192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대다수 남성들이 '신여성'이라는 부정적이지 않은 표현만으로 신여성을 불러줬을 리는 없다. 신여성이란 표현도 사용했지만, 이와 다른 표현들로도 이들을 불렀다.

이 당시 지식인들은 영어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1921년 11월 <개벽>지에 실린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도 그 점이 나타난다. 이 소설에는 배운 게 없어 남편과의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는 아내와, 그런 아내는 물론이고 세상 자체를 답답해하는 인텔리 남편이 나온다. 그들의 대화 중에 하이칼라(high collar)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장면이 나온다.

늘 술에 취해 사는 남편의 입에서 '하이칼라'가 자주 언급되는 걸 기억해둔 아내는 "누가 당신께 약주를 권하는지 내가 알아낼까요?"라며 "첫째는 홧증이 술을 권하고, 둘째는 하이칼라가 약주를 권하지요"라고 말한다. 안 그래도 세상살이가 답답했던 남편은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답답해한다.

'모던걸' 대신 '모단걸' 혹은 '못된걸'로 바꿔 부르기도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김태리 분).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김태리 분). ⓒ tvN


이 정도로 지식인 사회에서 영어 단어가 많이 쓰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신여성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가 등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던걸(modern girl)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신여성'과 함께 모던걸이란 단어를 함께 썼던 것이다.

그런데 '모던걸'을 이상한 발음으로 변형시키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던걸을 모단걸로 발음했다. 한자 '모단'과 영어 '걸'을 섞었던 것이다. 모단은 '털 毛'와 '자를 斷'을 합성한 말이다. 신여성들이 전통적 헤어스타일인 댕기머리를 하지 않고 서양식 단발을 하고 다닌다는 의미에서, 모던걸을 모단걸로 비틀어 발음한 것이다. 신여성의 외모에 대한 기성세대의 불만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발음의 변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모던걸을 못된걸로 바꿔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윤심덕의 경우에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바닷물에 뛰어들어 놀기도 하고 부모뻘 되는 남자들에게도 존댓말을 잘 쓰지 않았다. 존댓말인지 반말인지 헷갈리는 말투를 사용했다. 그래서 나이든 남성들 중에는 윤심덕 같은 모던걸을 '못된걸'로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모던걸이란 표현은 신여성의 생활양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에 비해 '모단걸'은 이들의 외모에, '못된걸'은 '행실'에 근거한 것이다. 모던걸의 이 같은 변형에서 느낄 수 있듯이, 1920년대에도 신여성들은 기성세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런데 드라마 속 고애신은 1905년 이전에, 그것도 양반 명문가 여성으로서 신여성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신여성의 원조 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여성으로로 불리려면 조건들이 있었다. 머리를 단발로 하는 외형적 조건만 갖춘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우선, 외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했다. 전통적인 양반가 처녀들은 마음대로 외출하지 못했다. 단오 같은 날이 아니면 밖에 나가 놀기도 힘들었다. 명절날에 널뛰기라도 하지 않으면 담장 밖을 내다보기도 힘들었다. 신여성이 되려면 이런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전통의 억압이 여전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외출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양반가 처녀가 정기적으로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뭔가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 명분이 무엇인지를 드라마 속 고애신은 잘 보여주었다.

고애신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나가 영어를 배운다. 그런 날에는 가마를 타고 나들이하는 그를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런 기회에 고애신은 거리 풍경도 보고 군것질도 즐긴다. 고애신처럼 1920년대의 신여성들도 신식 학교에 다녔다. 등교는 그들에게 합법적인 외출 기회를 제공했다.

자유롭게 외출하다 보면 남자를 만날 기회도 그만큼 늘어난다. 학교에 다니는 신여성은 일반 여성에 비해 이성교제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부모가 맺어준 정혼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중매혼을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표방했다. 고애신이 하는 것처럼, 가슴이 끌리는 남자한테 자유롭게 사랑을 표현했다.

이미 20년 전 '신여성' 보여준 고애신 하지만

 고애신과 유진 초이(이병헌 분).

고애신과 유진 초이(이병헌 분). ⓒ tvN


<미스터 션샤인> 속의 고애신은 헤어스타일만 보면 '모단걸'이 아니다. 하지만, 등하교를 통해 자유롭게 외출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신여성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신여성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부각되기 15년 내지는 20년 전에 신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1920년대에 모던걸의 삶을 산 여성들에 비해 훨씬 더한 심리적 고민을 겪을 수밖에 없다. 훨씬 더한 사회적 억압을 뚫고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려면, 1920년대 여성들보다 훨씬 치열한 내적 고뇌를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신여성이 기성세대와 충돌할 때 겪게 되는 내적 고뇌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명확히 표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 고애신을 보면서 그의 내적 투쟁이 어떠했을지 스스로 가늠하는 수밖에 없게 됐다.

미스터 션샤인 신여성 모던걸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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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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