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감독 신작 변산 포스터 음악과 영상이 잘 조화된 영화

▲ 이준익감독 신작 변산 포스터 음악과 영상이 잘 조화된 영화 ⓒ 영화사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말은 러닝타임 내내 가장 많이 나온 위 시구였다. 전북 부안 변산에는 우리나라 서해를 대표하는 변산국립공원이 있고, 채석강이나 격포 같은 아름다운 바닷가 여행지도 있다. 거기에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로 시작하는 절창을 쓴 여류문인 매창도 있고, 신석정 시인도 있다. 현실이 이러니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옛날부터 '생거부안'(生居扶安 살아서는 부안)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결코 부족하지 않은 땅임을 말해준다.

앞의 딴죽은 필요없는 딴죽일 뿐,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은 미덕이 많은 영화다. 독립영화 같지만 시종일관 화면을 채우는 장면들은 넓고 편안하다. 주인공 학수(박정민 분)가 부르는 랩은 물론이고, 영화 속에 녹아있는 다양한 음악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주인공 학수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자신을 돌보지 않는 건달 아버지로 인해 서울에서 빡센 인생을 사는 무명 래퍼다. '쇼미더머니' 6년 개근 출연자인 그는 이번에도 즉석 주제로 나온 '어머니'에 막혀 결국 탈락을 맛봐야 한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오고,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고향인 전북 부안군 변산으로 향한다. 10년 만에 찾은 그에게 고향은 녹록지 않다. 여전한 오기를 가진 아버지와 어릴 적 자신이 괴롭혔던 친구 용대는 지역 건달이 되어서 그를 맞이한다. 거기다 그를 짝사랑하던 선미, 그리고 자신의 시를 훔쳐서 등단까지 한 과거 교생이었던 현직 지역신문 기자 원준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우르르 그를 맞이한다. 모두 괴로울 뿐이다. 당장 떠나고 싶지만, 경찰이 그를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의심하면서 발까지 묶인다.

영화는 그렇게 아름답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상처를 통해 학수가 자기 자신을 만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개인적으로 영화가 더 흥미로웠던 이유는, 부안과 몇 년간 인연을 맺은 나에게 다양한 상을 하게 해주었다기 때문이다. 우선 건달 출신인 학수의 아버지와 학수의 갈등은 지금도 만나는 이 지역 출신 한 친구를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안군 같은 군 단위에는 이제 조폭 등으로 많이 어지럽혀진 폭력계가 있지만, 유년시절 시골에서 힘깨나 쓰던 건달 이웃이 있었다.

그들은 학수의 아버지처럼 가정을 건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떠돌았다. 그들은 행세도 했지만 정권의 부침에 따라 고난도 당하면서 지역 사회의 권력 구도의 한축을 차지했다. 영화에서 조금 미화가 되기도 했지만, 이런 흐름은 용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지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이들은 의리라는 것을 아직 간직한 사람들이다.

이런 지역에서 힘쓰는 양아치들보다 더 위협적인 사람은 영화 속 부안 주재기자로 나오는 '최원준' 같은 인물이다. 젊어서는 제자이자 후배의 '시'를 훔치고, 나중에는 알량한 권력을 이용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8일 검찰이 청탁금지법위반·보조금 횡령 등 혐의로 전북지역 언론인 26명을 재판에 넘겼는데, 영화 개봉 즈음에 일어난 사건이라 볼 수 있을 만큼 절묘했다. 경제력이 크지 않은 지방에는 지방지부터 인터넷 언론까지 다양한 명목으로 돈을 만들어내는 사이비 기자들이 적지 않은데, 이 영화에서 원준은 그런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를 보면서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공무원 '선미'(김고은 분) 같은 지인들도 생각나서 한참을 웃었다. 영화 속 선미는 학수를 통해 문학을 알게 됐고, '노을 마니아'라는 책으로 나중에는 신인상까지 받는 지역 문인이다. 부안은 매창과 신석정을 떠나 문학적 느낌이 강하다. 부안 공무원들 가운데는 이런 문인기질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영화를 재밌게 하는 요소는 어떤 사람들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조연들이다. 학수 아버지(장항선 분)를 따라다니는 파트너 중식 삼촌(정선철 분)을 포함해 렉카 3인방 등 동창들의 모습은 요즘도 자주 만나는 시골 친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필자의 시골 친구들 가운데도 이제 고향으로 향하는 이들이 제법있다. 귀향하지 않았더라도 변산 만큼이나 노을이 아름다운 '백수 해안도로'를 배경으로 노는 친구들의 모습이 커뮤니티에 많이 올라온다. 사진을 보면서 그들도 영화 속 사람들과 같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많이 갖는다.

랩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1학년 아이까지 세식구에게 따듯한 위로를 준 영화가 반가웠다.

변산 이준익 박정민 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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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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