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붉은 수수밭> 포스터

영화 <붉은 수수밭> 포스터ⓒ Films sans Frontieres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온통 붉은 색이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붉은 색이 마치 화면을 뚫고 나올 듯이 뜨겁고 강렬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모옌의 첫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의 일부를 영화화 한 <붉은 수수밭>은 어느 일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비추며 민중의 삶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사 보다 이미지가 압도적인 영화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Films sans Frontieres


가난한 집안의 딸 추알(공리)은 나이가 많은데다가 문둥이기까지 한 양조장 주인 리서방에게 시집을 간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리고 예쁜 딸을 시집보내는 대가로 나귀 한 마리를 받는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신랑 집으로 향하는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추알은 가마꾼 유이찬아오(강문)의 상의를 벗은 건장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다.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 두 사람은 추알이 친정집에 가던 날 수수밭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고 이날 추알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얼마 있지 않아 리서방은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추알은 안주인이 아닌 동등한 노동자로 일꾼들과 함께 양조장을 꾸리며 공동체 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은 일본군에 의해 오래가지 못한다.

<붉은 수수밭>은 서사보다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렬한 영화다. 장 이모우 감독은 소설의 주제의식을 영상으로 연출해 내는 데 성공하면서 1989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 수상이라는 쾌거까지 이루게 된다. 강렬한 색감과 과감하기까지 한 극적인 미장센은 비극적인 역사의 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의 화자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추알과 유이찬아오의 손자다.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그는 1인칭의 시점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소개하는 동시에 전지적 시점에서 등장인물들 각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영화에서의 이야기 서술방식은 원작 소설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또한 영화는 정치적 신념과 사상(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은 빼버리고 일본의 침략과 농민들의 삶에 집중하고 있다.

개인을 통해 사회와 시대를 통찰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 독자 혹은 관객들은 이야기 속에서 시대를 배우고 사회를 학습할 수 있다. 특히 그리 멀지 않는 과거, 보통 사람들이 겪는 시대의 비극은 우리 삶에 보다 가깝게 다가오고 화자가 소개하는 그의 가족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역사로 기억된다.

중국에서 행운과 성공을 의미하는 붉은색은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색이다. 그래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붉은색으로 장식을 하는 것이 전통인데 영화의 첫 장면, 가마에 타고 있는 추알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치장을 하고 붉은색 가마를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이제 겨우 열여덟의 추알의 굳은 얼굴은 가마의 붉은 천에 붉게 물들어 있다. 나귀 한 마리에 팔려가는 자신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두렵고 걱정도 되지만 그녀는 펄럭이는 앞가림 막을 조심스럽게 발로 벌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웃통을 벗은 가마꾼, 붉게 그을린 유이찬아오의 건장한 몸을 호기심 있게 관찰한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녀가 당돌하고 자신의 욕망에 꽤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 민초들의 정신을 상징하는 붉은 수수밭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films sans Frontieres


추알은 솔직하고 당당하며 용감하고 강인한 여성이다. 남편이 살해당하고(화자는 리서방을 살해한 사람이 자신의 외조부, 유아찬아오일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이 죽고 어린 여자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꾼들이 양조장을 떠나려 하자 그녀는 자신도 본래 가난한 집 딸이니,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같은 일꾼으로 생각해달라고 설득하고, 일꾼들과 함께 양조장을 꾸려나간다.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상의 실천(그녀가 그것을 알고 한 것은 아니지만)이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꾼들과 추알이 함께 고량주를 빚는 과정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데 분업과 협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과 성공적인 양조를 기원하며 노래를 부르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이들의 성실하고 겸손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의 행복한 공동체 생활은 일본군이 군영 도로를 만들기 위해 수수밭을 베어버리고 자신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끝이 난다. 학살된 사람 중에는 과거 양조장에서 일했던 리오한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양조장을 떠나 공산군 게릴라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 앞에서 산채로 피부를 벗기는 고문을 당하고 죽게 된다. 추알은 거기에 겁을 먹는 대신 양조장 일꾼들과 함께 리오한을 위한 제를 올리고 복수를 다짐한다.

그녀와 일꾼들이 리오한의 복수를 다지며 마시는 붉은 수수로 만든 고량주의 색이 마치 피처럼 붉다. 원작자 모옌은 붉은 수수밭이 험난한 격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중국 민초들의 민족정신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민족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추알이다. 그녀는 결국 일본군의 총에 목숨을 잃지만 민족정신의 가치는 그녀의 남편과 아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 그러니까 그녀의 손자에게까지 이어진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Films sans Frontieres


장 이모우 감독은 본래 촬영 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했으며 북경 영화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첸 카이거 감독의 데뷔작 <황토지>를 촬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진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탁월한 영상 표현 능력은 그의 시작이 촬영이었다는 점, 그러니까 직접 카메라를 들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첫 작품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1990년대에 계속해서 명작들(역시 <붉은 수수밭>으로 데뷔한 공리와 함께 한 작품들로 중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다)을 만들어내며 거장의 이름을 굳히게 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블록버스터 영화와 잔잔한 드라마를 번갈아가면서 찍고 있는데 그의 작품에 대한 평은 예전만큼 좋지는 않다. 최근 그가 찍은 대작 영화들의 영상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붉은 수수밭>의 강렬함에 미치지 못한다. 빽빽한 수수밭을 뚫고 달리는 추알과 그녀를 쫓는 유이찬아오, 그리고 마주한 두 사람의 상기된 얼굴. 총에 맞아 피로 물든 바닥에 쓰러진 추알 위로 뜨거운 태양아래 타오르는 화염 속에 전사처럼 서 있는 유이찬아오와 아들의 실루엣은 영화가 끝나도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추신

그는 상복이 많은 감독으로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1991년 <홍등>으로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1992년 <귀주이야기>로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과 1994년 <인생>으로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상, 1999년 <책상서랍 속의 동화>로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 2000년 <집으로 가는 길>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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