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2018) 개막작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1974) 한 장면

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2018) 개막작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1974) 한 장면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장-다니엘 폴레(1936-2004)의 <질서>(1974)는 1903년부터 1957년까지 나병(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했던 그리스 스피나롱가 섬에 관한 에세이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 오프닝에서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 같은 화자는 과거 누군가의 별장이 있었던 듯한 한적한 섬 풍경을 보여주며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이 이 섬에 억울하게 갇혔었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 되었기에 외딴 섬에 갇히는 징벌을 받게 되었을까. 이윽고 스피나롱가 섬에 갇혔던 한 남자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그 섬에 갇혔던 사람들의 정체를 알게 된다.

1900년대 당시 세계적으로 통용된 한센병 치료법은 외딴 섬에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도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했던 소록도가 있다. 한센병 환자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격리시킨 건, 전염에 대한 위험 때문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연구 결과를 통해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정확한 감염 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한센병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다.

문둥병(과거 한센병을 지칭)에 걸렸다는 이유로 외딴 섬에 격리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은 현대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하염없이 죽음 만을 기다리는 운명에 처한다. 완벽한 격리와 차별 앞에 항거한 스피나롱가의 한센병 환자들은 그토록 원하던 대로 섬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육지에서의 새 삶은 또다른 창살없는 감옥의 연장이었다.

 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2018) 개막작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1974) 한 장면

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2018) 개막작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1974) 한 장면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영화의 주요 증언자로 등장 하는 에파미논다스 레문다키스(1914-1978)는 1936년 스피나롱가 섬에 격리 수용된 이후, 섬에 거주하는 한센병 환자들과의 연대를 조직하고 환자들의 인권신장에 앞장선 인물이다. 한센병 판정을 받는 순간 투표권도 박탈 당해야 했던 사람들은 꾸준히 자신들이 응당 누려야 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주장했고, 그들의 투쟁 덕분에 스피나롱가 섬에는 극장과 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57년 스피나롱가 섬에 격리 수용된 환자들이 아테네의 한 병원으로 이송된 이후, 섬에서 잠시나마 누릴 수 있었던 이들의 자유는 다시금 박탈된다. 환자들은 무조건 격리, 수용 시켜야한다는 그럴싸할 논리 앞에 외딴 섬에 강제로 끌러간 사람들은 육지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한다. 그들은 가족도 만날 수 없었고, 교회, 식당, 학교의 출입 또한 엄격히 제한되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육지로 귀환한 환자들을 선뜻 반겨주는 이 없었다.

1974년 촬영 당시, 폐허가 된 스피나롱가 섬의 풍경과 이 섬의 생존자 레문다키스의 증언을 번갈아 보여주는 영화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 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정부와 사회의 외면을 받은 이들이 소리소문도 없이 죽어나간 사실을 넌지시 알린다. 레문다키스는 아테네의 병원에 입원한 지금보다 과거 스피나롱가 섬의 삶이 더 그립고 좋았다고 회상한다. 그래도 스피나롱가 섬에서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이긴 하지만 섬 안에서 만큼은 그들만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육지에서의 삶은 그 모든 것이 창살없는 감옥이다. 심지어 스피나롱가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내보낸 정부와 사회는 스피나롱가 섬의 이름은 물론 과거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까지 지우고자 한다.

 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2018) 개막작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1974) 한 장면

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2018) 개막작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1974) 한 장면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육지로 돌아온 환자들을 더욱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이들을 향한 동정과 차별, 혐오의 시선이다. 환자들은 자신들 역시 한센병에 걸리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레문다키스는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불쌍하다는 말을 건넨다. 죽음의 공포와 혐오와 차별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 한센병으로 시력을 잃은 레문다키스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시대. 그 어떤 누구도 혐오와 차별의 기제 앞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계열 영화인으로 분류 되긴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영화에 대한 시선과 문제의식을 가진 시네아스트로 평가받는 장-다니엘 폴레의 <질서>는 지난 12일 열린 제15회 서울국제실험영화패스티벌(EXiS 2018)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질서 장-다니엘 폴레 한센병 영화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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