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만을 기억하는 역사보다 가슴을 울린 감동이 진할 때가 있다. 동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는 '크로아티아'란 이름이 새겨졌다. 크로아티아는 2018 FIFA(국제축구연맹) 러시아 월드컵이 남긴 최고의 선물이다. 

크로아티아가 16일 오전 0시(아래 한국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와 맞대결에서 2-4로 패했다. 크로아티아는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투혼을 불살랐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은 프랑스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전반전에 승부를 걸었다. 크로아티아가 16강전부터 3연속 120분 혈투를 치렀지만, 프랑스는 이번 대회에서 연장전에 돌입했던 경기가 한 차례도 없었다. 시작부터 공격적인 대형과 압박, 빠른 패스를 줄기차게 시도한 이유였다. 전반전에 어떻게든 우위를 점해 지키는 축구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크로아티아를 외면했다. 크로아티아는 주도권을 잡고 상대 골문을 여러 차례 위협했지만, 선제골은 프랑스의 몫이었다. 석연찮은 주심의 판정이 앙투안 그리즈만의 프리킥에 이은 마리오 만주키치의 자책골로 이어졌다. 이반 페리시치의 동점골이 터졌지만, 핸드볼 반칙에 의한 페널티킥으로 다시 한 번 균형이 깨졌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격을 전개하던 전반전과 달리,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1골의 열세가 전하는 심리적인 부담까지 극에 달했다. 결국, 폴 포그바와 킬리안 음바페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승부가 갈렸다. 위고 요리스 골키퍼의 실수를 놓치지 않은 만주키치가 만회골을 터뜨렸지만,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로아티아', 2018 러시아 월드컵이 남긴 최고의 '선물'

그런데도 '패자' 크로아티아가 20년 만에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승자' 프랑스보다 가슴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이번 대회에서 보인 열정과 투혼이 승리란 결과물보다 가치 있었고,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 축구팬들에게 이 모습은 낯설지가 않았을 듯하다. 크로아티아는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가슴 속 깊은 추억을 꺼내 들게 만들었다. 모두가 행복했던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순간 말이다.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우리가 조별리그 1위로 16강에 진출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파하며 4강에 올랐다. '전차군단' 독일에 패하며 우승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당시의 우리는 '패자'가 아닌 '승자'로 기억된다.

크로아티아도 그랬다. 20년 전,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 4강 신화를 이룩한 이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본선 무대는 꾸준히 밟았지만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하는 때가 잦았다. 유럽 정상급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은 즐비했지만, '다크호스' 이상을 향해 나아가기에는 2% 부족한 느낌이었다.

 2018년 6월 2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와 크로아티아의 러시아 월드컵 D조 2경기 당시 장면.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크로아티아의 이반 스트리니치와 마르셀로 브로조비치를 상대로 경기하고 있다.

2018년 6월 2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와 크로아티아의 러시아 월드컵 D조 2경기 당시 장면.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크로아티아의 이반 스트리니치와 마르셀로 브로조비치를 상대로 경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전, 크로아티아가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에 도달할 것이라 예상한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 '슈퍼 이글스' 나이지리아,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지난 대회 준우승팀 아르헨티나, 유로 2016에서 8강 진출을 일궈냈던 아이슬란드와 속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한 이가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크로아티아는 기록과 경험을 토대로 한 인간의 예측이 미래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조별리그에서 3연승을 내달리며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2차전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는 무려 3-0으로 완파했다. 그런데도 크로아티아의 결승 진출을 예상한 이는 늘지 않았다. 기복 있는 경기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덴마크와 치른 16강전, 개최국 러시아와 맞붙은 8강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루카 모드리치와 이반 라키티치, 만주키치 등을 앞세워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확실하게 승리를 거머쥐지 못하는 모습이 의문을 밀어내지 못했다. 52년 만의 우승 꿈에 부푼 잉글랜드와 만난 4강전까지가 한계라 봤다.

우리가 2002년에 그랬듯이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랐고, 로테이션이 불가피했다. 상대는 체력적인 여유가 있었고,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우위에 있었다. 선제골도 상대의 몫이었다. 체력적인 부담에 심리적인 압박이 더해지면서, '여기가 끝이구나. 그래도 잘 싸웠다'란 구호가 떠올랐다.

 2018년 7월 12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준결승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경기.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가 결승골을 득점한 뒤 환호하고 있다.

2018년 7월 12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준결승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경기.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가 결승골을 득점한 뒤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겨냈다.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추가 실점을 막았고, 동점골을 터뜨렸다. 외면하고 싶었던 연장전에 돌입했지만, 승리까지 가져왔다. 3연속 120분 혈투를 치른 팀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만주키치의 극적인 결승골은 현실을 외면하는 축구의 매력을 모조리 뿜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 대단하다. 우리의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아름다운 추억에는 아쉬움도 담겨있다. 우리는 50년 안에 2002 한-일 월드컵의 영광을 재연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당시의 대표팀이 독일을 잡았더라면 더 위대한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해볼 수밖에 없다.

크로아티아가 잉글랜드를 무너뜨렸을 때, 2002년 독일전(4강)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날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랐지만 상대보다 한 발 더 뛰며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이 대리만족을 불러왔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은 감동까지 전해줬다. 자신도 모르는 새 낯선 크로아티아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면, 최소한 후회는 남지 않는다. 대한민국과 스웨덴의 맞대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억울한 것은, 우리가 준비해온 것과 능력을 내보이지도 못한 채 아쉬운 결과를 맞이할 때였다. 크로아티아는 추억과 감동을 안겼을 뿐 아니라 교훈까지 전했다.

 2018년 7월 12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준결승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경기. 크로아티아의 미드필더 루카 모드리치가 팀의 승리에 기뻐하고 있다.

2018년 7월 12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준결승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경기. 크로아티아의 미드필더 루카 모드리치가 팀의 승리에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4년 후를 기약하며 막을 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이 대회의 승자는 아니지만, 크로아티아가 전한 선물을 간직할 이는 무수히 많다. 무엇보다 그들이 흘린 땀과 열정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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