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두 달 전 한국축구는 '카잔의 기적'에 열광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시 피파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제압하는 대회 최대의 이변을 연출했다.

경기전까지 한국은 스웨덴과 멕시코에 이미 2연패를 당하여 사기가 꺾인 상황이었고 독일은 한국을 반드시 이겨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는 한국으로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대부분이 예상이 승패 자체보다 '독일이 한국을 상대로 과연 몇 골이나 넣을지'에 초점이 모아질 정도였기에 믿기 어려운 결과에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독일이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이나 아시아팀에게 패한 것은 모두 사상 최초였다. 한국은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독일과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며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했다.

조별리그에서 '뼈 아픈 예방주사' 맞은 김학범호

아이러니하게도 두 달 후 한국축구는 바로 독일과 동병상련의 처지가 됐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 한국대표팀은 17일(한국시간) 인도네시아 반둥 시 잘락 하루팟 스타디움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E조 조별리그 2차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1-2로 패배를 당했다.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한국이 손흥민 등 최정예 유럽파까지 동원하고도 몇 수 아래로 꼽힌 말레이시아에 패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반둥 참사'로 불리는 이 경기는 한국축구의 역대 아시안게임 역사에 손꼽힐 만한 '흑역사'로 남게 됐다.


입장은 달라졌지만 '카잔의 기적'과 '반둥 참사'가 주는 교훈은 동일하다. 공은 둥글고 축구에서 '당연한 결과'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독일을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말레이시아가 한국을 이길 수 있다는 것도 축구라는 스포츠이기에 가능한 묘미다.

당시 독일은 한국의 전력을 우습게 보고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반드시 이겨야 했던 경기에서 일부 주전을 빼고 로테이션을 가동하는가 하면, 경기 흐름에 변화를 줄 만한 전술적 카드가 전무했다. 한국은 독일의 다급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철저한 '선 수비 후 역습' 전략으로 대어를 낚는 데 성공했다.

말레이시아전에서 한국축구의 발목을 잡은 것도 바로 자만이었다. 바로 전 경기에서 1.5군에 가까운 전력으로 바레인을 6-0으로 손쉽게 대파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김학범 감독은 말레이시아와 2차전에서도 선수명단을 큰 폭으로 바꾸며 로테이션을 가동했지만 1차전과는 달리 수비 조직력이 초반부터 무너지며 전반전에 두 골을 내주는 등 경기를 어렵게 풀어가야 했다. 이날 경기를 이겼더라면 16강 진출을 확정짓고 마지막 키르키스스탄전을 좀 더 여유롭게 대비할 수 있었지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려다가 오히려 발등을 찍었다.

물론 김학범 감독으로서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대표팀 소집 이후 선수들이 아직 제대로 손발을 맞출 기회도 없었던 상황에서 조별리그는 실전인 동시에 사실상 토너먼트를 대비한 '훈련'의 의미도 겸하고 있었다. 20인이라는 한정된 엔트리로 2~3일 간격으로 빡빡한 일정이 이어지는 아시안게임에서 주축 선수들의 체력 안배나 컨디션 점검을 위한 로테이션을 어느 정도 불가피했던 부분도 있다. 하지만 1차전의 상승세를 이어가야 했던 상황에서 조직력과 연속성이라는 변수를 지나치게 간과한 용병술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백전노장인 김학범 감독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시행착오를 드러낸 대목이다.

로테이션이나 전술의 문제를 떠나 더욱 아쉬운 것은 한국 선수들이 말레이시아를 개인 능력으로도 공략하는 장면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 양팀의 전력차를 따지면 조직력의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말레이시아 전에서 수준 차이를 느낄만한 움직임이 더 나왔어야했다. 기술은 물론이고 체력이나 스피드면에서 말레이시아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것은 최근 아시아의 약팀들을 상대로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린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은 황희찬이나 손흥민 같이 A대표팀에서도 주전이고 월드컵까지 경험해본 선수들을 내보냈지만 두터운 수비를 구축한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시원한 돌파나 슈팅 한번 제대로 때리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대회 개막 전까지 와일드카드 합류를 두고 말이 많았던 황의조가 말레이시아전 만회골까지 총 4골을 터뜨리며 고군분투한 것과 대조된다. 한국축구는 이제 아시아 무대에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팀이 아니며, 선수의 '이름값'이 곧 경기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레이시아전이 남긴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다.

조 2위로 진출할 경우 우즈베키스탄과 맞대결 예상


아시안게임은 한국축구에게 있어서 결코 만만한 대회가 아니다. 아시안게임 때마다 역대 최고멤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지만 정작 홈에서 열린(1986년, 2014년) 대회를 제외하고 한국축구가 원정에서 정상을 차지한 것은 무려 30년 전인 1978년이 마지막이다. 또한 한국축구가 그동안 아시안게임에서 월등히 전력이 앞선 팀에게 완패한 경우는 거의 없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 준결승 우즈벡전(0-1 패), 1998년 방콕 대회 8강 태국전(연장전 2-3패), 2002 부산 대회 4강 이란전(승부차기 2-4 패). 2010년 광저우 대회 4강 UAE전(연장전 0-1 패) 등 상대적으로 약한 팀들에게 고전하다가 불의의 한 방을 얻어맞고 허무하게 무너진 경우가 많았다. 독일이나 스페인, 브라질같은 세계적인 강호들도 약체들에게 종종 무너지는게 축구다. 한국이 '디펜딩챔피언'이라는 자만심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하는 이유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한국전 패배를 끝으로 월드컵에서 사라진 독일과 달리, 김학범호에게는 아직 만회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예선에서 한번 뼈아픈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두 번의 시행착오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당장 키르키스스탄전에서 상황이 꼬이면 한국이 조별리그 탈락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내몰릴 수도 있다. 조 2위가 되면 8강에서는 강력한 우승후보인 우즈베키스탄을 만날 수도 있다. 김학범호가 스스로 자초한 위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축구팬들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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