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교실에서 가장 활발한 '보이 디럭스'. 카메라를 향해 '스웩'을 뿜어내고 있다.

랩 교실에서 가장 활발한 '보이 디럭스'. 카메라를 향해 '스웩'을 뿜어내고 있다. ⓒ 이희훈


 네츠 루카는 자신이 쓴 가사로 랩을 했다. 친구와 놀때는 목소리가 터질듯 큰 목소리지만 랩하는 목소리는 어떨까?

네츠 루카는 자신이 쓴 가사로 랩을 했다. 친구와 놀때는 목소리가 터질듯 큰 목소인데 랩을 할 때는 어떨까? ⓒ 이희훈


 'MC불지옥'이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MC불지옥'이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 이희훈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어 / 모르는 아줌마가 어디서 왔녜 / 나는 한국에서 왔다 했어 / 근데 안 믿어 그래서 짜증났어 / 그래서 무시하고 놀러 갔어" (슬링키)

"나는 자랑스러운 나 / 나는 한국 사람 / 얼굴 검은색이어도 / 한국 너무 좋아" (보이디럭스)

"한국은 북한이랑 / 갈라져 있지만 / 통일이 되면 나는 / 북한에서 행복하게 살 거다" (늑대인간)

아이들이 마이크를 잡고 랩을 하기 시작했다. 강당에 힙합 비트가 쿵짝쿵짝 깔리자 아이들은 랩 가사가 적힌 공책을 들고 한 명씩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들었다.

이 '초등래퍼'들은 마치 <쇼미더머니>에 나온 가수들처럼 양 손을 번갈아가면서 쭉 뻗고 랩을 했다. 라임(rhyme)이 딱딱 맞지도 않았고 랩도 서툴지만 마이크를 든 폼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학교를 마친 뒤 시작되는 또 다른 배움

'다문화 특구'로 유명한 경기도 안산에는 '국경없는마을'이라는 다문화 가족 지원 NGO가 있다. 국경없는마을에서는 방과 후 학교 수업 중 하나로 랩 수업 '너를 보여줄 RAP'을 진행한다.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직접 랩 가사를 쓰고 노래는 만드는 수업이다. 정규 학교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속속 안산 원곡동 국경없는마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고 또 다른 배움의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 12일 국경없는마을의 랩 수업을 찾았다.

"얘들아 인종 차별이 뭔지 알지? 흑인에게 피부가 검다고 놀리면 그게 인종차별인 거야. 외모와 특성을 갖고 조롱을 하는 건 인종차별인 거야."
"네 알고 있어요!"

 랩퍼 시원한형이 슬랭키가 랩 가사 쓰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랩퍼 시원한형이 슬랭키가 랩 가사 쓰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 이희훈


 네츠 루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랩의 소재로 삼았다.

네츠 루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랩의 소재로 삼았다. ⓒ 이희훈


 자신의 꿈이 담긴 랩 가사. 랩 가사를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자신의 꿈이 담긴 랩 가사. 랩 가사를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 이희훈


랩 수업시간, 8명의 학생들은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주제에 대해 랩 가사를 쓰고 있었다. 수업 중 유명한 가수들의 비트가 깔리면 학생들은 춤을 추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자유분방함을 뽐냈다. 전체적으로 떠들썩하고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들은 유쾌한 랩 가사를 완성해낸다. 한국에서 겪은 인종차별이나 한국에 대해 자유롭게 떠오르는 걸 가사로 담는 식이다.

슬링키, 보이디럭스, 늑대인간, 네츠루카 등... 태어났을 때부터 불리던 이름이 아닌 스스로가 만든 '랩 네임(Rap Name)'을 갖고 진행되는 랩 수업 시간. 북한에 가보고 싶다는 랩 가사를 쓴 '늑대인간'은 "왜 북한에 가고 싶으냐"고 묻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라는 소감을 남겼다.

꺄르르 꺄르르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교사들의 혼을 쏙 빼놓은 이들은 보통의 초등학생·중학생처럼 보이지만 '랩은 죽지 않아'라는 활동명 아래 'I Like It'이라는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출시까지 한 실력자들이다.

안산을 배경으로 주변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수,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전개되는 'I Like It' 뮤직비디오는 학생들의 유쾌한 시선을 잘 보여준다. 수업 시간에는 볼 수 없는 의젓하고 진지한 학생들의 모습이 담겼다. 이들은 안산 다문화축제인 '시끌북적 축제'와 '한국다문화학교 후원의 밤'에서 'I Like It' 공연을 선보였다. 오는 8월부터 'I Like It'은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얘들아 이제 너네 앨범 나온대. 8월 14일부터 음원 사이트에 올라가서 'I Like It'도 들을 수 있어."

교사 비선형씨의 말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거나 "친구가 알면 놀릴 것 같다"면서 수줍게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이들은 이제 'I Like It'에 이어 그 다음 프로젝트로 한국,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랩을 준비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기서 유명한 뮤지션이 나올 수도 있다"

 다문화학교 랩교실 <너를 보여줄 RAP>을 가르치고 있는 래퍼 (왼쪽부터) 시원한 형, 뮤지션 동시성과 비선형.

다문화학교 랩교실 < 너를 보여줄 RAP >을 가르치고 있는 래퍼 시원한 형, 뮤지션 동시성과 비선형(왼쪽부터). ⓒ 이희훈


 친구와 다퉈서 마음이 토라진 경찬이를 위로 해주는 선생님 비선형.

친구와 다퉈서 마음이 토라진 경찬이를 위로 해주는 선생님 비선형. ⓒ 이희훈


 네츠루카가 직접 쓴 가사로 랩을 하는 동한 래퍼 '시원한 형'(가운데)이 비트를 맞춰 부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뮤지션 동시성이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네츠루카가 직접 쓴 가사로 랩을 하는 동한 래퍼 '시원한 형'(가운데)이 비트를 맞춰 부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뮤지션 동시성이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 이희훈


힙합 뮤지션 '시원한 형'은 평소 다문화 가족의 인권에 관심이 많아 이번 힙합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에게 돌아오는 돈은 0원이다. "공과금이 밀려있지만"이라면서 웃던 시원한 형은 "여기서 나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을 어떤 방식의 예술로든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어린 시절, 조금 다른 외모로 인해, 다른 혈통으로 인해 차별을 받는 어린이들에게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기 자신을 랩으로 표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래퍼 시원한 형)

여기에 보조 강사로 부부 뮤지션인 비선형과 동시성씨까지 합류해 3명의 강사진이 완성됐다. 이들은 정부의 예술인 복지 정책 중 예술인파견지원으로 국경없는마을의 '한국다문화학교'에서 만나 서로 인연을 맺었다. 시원한 형의 제안으로 이들은 다문화 래퍼 교실을 조직했고 '춤추는 제자리표'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중이다.

동시성은 "'I Like It'을 아이들과 같이 만들어봤는데, 한 번 만난 걸로 끝나기에는 아쉽더라.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고 한 번 활동을 끝내고 '이제 안 와요?'라면서 서운해 하기에 시즌2로 계속 이어나가보자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수업 진행 자금이 부족해 지난 24일까지 7백만 원 목표로 후원자 모집 스토리펀딩을 열었지만 40만 원 모금에 그쳤다. 이후에도 자체적으로 다문화 랩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모금을 구상 중이다.

"정말 되게 잘 하는 친구들도 있다. 흑인 아이였는데, 처음부터 프리스타일 랩을 하더라. 진짜 재능이 있구나, 우리가 그 재능을 키워줄 필요가 있겠구나, 여기서 뮤지션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성)

"보이디럭스가 그런다. 나는 한국인이고 검은 피부가 너무 좋다고. 검은 피부인 것을 차별로 느끼는 게 아니라 특별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거다. 검은 피부의 한국인도 있고, 한국인이라는 경계가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예술과 음악은 장벽을 넘어 사람을 하나로 통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비선형)


 '카우보이6.7'은 활발한 아이들과 반대로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지하게 가사를 써내려갔다.

'카우보이6.7'은 활발한 아이들과 반대로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지하게 가사를 써내려갔다. ⓒ 이희훈


 <너를보여줄RAP>의 초딩 래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다.

< 너를보여줄RAP >의 초딩 래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다. ⓒ 이희훈


< K팝스타 >로 처음 얼굴을 알려 지난 4월 <복면가왕>에도 나왔던 1991년생 이미쉘이나 윤미래, 인순이 역시 편견을 딛고 한국 가요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가수들이다. 지금 국경없는마을에서 랩을 배우는 학생들 역시 미래의 뮤지션이 될 수 있다. 교사들은 모두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시원한 형은 "요즘 힙합이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런 힙합을 답습하는 게 아니다"라며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자기 표현은 오히려 다른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또 힙합은 단순히 라임을 맞추는 음악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이 진짜 쓰고 싶은 가사를 쓰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음악이라고 덧붙였다.

"랩이라는 형식이 있기 전에 랩을 통해 표현하는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랩은 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영화 <변산>의 래퍼 '심뻑'(박정민 분)이 자신의 고향 변산에 대한 이야기를 랩으로 만들어 당당히 선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들이 언젠가 관객이 있는 무대에 설 날을 기다린다.

 다문화학교 랩교실 <너를 보여줄 랩>의 학생들과 선생님 '우리는 초딩 래퍼'

다문화학교 랩교실 < 너를 보여줄 RAP >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모습 ⓒ 이희훈



덧붙이는 글 단체 춤추는 제자리표 홈페이지 및 후원 문의: http://dancingnatural.net/
다문화가정 힙합 쇼미더머니 국경 없는 마을 시원한 형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