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아이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 동료의 도움까지 받아 지각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지만, 상사의 예리함 앞에 알리바이는 허투루 돌아갈 뿐이었다. 오늘은 칼퇴근 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번에는 후임이 대형 사고를 쳤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길에 사고가 났다.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목록을 확인하는데 아뿔싸! 이제야 아내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두려운 마음으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나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아내가 호통을 쳤다. 심지어는 손질하던 게 다리를 얼굴 근처로 던지기까지.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의 은행원이자 결혼 생활 5년 차에 접어든 두 아이의 아빠 차주혁(지성 분)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함으로 저물었다.

귀엽고 사랑스럽던 여자가 괴물로 변한 까닭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tvN


서우진(한지민 분)이 원래 괴팍한 심성의 여자는 아니었다. 주혁의 회상에 따르면 고등학생 우진은 누구보다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학생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를 괴물로 만들었나. 이른 나이에 결혼해 일찍 낳은 두 아이와 치매를 앓고 있는 친모, 제 앞가림 하기 바쁜 남편까지. 생활고, 맞벌이, 독박 육아, 독박 가사로 피폐해진 삶은 점차 그녀를 히스테릭한 여자로 만들었다.

문전박대를 당한 주혁은 친구들을 만나 "내가 알던 귀엽고 사랑스럽던 여자는 어디 가고 괴물과 함께 침대를 쓰는 것 같다" "분노조절 장애 같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다"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담 우진이 괴물로 변하는 동안 주혁은 무얼 했나. 극중에서 출근 준비를 하기도 바쁜 시간에 아이를 보살피고,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온갖 가사를 도맡은 것은 모두 우진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설움만 토로하는 주혁의 모습은 분노가 일게끔 한다.

주혁의 울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최근에 밥 얻어먹은 기억이 없다"고 말하며 "내가 대단한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라고 덧붙인다. 이 때 주혁은 야근한 뒤 냉동실에 있던 백설기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장면을 회상했다. 다시 말하건대 이들은 맞벌이 부부다. 우진이 주혁을 위해 늦은 시간 식탁을 다시 차릴 의무도 없으며, 주혁은 우진이 차린 식사를 넙죽 받아먹을 권리도 없다. 집밥을 그렇게나 원할 시간 동안 직접 차려 먹을 생각은 않고 밖에서 설움을 토하기만 하는 점. 이 지점은 주혁이 가부장적 남성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특히 두 사람의 대립은 주혁이 비상금을 털어 몰래 사둔 고가의 게임기를 우진이 물에 담가 망가뜨리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주혁은 "말 끊지 마. 내가 네 남편이야, 알아?"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여기에서 주혁은 왜 굳이 '남편'이라는 걸 강조할까. 그가 말하는 남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주혁의 분노는 그치지 않고 "왜 매일 나만 너를 이해해야 해?" "고객보다 마누라가 더 지친다" "나도 집에 오면 좀 쉬고 싶다"고 말한다. 정녕 주혁이 우진을 이해하는가. 아니, 그는 조금도 우진을 이해하지 않는다. 주혁이 우진을 이해하려 했다면 독박 육아, 독박 가사의 부담을 우진 혼자 짊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혁이 집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고? 우진에게 집은 제2의 일터일 뿐이었다.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고가의 게임기를 손에 넣기 위해 의지를 발휘하는 모습 또한 어처구니가 없다. 앞서 주혁은 야근으로 인해 아이들을 제때 하원시키지 못해 우진의 노여움을 샀다. 게임기를 구매하기로 한 날에도 야근의 위험은 엄습했다. 게임기 구매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고객이 신분증을 두고 왔음에도 단골 고객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출을 승인했으며, 상사에게는 집안 문제라는 핑계를 대고 칼퇴근에 성공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그의 의지는 게임기를 위할 때만 발휘되는 것이었던 걸까. 우진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응급실에서 코까지 골며 잠에 취해있던 모습과 게임기를 손에 넣기 위해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는 모습의 대비는 주혁에 대한 반감을 더할 따름이다.

KCU은행, 2018년 배경 맞나?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tvN


주혁의 직장에도 주목해보자. 주혁과 종후(장승조 분)는 출근길에 동료 향숙(김소라 분), 혜정(공민정 분)을 만난다. 이들이 "커피를 사러 간다"고 말하자 종후는 급하게 자리를 달아난다. 이에 의문을 품던 중 주혁은 향숙, 혜정에게 카드를 내밀고 두 사람은 카드를 받으며 "팀장님과 다른 직원들은..."이라고 말한다. 주혁은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하며 또 일주일 간 삼각김밥만 먹어야한다고 투덜댄다.

여자 팀장 장만옥(김수진 분)은 직장 내에서 늘 노처녀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여직원의 군기를 잡고, 여직원들 간 편 가르기를 조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여성 캐릭터 묘사는 내가 2018년에 쓰인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게끔 했다. 그리고 공식 홈페이지에 기재된 인물 소개는 작중 묘사보다 심각했다.

이들 인물 소개에 따르면 향숙과 혜정은 쌍커피("커피 사주세요"라고 앙탈을 부려 붙은 별명) 1, 2호를 담당하고 있고, 만옥은 '자칭 골드미스, 타칭 '이모님'의 노처녀', '뒷담화도 좋아해 없던 분란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라고 한다. 이는 그간 '김치녀', '여적여'로 불리던 여성혐오적 시선을 그대로 답습함이 아닌가.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기생하려 하고 그리하여 남성을 괴롭게 만들며, 가십거리 만들기를 일삼고 이에 시시덕거리는 저급한 인물로 말이다.

종후는 어떠한가. 그의 인물 소개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 생각하는 그의 로망은 돈 많이 벌어 흥청망청 쓰며 연애를 즐기는 것', '이상형은 모르는 여자 또는 안 살아본 여자다'라고 한다.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외딴 여자와 로맨스를 꿈꾸는 이 친구는 주혁의 시점에서 문제가 없었던 걸까. 주혁이 안팎으로 아내와 상사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을 때 위로하는 그의 모습은 다정다감하며 유머러스한, 선량한 조력자로 그려질 뿐이니 말이다.

미래를 바꾼 주혁, 각성은 '나쁜 아내'로 부터?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tvN


어쨌거나 안팎으로 시달리며 살아가던 주혁에게는 어느 날 과거를 바꿔 운명을 달리 할 기회가 생긴다. 2006년의 대학생 주혁은 우진 대신 혜진(강하나 분)과 로맨스를 선택하고 혜진과 결혼해 다른 2018년을 산다. 혜진과 결혼생활은 더할 나위 없다. 더 이상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으며, 옷장 사이에 숨어 몰래 게임을 즐기지 않아도 되고, 꿈에 그리던 아침 식사 후 출근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변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딘가 찜찜하다. 혜진 부모와 주말마다 식사를 하고, 1년에 두 번씩 여행을 가야하며, 명절에는 외가에 먼저 들러야 한다는 조항 말이다. 혜진의 말에 따르면 주혁은 결혼 전 이 조건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는 주혁이 혜원에게 아무런 말없이 부모님을 집으로 모시고 오며 불거진다.

혜원의 입장에서 난데없이 들이닥친 시부모님으로 인해 그녀는 당황한다. 혜원이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키겠다",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드리겠다"고 말하자 세 사람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이어 시부모님은 "언제 우리가 시부모 대접을 받았다고... 잘 먹고 잘 살라"라며 집을 떠난다. 그들이 말하는 '시부모 대접'이란 불쑥 찾아오더라도 직접 요리한 음식을 드려야 하며 안방이라도 내어드려야 하는 걸까? 부모님이 가신 후 주혁이 "대단한 것을 원하는 게 아니지 않냐"고 말하긴 했지만 며느리 입장에서 시부모의 방문이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tvN


그렇다면 이와 같이 여성이 괴물로 변한 악처, 남성에게 기생하는 김치녀, 시댁에 도리를 하지 않는 예의 없는 아내로서 남성의 공공의 적으로 표현되는 근본적 이유가 무얼까. 답은 <아는 와이프>가 너무도 주혁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데 있다. 결혼생활로 인생이 망가진 것은 차주혁뿐일까. 어쩌면 서우진, 그녀는 더 고달팠을지도 모른다. 기혼 여성으로서 우진의 삶과 바뀐 2018년에서 싱글 라이프를 행복하게 누리고 있는 삶이 정반대로 묘사되듯 말이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주혁의 설움에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함에 비해 우진의 고단함은 덜 비춰지며, 이와 같은 장면을 비춘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심리는 오로지 분노로 표출된다.

또한 혜원은 주혁이 각성하기 위한 존재로서 '나쁜 아내'로 묘사된다. 통보도 없이 불쑥 부모님을 모셔온 주혁이 가부장적 질서를 따르는 것은 문제적으로 그려지지도 않거니와, 외려 기분이 상한 채 집 밖을 나서는 시부모님의 쓸쓸한 뒷모습은 혜원을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어른을 무시하는 여자로 보이게끔 한다.

'나쁜 며느리'로 묘사되는 혜원을 보니 주혁은 우진과의 결혼생활을 그리워할 예정인가보다. 그런데 그가 우진의 소중함을 아는 이유가 단지 '시부모를 잘 모시지 않아서', '살림살이에 서툴러서'라면 결말의 주혁은 무슨 깨달음을 얻고 변화할 것인가. 우진은 또 다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주혁은 변화한 2018년에서 결혼한 동생 주은(박희본 분)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 그녀는 "밤에 아이들이 울면 열에 일곱은 오상식이 달래. 그럴 때 마다 나는 다음에는 내가 일어나야지 생각해. 오상식은 나를 착하게 만드는 남자야"라고 말하고 이에 주혁은 우진과 결혼생활을 회상하는 듯 한 표정을 짓는다. 부디 결말의 주혁은 깨달음을 얻고 '오상식과 같은' 남편이 되어있길 바란다.

댓글2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제 아무리 대단한 가치를 이야기하더라도 '재미'가 없는 극은 그 가치를 다 하기 힘듭니다. 그것을 소비해줄 관객이 없으니까요. 재미있게 쓰여진, 그러나 그 끝에는 오래도록 되새겨질 여운을 남기는 극을 찾기 위해 오늘도 객석에 존재합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