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이어 '과르디올라의 축구'가 러시아에서도 다시 한 번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까.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본선에 참가한 32개국 중 월드컵 정상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국가는 이제 4개국이다. 수요일 오전 3시(이하 한국시각)에는 프랑스와 벨기에가, 목요일 오전 3시에는 잉글랜드와 크로아티아가 월드컵 결승행 티켓을 놓고 겨룰 예정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전통 강호들은 모조리 무너졌다. 일단 월드컵 통산 4회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는 아예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고, 디펜딩 챔피언 독일은 멕시코와 한국에게 패하며 F조 꼴찌로 짐을 쌌다.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16강에서 도전을 마쳤고 월드컵 최다 우승국 브라질은 8강전에서 벨기에를 넘지 못했다. 이로써 이번 월드컵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이어 브라질, 독일, 이탈리아, 아르헨티나로 수렴하는 전통의 4강이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한 두 번째 월드컵이 됐다.

강자들의 침몰만큼 관심을 끄는 이번 월드컵의 이슈는 단연 '점유율 축구'의 종말이다. 2000년대 후반 FC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던 점유율 축구는 이번 월드컵에서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식의 4-4-2 포메이션이 이번 대회에서 대유행했다.

공을 잡고 경기를 주도하기보다는 공간을 미리 선점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국가는 러시아 월드컵에서 호성적을 냈다. 심지어 우수한 공격 자원을 다수 보유한 프랑스와 벨기에도 자신들과 비슷한 레벨의 팀과 경기에서는 철저히 선수비-후역습 전략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 과르디올라의 축구를 이어가다

그렇다면 정말로 공을 주도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상대를 박살내는 점유율 축구는 끝이 났을까. 28년 만에 월드컵 준결승 고지를 밟은 '축구 종가' 잉글랜드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펩 과르디올라의 점유율 축구를 표방하는 잉글랜드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그렇다. 여전히 점유율 축구는 살아있다.

과르디올라는 최근 두 차례의 월드컵에서 챔피언이 된 스페인과 독일 모두 과르디올라의 축구에서 힌트를 얻은 전적이 있다. 2010년 처음으로 월드컵의 최종 승자가 된 스페인 대표팀은 당시 FC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과르디올라 축구 철학의 축소판이었다. 스페인은 FC바르셀로나와 마찬가지로 공을 다루는 기술이 탁월한 10명의 필드 플레이이가 공의 소유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상대 수비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을 노리는 것보다 자신들의 패스 플레이에 최대한 집중해 결과를 냈다.

2014년의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요하임 뢰브 감독은 2013년 독일의 거인 바이에른 뮌헨의 지휘봉을 잡은 과르디올라의 전술에서 힌트를 얻었다. 직선적이었던 독일의 축구에 과르디올라 특유의 짧은 패스와 점유율 축구를 접목했다. 과르디올라를 만나 중앙 미드필더로도 세계적인 능력을 보여준 필립 람의 변화도 적극적으로 대표팀 운영에 활용했다.

맨시티, EFL컵 4강 1차전서 브리스톨시티에 2-1 역전승 맨시티는 지난 1월 9일 열린 EFL컵 4강 1차전서 브리스톨시티에 2-1 역전승을 거뒀다. 사진은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 호셉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 호셉 과르디올라(자료사진) ⓒ EPA-연합뉴스


러시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거두고 있는 성적에 대해서도 과르디올라의 지분은 상당하다. 2016년 맨체스터 시티(아래 맨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한 과르디올라는 여전히 거칠고 투박했던 잉글랜드 축구에 정교함과 유연성을 선물했다. 첫 시즌에는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지난 시즌 맨시티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바탕으로 한 공격 축구에 다른 19개의 클럽들이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의 축구가 최고라 여겼던 잉글랜드 축구계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마침 2016년에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맨시티가 가져온 변화의 바람을 놓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잉글랜드 축구를 상징했던 힘과 체격을 바탕으로 한 롱패스 축구 대신 짧은 패스를 기본으로 선수들 간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미한 공격 축구로 팀의 철학을 변화시켰다. 후방 지역부터 차근차근 빌드업을 통해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채택한 잉글랜드다.

과르디올라의 철학처럼 잉글랜드 대표팀은 기본값처럼 여겨젔던 포백 수비를 버리고 쓰리백을 선택했다. 골키퍼를 포함한 11명의 선수 전부 기술적인 선수들을 기용했다. 더 이상 의미없이 공을 '뻥뻥' 내지르는 축구는 사라졌다. 기복이 심했던 잉글랜드 대표팀은 사우스게이트 감독 지휘 아래 안정성이 높은 팀으로 변모했다. 능동적인 축구로 팀의 안정감을 높여 대부분의 경기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올리는 과르디올라 축구 철학의 근간을 잉글랜드 대표팀은 그대로 흡수했다. 

결과가 말해준다. 이번 월드컵 8강전 스웨덴과 경기를 포함해 사우스게이트 감독 부임 이후 18경기에서 단 1패만을 허용한 잉글랜드다. 52년 만에 월드컵 우승까지 꿈꾸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황금기의 시작에는 과르디올라의 잉글랜드 무대 등장이 있었다. 만일 잉글랜드가 트로피를 거머쥔다면 그 장면은 또 한 번 과르디올라의 축구가 승리를 거두는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과르디올라 축구에 더해진 사우스게이트의 능력

 잉글랜드를 28년만에 준결승에 진출시킨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

잉글랜드를 28년만에 준결승에 진출시킨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 ⓒ 연합뉴스


현 잉글랜드 대표팀이 과르디올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능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아무리 과르디올라의 잉글랜드 입성이 큰 영향을 줬다고 해도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준비하고 결과를 만든 이는 순전히 사우스게이트 감독이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짧은 패스와 높은 점유율로 승리를 가져오는 방식 자체는 차용했지만. 승부에 방점을 찍는 방법에서는 변화를 택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의 힘과 높이에 기술을 겸비한 해리 케인의 존재를 적극 활용했다.

기본적으로 델리 알리, 제시 린가드 등 재치 넘치는 2선 자원이 최전방의 케인을 지원하지만, 유사시에는 후방에서 곧바로 케인에게 공을 전달해 기회를 만들고 있다. 이번 월드컵 16강 콜롬비아전이 대표적이다. 이날 경기에서 평소만큼의 패스 축구에 실패한 잉글랜드는 케인을 포스트 플레이를 이용했다. 케인은 25번의 경합에서 20번을 승리하면서 공격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한 다양한 방식의 세트피스 플레이도 과르디올라 축구와는 다른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강력한 무기다. 잉글랜드가 이번 월드컵에서 터뜨린 11골 중 무려 8골이 공이 정지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케인이 기록한 패널티킥 3골을 제외해도 5골에 달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에슐리 영과 키에런 트리피어가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리면 공중볼에 능한 케인. 존 스톤스, 해리 맥과이어 등이 상대 골망을 직접 타격한다. 케인과 맥과이어의 세트피스 득점 모두 팀의 승리를 안긴 결승골이었다. 양과 질을 동시에 갖춘 세트피스 공격은 잉글랜드 승리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2018년 6월 18일(현지 시간), 튀니지와 잉글랜드의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모습. 잉글랜드의 해리 케인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리고 기뻐하고 있다.

2018년 6월 18일(현지 시간), 튀니지와 잉글랜드의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모습. 잉글랜드의 해리 케인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리고 기뻐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이름값에 얽매이지 않는' 선수 기용도 찬사를 받고 있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선수가 과거에 보여줬던 퍼포먼스보다는 현재 혹은 월드컵에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집중했다. 사우스게이트의 아이들은 과거 대표팀과 달리 이름값은 떨어지지만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믿음에 보답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골키퍼 조던 픽포드다. 잉글랜드에는 조 하트라는 검증된 골키퍼가 있었지만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경험이 부족함에도 선방 능력과 발 기술을 동시에 갖춘 픽포드를 주전 골키퍼로 기용했다.

사우스게이트의 선택은 적중했다. 픽포드는 안정적인 공 처리와 세이브로 조국을 월드컵 준결승행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6강 콜롬비아전 승부차기 승리, 8강 스웨덴전 수차례의 슈퍼 세이브가 픽포드를 택한 사우스게이트 감독 결단의 결과물이다.

반 세기 넘게 조롱을 받던 잉글랜드 축구가 이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에 실패하더라도 주축 선수들 대부분이 젊기에 미래가 밝다. 과르디올라의 철학 아래 사우스게이트의 색채를 더한 잉글랜드 대표팀의 순항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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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대표팀 과르디올라 사우스게이트 점유율 축구 세트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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