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지난 20일,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이일하 감독의 영화 <카운터스>가 상영되었다. 상영 이후에는 숙명여대 법학부 홍성수 교수와 함께하는 GV도 진행되었다. <카운터스>는 일본의 '혐한 시위'를 선동했던 '재특회'에 대항(counter)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로, 99분에 걸쳐 카운터스가 결성된 배경과 카운터스의 대항운동이 어떻게 아베 정권 하에서 '헤이트스피치(편파적인 발언이나 언어폭력) 해소법 통과'라는 입법적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의 과정을 다룬다.

'재특회'는 '재일조선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회'의 줄임말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코리언이라는 '소수집단'이 일본인들에겐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 내 '넷(net)우익' 정서를 기반으로 온라인상에서 재일코리언에 대한 혐오표현을 재생산하다가 어느 순간 오프라인상의 직접행동을 통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재특회가 코리안타운이나 조선인학교 앞에 결집해서 재일코리언들을 향한 극단적인 수준의 모욕과 욕설('죽어버려라') 및 위협('너네 나라로 돌아가')을 일삼더라도 경찰이 이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아니, 경찰에게는 (재일코리언이 아닌) 재특회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재특회의 시위는 법에 근거한 합법적인 시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실질적인 폭력과 협박을 행사하는 혐오세력들의 시위가 '합법'이라는 이유로 법의 보호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카하시와 기모토, 두 사람이 결성한 '오토코구미(男組: 남자 조직)'는 실질적인 '물리력(ex: 주먹, 멱살 잡기 등)'을 통해 재특회를 저지하고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조직이다. 전직 야쿠자 출신인 다카하시의 원칙은 단순했다. 국가도, 법도, 경찰도 지켜주지 않는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나쁜 놈'이 되겠다는 것이다.

'올바른 나쁜 놈들'의 판 바꾸기

 이일하 감독, 홍성수 교수와 함께하는 <카운터스> 스페셜 GV

이일하 감독, 홍성수 교수와 함께하는 <카운터스> 스페셜 GV ⓒ 이소윤


이날 이일하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GV를 통해 카운터스의 기존 멤버들도 '오토코구미'를 카운터스의 내부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갈등과 고민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다카하시라는 인물은 과거에 야쿠자 활동을 했었고, 극우 시위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혐오세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망설임 없이 물리적 폭력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고,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체포되는 것의 사회적 불이익을 알고 있음에도 이 또한 기꺼이 감당하고자하기 때문이다.

즉, 다카하시는 누가 봐도 '나쁜 놈'인데, 나쁜 놈의 선택이 모여 만든 행동은 누가 봐도 '올바른'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카하시와 오토코구미는 '올바른 나쁜 놈들'의 모임인 셈이다. 올바른 나쁜 놈이라니. 이런 모순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카하시를 둘러싼 모순이 어떻게 운동을 살아있게 하는 동력이 되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착한 놈/나쁜 놈', '정의/부정의', '옳음/그름', '폭력/비폭력', '합법/불법', '좌파/우파'라는 이분법적 인식론에 질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 '사람을 때리면 감옥에 간다는 법은 과연 평등한 법인가?', '권력과 폭력은 항상 일치하는 개념인가?'와 같은 질문을 관객들이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앞서 살펴본  이분법적 프레임을 통해 설명되지 않는 세계라면, 이런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혐오의 역학(dynamic)을 이해하고 혐오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홍성수 교수에 따르면, 카운터스 운동이 혐오세력을 성공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운동의 구도를 '일본사회/인종주의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혐오에 찬성하는/반대하는 사람', '보수/진보', '일본인(정주민)/재일코리언(이주민)'으로 이분화되기 쉬운 기존의 프레임을 '차별주의자 vs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카운터 운동이 만들어낸 새로운 역학 구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재특회 등 인종주의자들은 한편으로 재일 코리안들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에게 '함께하자'고 선동했다. 그러니까 재일 코리안 고립에 전체 일본인을 동참시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카운터 운동은 이 구도를 '일본 사회' 대 '인종주의자'의 구도로 바꾸고자 했다. 인종주의자들은 재일 코리안들을 고립시키려고 했지만 카운터 운동은 '일본사회'가 일본인, 재일 코리안, 중국인, 필리핀인, 기타 외국인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임을 알리며, 오히려 인종주의자들을 고립시켰다. 이것은 혐오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아주 유효한 방법이다. 미국에서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대한 차별에 맞서 '모든 미국인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거는 것도 바로 그런 대안적인 구도를 만들려는 시도다." -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218쪽

 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오토코구미는 헤이트스피치 법이 통과된 이후 자발적으로 해산을 했으며, 다카하시는 재특회 반대시위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미군기지건설반대 시위도 참가하며 한 명의 시민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오토코구미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관련된 고민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오토코구미의 등장을 기점으로 일본의 좌익, 리버럴 사회 운동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에서 자신을 '극좌익'이라고 소개했던 어떤 활동가에 의하면, 기존에는 '좋은 사람'이어야만 운동을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진보-좌익 운동가'라는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거나 잠깐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기존 사회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가 비일관적이고, 좋은 사람이 아닌 건 아닌데 좋은 사람이기만 하지도 않은 다카하시와 오토코구미의 등장이 그 자체로 문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취약함을 혐오하는 사회의 공통점

상영이 끝나고 진행되었던 GV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한국사회의 이슈는 역시나 '예멘 난민 혐오'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일하 감독은 일본의 관동대학살사건을 언급하며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당시에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어지니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는다, 쿠데타를 하려한다, 여성들을 강간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해당 유언비어들은 순식간에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굉장히 많은 조선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일하 감독은 재특회의 혐한댓글연구를 했던 경험을 밝히며 재특회의 혐한댓글의 주어자리에 재일코리언이 아닌 예멘난민, 여성, 이주노동자를 넣고 번역을 하면 현재 한국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댓글과 다를 바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즉, 혐오를 선동하는 재특회의 논리가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것이다.

이일하 감독은 제주 4.3 사건 때 국가 폭력에 의해 더 이상 제주에 살 수 없게 되었던 피해자들이 일본(특히 오사카 지역)으로 이주했던 역사를 언급하며, 당시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온 난민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즉, 국제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역시 난민출발국이었던 시절이 있고, 다른 나라에게 빚을 진 역사가 있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오늘날 난민도착국으로서 일본은 더 이상 사람을 받기보단 돈(금전적 지원)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재특회의 핵심 논리는 '재일코리언들이 일본인에게는 없는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기에 그들은 추방되어 마땅하다'라는 것이다. 재특회가 혐한시위를 할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선동을 했던 사쿠라이라는 인물은 '당신도 차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인터뷰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쿠라이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아버지 없이 자란 놈'이라는 욕을 들으며 자랐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차별을 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면서도 인간은 차별이 있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답변을 덧붙였다.

사쿠라이가 보여주는 인간유형은 전형적인 '강약약강(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한 사람)'에 해당하는데, '힘이 곧 논리'인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굳은 확신과 자기 정체성을 언제나 강자와 동일시하는 태도가 있기에 가능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쿠라이의 세계에선 차별받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 된다. 그가 보기에 약하게 태어난 것이 곧 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취약함을 혐오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해온 역사야말로 가부장제를 유지해온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고에 기반을 두고 약자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약자들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프레임은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철칙이 아주 충실하게 작동한 결과물로서, 남성연대(호모소셜리티)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행위를 방해하려는 대표적인 '공작정치(혹은 음모론)'라고 생각한다. 인종주의, 난민혐오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페미니스트로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의 목표는 '여성이 가장 피해 받은 사람'임을 주장하며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제로섬 게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난민은 위험하다'거나, '예멘 난민들이 많아지면 한국여성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그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타자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 자체를 '공포스러운 괴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내가 모르는 너'를 마주하면서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돌보는 일이 아닐까.

"버틀러는 안다가 아니라 모른다를 인정할 때, 따라서 내가 모르는 네가 거기에서 내 메시지를 전달받고, 내가 모르는 네가 나의 시작이고, 나의 투명한 일관성을 붕괴시키는 네가 곧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윤리가 아니라 너를 살려야 내가 사는 윤리가 출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역, 윤리적 폭력비판, 241쪽(역자 후기 中)

덧붙이는 글 8월 29일, <카운터스>의 주인공 다카하시가 과거에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SNS와 언론 등을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배급사측에서는 <카운터스> 확대 상영을 중단하고 예정 되어있던 GV행사도 모두 취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다카하시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와 '카운터스 운동의 성과/한계'를 논하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구분지어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주체로서 참가할 자격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행동하는 시민으로서 지켜야할 어떤 윤리적 원칙은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나 자기 안의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해도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면 이에 대해 인정하고, 책임지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건 공론화 이전에 작성된 기사에 실린 다카하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정당화할 의도로 쓰인 것이 아니지만, 기사 본문에는 해당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혹시라도 부족한 글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신 독자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죄송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
카운터스 혐오표현 페미니즘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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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사람 / 여성주의공부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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