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에는 항상 '축구종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현대축구의 토대를 구축한 원조로서 영국인들의 축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현재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중 하나로 꼽히며 박지성-손흥민-기성용 등 한국 선수들의 활약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하다.

하지만 정작 국가대항전 무대에서 잉글랜드 축구가 명성에 어울리는 성과를 보여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월드컵에서는 자국에서 열린 1966년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려 52년 전의 일이다. 유럽선수권에서는 아예 우승은커녕 결승에 진출해본 적도 없고, 역시 1968년 이탈리아 대회와 자국에서 열린 1996년 대회에 4강에만 두 번 올라본 것이 최고성적이다. 최근 20년간은 각종 국가대항전에서 거둔 최고성적이 8강에 불과했다.

 잉글랜드를 28년만에 준결승에 진출시킨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

잉글랜드를 28년만에 준결승에 진출시킨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 연합뉴스


구겨졌던 자존심

잉글랜드는 지난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통과조차 실패했고, 유로 2016 16강에서 정식 프로리그도 없는 아이슬란드에 패배해 탈락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과거의 명성과 화려한 선수구성, 높은 인지도 때문에 여전히 유럽의 강팀 대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우승후보' 수준에 끼지는 못하는 게 현재까지 잉글랜드의 객관적인 위상이었다. 오죽하면 잉글랜드 대표 팀의 국제 경쟁력은 자국 '훌리건'의 전투력보다도 못하다는 웃지 못할 조롱이 나오기도 했다.

2018 러시아월드컵은 오랫동안 '웃음후보' 취급을 받던 축구종가에 정말로 오랜만에 찾아온 명예회복의 기회가 되고 있다.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이끄는 잉글랜드는 7일 오후 11시(이하 한국시각) 러시아 사마라 아레나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2018 러시아 월드컵 8강전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4강 무대를 밟게 된 것은 1990년 이탈리아 대회 이후 무려 28년만이다.

잉글랜드는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16년 이후 적극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주포 해리 케인을 비롯하여 델레 알리, 라힘 스털링, 제시 린가드, 마커스 래쉬포드, 조던 픽포드 등 잉글랜드의 주축들은 모두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다. 이번 대회 잉글랜드 선수단의 평균 연령은 26.1세로 이번 대회에 참가한 32개국 중 나이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젊다.

젊다고 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잉글랜드의 주축 선수들은 모두 자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어린 나이부터 프리미어리그와 유럽클럽대항전-국가대항전에 이르기까지 소속팀과 대표팀을 넘나들며 '빅매치'를 충분히 경험했다.

대진운도 따랐다. 4년 전 우루과이-이탈리아 등과 죽음의 조에 편성되어 손해를 봤던 잉글랜드는, 이번 월드컵에서는 벨기에-파나마-튀니지 등과 함께 비교적 무난한 G조에서 편성되어 2위로 조별리그를 손쉽게 통과했다. 비록 벨기에에 패하며 조 선두를 내주기는 했지만 파나마와 튀니지를 물리치고 일찌감치 16강을 확정한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조 2위를 차지한 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프랑스-브라질-벨기에-아르헨티나 등 우승후보로 꼽히던 강팀들이 모두 반대편 블록으로 몰리면서 잉글랜드는 결승까지 상대적으로 해볼만 한 팀들과 맞붙게 됐다. 16강에서 만난 콜롬비아, 8강의 스웨덴, 그리고 준결승에서 만나게 된 크로아티아 모두 잉글랜드가 객관적인 전력에서 크게 밀릴게 없는 상대들이었다.

잉글랜드에게 이번 대회는 그동안 월드컵에서 쌓아온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콜롬비아와 16강전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월드컵 승부차기에서 이긴 적이 없던 징크스를 처음으로 깼다.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항상 잉글랜드를 괴롭혀왔던 스웨덴을 8강에서 완파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잉글랜드 축구는 1968년 이후 43년간 스웨덴에게 12경기 연속 무승(8무4패)에 그칠 만큼 유독 고전한바 있지만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스웨덴 징크스는 과거의 이야기가 됐다.

고질병 해소

그동안 국가대항전에서 잉글랜드 축구의 고질적인 약점은 확실한 '해결사'와 '수호신'의 부재였다. 잉글랜드의 주장이자 에이스인 해리 케인은 이번 대회에서 벌써 6골을 넣으며 득점 단독 선두로 유력한 골든부츠 후보로 등극했다. 나란히 4골을 기록한 공동 2위권 중 로멜로 루카쿠(벨기에)를 제외하면 데니스 체리세프(러시아)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는 모두 팀이 탈락하며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앨런 시어러, 마이클 오언, 웨인 루니 같은 선배 공격수들이 못다 푼 '월드컵의 한'을 케인이 대신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세트피스는 케인의 골 결정력과 더불어 이번 대회 잉글랜드의 최대 무기다. 잉글랜드는 이번 대회에서 총 11골을 터뜨렸는데 이중 8골이 세트피스 상황에서 나왔다. 이번 대회 참가국을 통틀어 세트피스 득점의 비중이 가장 높다. 16강전까지 단 2실점밖에 내주지 않으며 무려 3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스웨덴의 골문을 여는데도 세트피스에 이은 헤딩슛 2방으로 충분했다. 11골은 1966년 자국에서 열린 대회 이후 잉글랜드의 월드컵 최다득점 기록인데 4강에 진출하며 최소한 2경기를 더 치르게 된 만큼 이 기록이 경신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또한 이번 대회를 앞두고 잉글랜드의 최대 불안요소였던 골키퍼는 어느새 가장 확실한 장점으로 바뀌었다.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발탁한 '잉글랜드판 조현우' 조던 픽포드가 신의 한수였다. 잉글랜드는 오랫동안 주전 자리를 지켜왔던 조 하트가 급격한 하락세로 이번 월드컵 최종명단에서조차 탈락하면서 주전 골키퍼가 무주공산이던 상황이었다. 24살의 신예인 픽포드는 이번 월드컵 직전까지 A매치 경험이 3경기에 불과했다. 백업 골키퍼인 닉 포프와 잭 버틀랜드도 모두 20대 중반으로 국제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픽포드의 순발력과 배짱을 높이 평가하며 전폭적으로 중용했다. 감독의 믿음을 등에 업은 픽포드는 콜롬비아와의 16강전 승부차기 선방에 이어 스웨덴과의 8강전에서 여러 차례 그림 같은 슈퍼세이브로 무실점 경기를 이끌며 잉글랜드 축구의 수호신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데이비드 시먼, 2010년 남아공 대회의 로버트 그린, 유로 2016의 조 하트 등 그동안 국제대회마다 골키퍼들의 결정적인 삽질로 여러 번 곤욕을 치렀던 잉글랜드 축구로서는 가뭄 끝 단비 같은 발견이었다.

'덕장'으로 꼽히는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그동안 스타병에 찌들어있다는 평가를 받던 잉글랜드 대표팀을 좀 더 역동적이고 조직적인 축구를 펼치는 팀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지도자로서 아직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던 젊은 감독이었다.

그동안 스벤 고란 에릭손, 파비오 카펠로, 로이 호지슨에 이르기까지 외국인 감독이나 경험 많은 베테랑 감독들을 잇달아 영입하고서도 이루지 못했던 잉글랜드 축구의 부활을 오랜만에 등장한 '자국 출신' 감독이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번 대회 잉글랜드의 최대 성공요인으로 꼽히는 과감한 세대교체와 세트피스 전술의 완성도는 사실상 사우스게이트의 작품이라고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생이 주축이 된 잉글랜드의 현재 선수단은 자국의 마지막 월드컵 우승(1996년)이나 4강(1990년) 진출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잉글랜드 축구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데이비드 베컴-폴 스콜스-스티븐 제라드-리오 퍼디난드-프랭크 램파드-웨인 루니 등 '황금세대'로 꼽히던 선배들도 이루지 못한 월드컵의 새 역사를 지금의 세대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젊어진 잉글랜드가 마지막 두 고비를 넘어 축구종가의 화려한 부활을 완성할 수 있을까.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