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채시라의 연기 스펙트럼에는 장르의 제한도, 캐릭터의 경계도 없었다. 하이틴 드라마(고교생 일기)부터 묵직한 시대극(여명의 눈동자), 달동네의 평범한 소시민(서울의 달)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로 임금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대비(왕과 비)까지 어렵잖게 오가는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였다.

무엇보다 채시라는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만든 1등 공신이었다. 오랜 침체기에 빠져있던 MBC 드라마에 16년 만에 돌아온 채시라. 최근 종영한 MBC 토요드라마 <이별이 떠났다>는 채시라의 MBC 복귀작으로 기대와 관심을 끈 작품이었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 사는 것이 행복인 줄 알고 살던 서영희는 남편의 불륜으로 가정이 깨진 뒤 자신의 존재도 잃어버린다. 마지막 복수의 수단으로 남편의 재산을 틀어쥔 뒤,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둔 그는, 아들의 여자친구 정효(조보아 분)를 통해 다시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된다.

서영희의 현실감 넘치는 대사들... "엄마라 더 남달랐다"

 배우 채시라 MBC 토요드라마 <이별이 떠났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배우 채시라의 연기 스펙트럼에는 장르의 제한도, 캐릭터의 경계도 없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였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여자의 학벌과 경력은 결혼의 재물일 뿐이야. 여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과거의 일은 모두 사라져. (중략) 엄마가 된 여자는 인내심이 많은 순둥이로 변해버려."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정효에게, 서영희는 신성한 모성과, 엄마됨의 기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엄마가 되기 위해 여성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출산과 육아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그동안 어떤 드라마 속 엄마들도 해주지 않던 이야기였다.

지난 8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채시라는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고 나니, 상황을 상상하거나 대사를 따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됐다"면서 "예전에 나를 돌아보는 상황도 많았다"고 말했다.

"영희 또래의 여성들은 드라마 속 영희의 대사를 듣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 안 했을 거예요. 자신의 경험, 혹은 주변의 경험을 떠올렸겠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영희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채시라의 작품 선택 기준은 언제나 '새로움'이다. "새로운 스토리와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늘 찾는다는 그에게, <이별이 떠났다>는 그런 작품이었다. 10% 안팎의 시청률. 과거 채시라가 받아들었던 화려한 성적표에 비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성적이었지만, 채시라가 서영희를 연기하며 만족감을 느낀 이유였다.

"초반 내면의 깊은 어두움을 가진 역할이었지만, 심리적으로 밀도가 높은 캐릭터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연구하고 고민하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캐릭터가 변화하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거든요. 매력적이었어요.

다만 초반 감정 소모가 많았다면, 후반부에는 대사 밀집도가 높아서 외우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어요. 대사 외우는 일에 나름 노련함을 가지고 있는데도 입에 붙지 않을 때도 있었고요. 입에 붙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야 하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결과가 만족스러워서, 고생의 과정들이 아름답게 남을 수 있게 돼 다행인 것 같아요."

쉽고 편한 길 가지 않은 이유 

 배우 채시라 MBC 토요드라마 <이별이 떠났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채시라의 출연작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레전드로 회자되고 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올해로 연기 인생 35년 차. 쉽고 편한 길만 골라 갈 수 있는 톱스타였지만, 채시라는 쉽고 편한 길보다는 거칠고 어려운 길을 택해왔다. <여명의 눈동자> 속 일본군 위안부 윤여옥, <서울의 달>의 성공을 꿈꾸는 소시민 차영숙. 서른 살에는 사극 <왕과 비>에서 백발의 인수대비를 연기하기도 했다. 채시라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출연작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레전드로 회자되고 있다.

"<이별이 떠났다> 첫 주 방송 나간 다음에 제주도로 촬영을 갔어요. 촬영장 근처에 계시던 분들이 '방송 너무 잘 보고 있어요!' 하시는 거예요. 벌써 반응이 오는 건가 싶었는데, '서울의 달 너무 잘 보고 있어요' 하시더라고요. 최근에 케이블 방송에서 재방송 되고 있나보더라고요. 그 드라마가 1994년도에 방송된 드라마인데, 요즘 시청자분들이 다시 봐도 재밌을 만한 드라마였다는 거잖아요. 지금도 회자되는 <여명의 눈동자>도 그렇고, <왕과 비>도 그렇고... 오래된 작품도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배우로서 정말 좋은 작품에 출연했구나 싶어서 행복해져요."

<응답하라 1988>에는 "채시라가 예뻐, 내가 예뻐?"를 묻던 덕선(혜리 분)이의 대사가 나온다. 채시라는 "주변에서 문자로 보내줘 알았다"면서 "한 시대를 추억할 수 있는 한 토막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자신의 작품을 보며 위안을 느끼고 행복함을 느낀다는 팬들을 만날 때마다, 오래전 작품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누군가의 추억 한 토막에 자신이 자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는다는 채시라. 작품에 임할 때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남다른 경쟁심... "나와의 싸움에서 지기 싫다"  

 배우 채시라 MBC 토요드라마 <이별이 떠났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긴 시간, 수없이 많은 인생 작품과 인생 캐릭터를 남긴 채시라. 그런 채시라에게, <이별이 떠났다>의 서영희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채시라는 자신의 남다른 경쟁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을 싫어하고, 어려운 일을 해냄으로써 발전함을 느낀다"고. 실제로는 단거리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배우로서는 "먼 곳을 바라보며 지구력 있게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나아가고 싶다"고도 했다.

긴 시간, 수없이 많은 인생 작품과 인생 캐릭터를 남긴 채시라. 그런 채시라에게, <이별이 떠났다>의 서영희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엄마이기 전에 여자. 서영희는 독특한 상황에 놓인 독특한 캐릭터였지만, 엄마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월드컵도 있었고, 휴가철이기도 했고.... 찬바람 부는 가을에 방송됐다면 더 많은 분들이 이 드라마를 봐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하지만 요즘처럼 채널도 많고, 드라마도 많은 상황에서 이 정도면 감사한 성적이죠. 무엇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잖아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좋은 드라마, 좋은 캐릭터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inter:view 다른 기사

  • 옆으로 쓸어 넘길 수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