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과 함께: 인과 연>의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엔 영화의 주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천년을 두고 이어온 인연, 아니 악연의 대서사였다. 그런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라 등장한 '쿠키 영상',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렇다면 지난 1편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렇다. <신과 함께> 2편이 우리의 정서에 깃들여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 두 편의 영화가 연이어 말하고자 하는 전통적 의식과 정서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신과 함께>가 동양권에서 공감대를 얻으며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웅장한 한 편의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나온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조롱'이라고? 아니다. 한반도 전 지역에 걸쳐 전해지는 전설, 설화, 민담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전설의 고향>은 1977년 이래 1989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이어진 스테디셀러였다. 그리고 사라진듯했던 이 시리즈는 1996년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반가운 납량 특집이 되었다. 올 여름도 어디 <전설의 고향>같은 드라마 안하나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한 시리즈가 이렇게 꾸준히 끈질기게 사랑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저력이 입증된다.
중생의 삶<전설의 고향>하면 귀신이 연상되지만, 사실 여기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귀신'이 아니라, 죽음이다. <전설의 고향> 속 많은 이야기들이 죽음의 경계조차 허무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를 흔히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물론 폭넓게는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중생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 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발할 말이지만, 불교에서의 인간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10가지, 다시 분류하면 33가지, 거기서 다시 세밀하게 분류되면 3000가지의 세계 중에 '하치'에 속하는 세계다. 이들은 아직 삶에 초연하지 못하고 자신의 업력, 이른바 업보에 휘둘려 '고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 <신과 함께: 인과 연>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 고해의 시작은 대부분 탄생, 즉 어미와 아비와의 인연으로 부터 시작된다. 물론 <신과 함께: 인과 연>에서 보이듯이 그 인연은 거슬러 전생의 업보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과 함께> 1펴은 저승 세계의 귀인이 된 수홍의 형 김자홍(차태현 분)의 저승 재판으로 부터 시작된다. 김자홍은 어쩌면 떡밥에 불과했다. 그의 재판이 진행되는 곳곳마다 등장하는 악귀인 동생 수홍(김동욱 분)의 억울한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결국 불쌍한 중생이 될 수밖에 없는 형제와 가난한 어미의 슬픈 사연으로 귀결된다.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그래서 두 아이를 거두기엔 역부족이었던 어미가 없었다면 고달프게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던 자홍의 삶도, 여덟 번의 재수 끝에 사시 1차를 패스했으나 결국 군 의문사한 수홍의 죽음도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소방관이라는 직업 정신도, 군의문사도 효라는 전통적 관계에 흡수시켜버린다. 그리하여 김자홍과 수홍의 삶은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곡하는 신파의 정서로 기능해야 했다. 이런 방식은 억울하게 죽어 저승조차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다 인간 세상의 일이 된 <전설의 고향> 속 서사 구조, 나아가 우리 고유의 설화 속 세계관을 고스란히 잇는다. 즉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친숙하고 이물감 없는 정서로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는 증거기도 하다.
아들의 업눈물로 흥건한 신파로 귀결됐던 1편과 달리, 2편의 서사는 장중하다. 환생을 소망했던 세 명의 저승 차사. 이제 그들은 한 명만 더 환생 시키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자신들의 환생'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유독 세 명 중 강림(하정우 분)은 자신의 차사 직까지 걸며 1편에서 악귀였던 김수홍의 환생에 적극적이다.
2편의 일부 설정은 1편과 이어진다. 아마도 이번 역시 천만관객 동원이 예상되는데 바로 이 엇물리는 저승과 현생의 절묘한 콜라보가 가장 큰 재미 요소이지 않을까 싶다. 2편에선 강림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김수홍 재판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과정과, 성주신의 훼방을 막고 허춘삼 노인의 목숨을 거두고자 현생으로 간 해원맥(주지훈 분)과 덕춘(김향기 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허춘삼 노인의 생명을 성주신이 원하는 시기까지 연장시키는 대신 해원맥과 덕춘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자 일종의 거래를 한다. 그 거래를 통해 조금씩 밝혀지는 세 차사들의 과거 인연과 저승 재판에서 활약하는 강림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하나의 비극을 꿰어 맞추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해원맥의 비극적 서사는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지만, 과연 해원맥의 비극에 강림의 인간적 정서가 드리워져 있지 않다면 그토록 극적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영화는 두 남자의 운명을 씨실과 날실로 드라마틱하게 직조한다.
▲ <신과 함께: 인과 연>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천 년 전 악연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한 이들이 과연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그 인연의 끝을 다하게 할 것인가.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예상했던 비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했다. 그 악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업보의 결자해지로 향한다. 전설과 설화를 관통했던 불교적 세계관의 고갱이는 바로 결자해지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자신을 얽어매었던 인과 연의 사슬을 스스로 풀어내야만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영화는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오랜 시간 인간의 터전을 지켜보아왔던 성주신은 정의한다. '인간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라고. 서로의 악연은 이해로,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육친의 죄를 저질렀던 강림은 49번 째 환생의 사슬을 풀어냄으로써 스스로 그 죄의 굴레를 풀어낸다. 제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전래의 인간 중심주의 또한 환기시킨다.
아버지의 업그렇게 장대하게 마무리된 영화는 쿠키 영상을 통해 서사의 각도를 튼다. 이 모든 천년의 서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새롭게 각인되는 것이다. 1편이 결국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용해되었듯이, 2편의 세 차사가 서로의 악연의 끝에서 만난 건 아버지였다. 결국 1편에 이어 2편을 통해 영화는 우리의 많은 인과 연의 근원이 '가족'에 있음을 확인해준 셈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랐다. 1편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은 눈물이었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눈물에 그들의 삶을 던졌다. 반면 2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들을 던진다. 그래서 비겁했고 비열했으며, 심지어 누군가의 목숨을 거두는데 거침이 없었다, 가부장의 세계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속살을 그렇게 영화는 드러낸다.
▲ <신과 함께: 인과 연>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어머니의 눈물이 화해와 평화로 귀결되었다면, 아버지의 존재는 갈등과 경쟁을 부추겼다.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를 설명한다. 그 용서할 길 없는 피비린내 나는 피의 세계의 가능성은 '또 하나의 어머니' 덕춘이가 연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는 만나고 엇갈리며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희생'으로 해소된다.
천년의 시간을 들여 아들이 자신의 손으로 업보를 풀어내기를 기다려주고,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방식은 한편에서 보면, 마치 벼랑 아래로 사자 새끼를 내던져버리는 아비 사자와 같은 서늘함이 있다. 천년을 내내 기억을 잃지 않고 고통스러워하며 49번째의 환생을 향해 묵묵히 걸어왔을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는 천 년 전 그날 자신의 부대를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큰 아들을 전쟁터의 선봉에 세우지 않았던 그 아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아비의 세계, 아비의 업, 그리고 아이러니한 아비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