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 (주)수필름


'이런 영화는 봐줘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 시대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해서는 이따금 매스컴에서 들은 게 전부지 따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학생 시절 국사 시간에 일제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안 나고 관련된 영화도 몇 편 만들어졌다는데 잘 모르고 지나쳤다. 알았더라도 위안부 관련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보면 당연히 슬플 것이고 화도 날 테고 가슴이 답답할 터이니 구태여 돈 내고 극장까지 가서 그런 영화를 볼 일이 무엇인가.

그런데 <허스토리>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왠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령으로 한 분씩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있음이 뉴스를 통해 알려지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더 늦기 전에 들어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역사를 알아야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던 말이 귀에 들어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관부재판의 할머니들

영화는 1992년에서 1998년까지 부산의 일본군 '위안부' 및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1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청구한 관부재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관부는 재판이 이루어진 일본 시모노세키의 지명인 <하관>의 '관'과 피해자 할머니들이 사시는 <부산>의 '부'를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기 전 살짝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영화는 과도한 장면도 없고 관객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억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 경력 도합 200년이 넘는다는 쟁쟁한 배우들 덕인지 할머니들의 증언 부분에서는 주위에 훌쩍이는 분들이 계셨다. 특히 "나를 내 본래 모습으로 돌리도. 당장 17살 때 그때 모습으로 돌리도!"라는 배정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김해숙 분)의 울부짖음엔 나도 울컥하며 온몸에 전율이 끼쳤다.

혼자서 잘 먹고 잘 산 게 부끄러운 여행사 사장

 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 (주)수필름


그런데 영화 내내 나의 관심은 증언하는 할머니들보다는 원고단을 이끄는 문정숙 단장에게 더 많이 향해 있었다. "내가 손 댄 것 중에 실패한 것 있더나?"라고 말하는 문정숙 단장은 부산에서 '억수로 잘나가는 여행사' 사장이며 자신만만하고 당찬 성격이다. 그러나 문 단장이 여행사 한켠에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자 신고센터'를 설치하였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끌고 관부재판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일본인 여행객이 뚝 끊겨버려 잘 나가던 여행사 운영이 힘들게 되었다.

사정이 어려워진 문 단장이 재판에 필요한 돈을 빌려 달라 하자, 친구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만류한다. 그러면서 친구가 "왜 할매들한테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야?"라고 묻자 문 단장은 "부끄러버서! 내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라고 화난 목소리로 외친다. 마치 친구가 아니라 문 단장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아 보였다. 자기 집에서 오랜 세월 함께 살며 집안 살림을 맡아하고 고명딸을 정으로 키워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였음을 모른 채, 위안부 피해자의 삶이 '한 번 삐끗해 끝난 인생'이라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화가 났을 것이다.

 영화 <허스토리>(2018) 한 장면

영화 <허스토리>(2018) 한 장면 ⓒ (주)수필름


힘없는 국가의 국민이고 딸이어서 겪어야만 했던 그 고통과 아픔. 가족과 주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마치 피해 받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기나 한 듯 내 놓고 말도 제대로 못했을 외로움과 슬픔. 그 고통과 슬픔을 안고 평생을 살아낸 위안부와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국가조차 나서주지 않는 싸움을 시작하고 작은 승리를 이끌어낸 문정숙 단장이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가족도 친척도 아닌 할머니들을 위해, 그 분들의 분을 풀어드리기 위해 사재를 털고 빚을 내면서 까지 재판에 이겨야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문 단장을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덮여진 역사에 무관심하고 쓰라린 역사 떠들쳐 보기를 두려워하는 우리 가운데 문 단장 같은 분이 계셔서 그래도 세상이 순리를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닐까.

영화 속 문 단장의 실존 인물

영화를 본 뒤 <허스토리> 속 문 단장의 실존 인물이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이시며 부산에서 사비로 '민족과 여성역사관'을 운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올 여름 휴가를 부산으로 가기로 했던 차라 한 번 들러 보기로 하였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민족과 여성역사관'은 수영역 근처 한 건물의 2층에 있었는데 100평이라고 하지만 관부재판 기록물 등 많은 사진과 자료들로 빼곡하여 비좁아 보였다.

찌는 더위에 찾아간 보람이 있게 마침 김문숙 관장께서 자리에 계시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영화 본 이야기도 나누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렸다. 연세가 92세 이신데도 안내하시는 여성 한 분과 한산한 역사관을 지키고 계신 걸 보니 얼마나 역사관에 대한 애정이 깊으신지 느낄 수 있었다. 안내하시는 분이 회장님이라는 불러드리는 걸 좋아하시고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좀 힘들어하신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역사의 가르침 잊지 않도록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이 운영중인 '민족과 여성역사관'의 모습.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이 운영중인 '민족과 여성역사관'의 모습. ⓒ 이숙경


안내하시는 분의 열정적인 설명을 들으며 역사관을 살펴보았는데 개인이 어떻게 이렇게 모았을까 싶게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더운 날씨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 일행 이외에는 다른 방문객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민족과 여성역사관'에 있는 관부재판 및 일제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관련된 자료들을 보고, 국가가 힘이 없으면 국민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다시는 세상 어디에서도 일제 치하에서 우리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가 주는 가르침을 되새기면 좋겠다. 아무도 응원하지 않아도 잘못된 역사를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밀고 나갔던 김문숙 회장의 뜻을 기릴 수 있으면 좋겠다.

다행히 최근 <허스토리>가 개봉되고 나서 사람들이 관심도 보이고 성금도 보내 주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받는 보조금으로는 다달이 역사관 월세 내는 것도 어려우셨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금방 식지 않고 지속되어 지금까지 김문숙 회장이 홀로 애쓰며 운영해 오신 '민족과 여성역사관'을 앞으로는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함께 유지하고 지켜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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