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인간성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인간성 중에서 '부모됨'을 묻는 영화다. 작품은 마키아(이와미 마나카 분)라는 요르프족 소녀가 부모 잃은 아이를 거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아이를 키우고 떠나보내는 게 작품의 주요 서사다. 그러나 이것은 심층적인 플롯이고, 표면적인 플롯은 마을을 침공한 '메자테' 왕국에 끌려간 친구 '레일리아(카야노 아이 분)'를 구하는 것이다. 처음에 마키아는 부모가 된다는 것 말고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나, 우연히 만난 어릴적 친구를 통해 '레일리아'를 구한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게 된다. 영화는 이 두 가지 플롯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

먼저, 플롯을 분석하기 전에 작품 속 설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의 종족인 '요르프'는 인간과는 달리 수백 년을 산다. 말하자면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엘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별의 일족'이라고 불린다. 수명이 워낙 길어서 다른 동식물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는 둥 무척 폐쇄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외부인을 사랑하는 것은 금물이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보다 먼저 떠나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베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초월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들은 고대부터 살아왔고, 이미 멸종해버린 다른 종족을 기리며 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스스로를 '고대의 존재'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호칭에서 그들의 시간관이 현세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보다 더 길어서, 인간 기준으로 돌아가는 세상보다 느리게 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는 어떤 일이라도 인간보다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태어나 주어진 시간이 많으니 자신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이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삶의 여유가 생기면 남을 도울 여유도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런 여유 속에서 수많은 이별을 보았고, 관찰했다.

그러니 아마도, '히비오르'라고 불리는 베를 짜는 것은 주어진 수명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그들 나름의 고민으로 보인다. 그들은 히비오르를 짜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데, 요르프 족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히비오르에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히비오르란 물질적으로 마음을 보관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히비오르는 그저 단순하게 메시지만을 품는 게 아니다. 옛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베를 짜던 아라크네는 신의 형벌을 받아 거미로 영생을 살았다. 견우와 직녀 설화에서 직녀는 칠월칠석까지 베를 짜며 기다렸다. 이처럼, 베를 짠다는 건 오랜 시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베를 짠다는 행위에 마음을 전하는 게 합쳐진 '히비오르'란 '오래된 마음'을 뜻하게 된다.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여기에 동양의 붉은 실 설화를 떠올려 보면 히비오르의 메시지는 강화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붉은 실 설화는 오랜 시간을 뜻하는 베짜기와 결합해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도 쓰이곤 한다. 붉은 실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라면, 이 실들이 한데 엮인 베는 거대한 인연 덩어리이고, 그걸 스스로 완성한다는 건 자신의 힘으로 만든 인연을 뜻한다. 그 인연 덩어리가 바로 인생이기에, 히비오르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게 된다. 주어진 수명을 이렇게 쓰겠다는, 내 운명이 바로 이것이라는 다짐이 있다.

여기에, 생물과는 달리 베는 수명이 없으므로 망가지지 않는 한 계속 남아있는다. 말하자면, 긴 수명을 사는 요르프 족도 언젠가는 죽지만 히비오르는 사후에도 남는다. 이것은 인간보다 긴 수명을 사는 요르프 족에게도 '영원'이라는 개념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들이 믿는 내세적 시간관을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히비오르가 후대에 전해져 후손들에게 읽혀진다면 그 히비오르의 주인은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이곳에 메시지가 있기에, 그 메시지는 주인의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

이때, 몸은 없어도 마음만큼은 시간을 떠다닌다는 점에서 윤회라던가 환생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자식이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부모는 자식을 통해 '윤회'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식이 자신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자식을 키우는 건 자신을 키우는 것과도 같다. 이런 맥락에서 '부모됨'이란, '내' 삶의 목표이자 정해진 운명이다. 즉, 영화는 히비오르의 불변성, 영원성, 속박성 등을 모성애와 결합하며 '부모됨'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마을을 잃고 도망쳐 나온 마키아가 자살을 각오한 와중에 고아가 된 아기를 발견하며 한 대사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먼저 당시 상황을 보면, 일족의 과거가 불타는 마을 속 히비오르와 함께 사라졌고 이제 그녀는 운명, 시간, 삶 등이 마을과 함께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 앞으로의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기도했다. 그런데 이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아기를 발견한 그녀는 아기에게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이제 네가 나의 히비오르야"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슨, 도망쳐 나오며 사라진 히비오르를 아리엘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가 아리엘에게 한 말은 앞으로의 삶은 아리엘을 위해 살겠다는 쯤으로 해석된다. 그 다짐은 히비오르처럼 영영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라는 것, 부모가 부모 역할을 하는 건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이 모든 건 시간 아래에 정해져 있었다고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인간과 비인간의 부모관계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유전자를 물려준 것도 아니고 같은 생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그와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게 생물종이나 유전자인데, 자녀는 자랄수록 자신과 부모의 차이를 점점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어떠한 선천적 접점도 찾을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출생의 비밀', 왜 나는 부모와 다르냐고 묻게 된다. 단지 자신을 키워주었다는 후천적인 접점만이 있다.

이때, 이 후천적인 접점은 그들이 시간을 공유했기에 생성된다. 이를테면, 친구와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느냐에 달렸다. 즉, 친구는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부모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와의 유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느냐에 달렸다. 즉, 부모는 처음부터 부모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부모관계에서 생물학적 동일성과 같은 '선천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도 부모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마치, 입양한 아이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때, 이 시간의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모관계는 성립하기 힘들다. 기러기 아빠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어색함을 겪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에서 주인공 '큐타'는 부모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양부모'를 만나게 된다. 그는 수인 형태의 괴물이었지만 큐타와 시간을 보내며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난다. 그 영화는 큐타가 양부모를 떠나 친부모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끝난다. 말하자면 시간을 함께한 후천적 부모와 생물학적으로 같은 선천적 부모를 모두 품게 된다.  

그렇지만 마키아는 둘 다 아니다. 마키아와 아리엘은 요르프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차이가 있고, 수명의 차이로 모든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한다. 마키아는 아리엘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고, 그 후로도 수백 년을 살 것이다. 말하자면, 시간의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는 자신이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라며 자책한다. 즉,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바로 마키아가 부모됨을 깨닫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가 시간의 공유를 깨닫는 과정이다.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이 영화의 장점이 바로 그것으로, 기존의 '인간-비인간' 사이의 부모관계를 다루는 작품들과는 달리 시간의 단절을 끌어냄으로써 부모됨이 영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아기를 발견할 당시 마키아의 나이는 15살로, 갓난아기였던 아리엘이 늙어 죽을 때 그녀의 나이는 100세를 조금 넘긴다. 수백 년을 사는 요르프 족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 무척 많으니 흘러가는 시간 아래에 아리엘과의 추억을 잊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늙지 않으므로 시간이 멈추었다 해도 무방한데, 자신 이외의 것들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산다. 말하자면, 그들의 긴 수명은 인간과 다른 시간관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별의 일족'이며, 그들이 히비오르로 정체성을 확보해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키아의 마음은 아리엘을 발견할 당시 그대로이지만 아리엘과 함께한 시간들은 잊혀진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자세히 답하지는 못해도 좋았다 나빴다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기억은 후퇴하되 감정만이 남는 이 상황은 내적 시간과 외적 시간이 다른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생각하는 것만큼'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거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거나. 요르프 족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시간관과는 다르고, 이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변의 가치로 여기는 '부모됨'이 정말로 절대적인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여기에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부모관계가 시간 공유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시간 '자체'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부모와 자녀 사이의 시간이 다르다면 그 관계는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까?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는 시간을 거슬러 자녀의 죽음을 먼저 목격한다. 그건 블랙홀이라는 후천적 요소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쿠퍼는 5차원 공간에서 시간을 관통하는 '부모됨'을 깨달았다. 그래서 쿠퍼는 자식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간이 삶을 관통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시간이 세계에 만연해 있다면 죽은 자식과의 추억도 사라지지 않고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마키아는 오랜 수명으로 자녀의 죽음을 먼저 목격한다. 그건 종족의 차이라는 선천적 요소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마키아는 히비오르에서 시간을 관통하는 '부모됨'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키아는 '이별의 일족'임에도 슬픈 이별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히비오르처럼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붙잡는 것이므로 죽은 자식을 제 손으로 떠나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건 단순히 시간을 함께하는 게 부모관계를 결정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의 논의에 따르면, 어느 한쪽의 수명이 길어 어느 순간 이별을 맞이해야만 하는 이들은 부모관계가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이때, 물리적인 시간을 개인의 내면으로 옮긴다면 단절을 피할 수 있다. 이 물리적인 시간의 균열은 아마도 히비오르 천을 만들 때 나타나는 그물 모양일 것이다. 말하자면, 히비오르를 만드는 건 시간의 단절을 메꾸는 행위다. 그래서 히비오르란 영속성을 상징하며, 그것에 부모됨을 투영한 마키아는 이별하지 않는 부모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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