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러시아월드컵의 대세는 '실리축구'다. 화려한 스타 선수들을 앞세운 공격력이나 높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경기를 주도하는 팀들보다, 객관적인 전력은 떨어져도 견고한 '선 수비 후 역습' 전략으로 무장한 팀들이 실속을 챙기는 추세가 두드러진다.

조별리그까지만 해도 양팀이 활발하게 치고받는 공격축구도 적지 않았다. 6골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무승부를 이룬 스페인-포르투갈전을 비롯하여 잉글랜드, 벨기에, 스위스 등 다득점을 기록한 팀들이 여러 차례 나왔다. 하지만 조별리그 막바지부터 단판승부인 16강 토너먼트에서 접어드는 시점이 되자 각 팀들이 신중하게 한 골차 승부를 의식하여 좀 더 조심스러운 경기운영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특히 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팀일수록 철저하게 수비에 무게중심을 둔 경기운영을 펼치고 있다.

'즐라탄' 내보낸 스웨덴,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실리축구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바로 스웨덴이다. 지난 조별리그에서 한국과도 한 조에 속했던 스웨덴은 어느덧 8강까지 진출하며 이번 대회 최대 돌풍의 중심에 섰다. 한국과 독일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멕시코도 16강에서 덜미를 잡히면서 스웨덴은 현재까지 F조의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스웨덴은 월드컵 개막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1승 타깃으로 꼽히던 팀이었다. 유럽예선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탈락시키며 올라왔을만큼 저력있는 팀이기는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에서 독일이나 멕시코보다는 비교적 수월한 팀으로 꼽힌게 사실이다. 2006년 독일 대회 이후 12년만에 본선에 오른 스웨덴은 당장 이름만 대면 유명한 스타선수도 없었고 공격력도 그리 신통치않아보였다.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공격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대표팀 복귀도 불발되면서 한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로 여겨졌다.

 7월 3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 월드컵 16강 스위스와 스웨덴의 경기. 스위스의 발론 베라미가 스웨덴의 에밀 포르스베리와 공을 다투고 있다.

7월 3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 월드컵 16강 스위스와 스웨덴의 경기. 스위스의 발론 베라미가 스웨덴의 에밀 포르스베리와 공을 다투고 있다. ⓒ AP/연합뉴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정작 스웨덴이 'F조 최강팀'이었다는 게 반전이었다. 스웨덴은 첫 경기에서 한국을 제압한 데 이어 멕시코를 3골차로 완파하며 당당히 조 1위를 차지했다. 독일전에서 역전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스위스와의 16강전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1994년 미국 대회 4강 진출 이후 무려 24년 만에 8강이라는 눈부신 업적을 이뤄냈다.

스웨덴이 이번 월드컵에서 만난 상대 중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피파랭킹이나 전력 면에서 스웨덴보다 앞서는 팀들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특유의 견고한 수비 조직력과 효율적인 경기운영을 바탕으로 강팀들을 괴롭히는 짠물축구를 선보이고 있다. 스웨덴은 이번 대회에서 4경기에서 독일전에만 2실점을 내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3경기를 모두 클린시트로 마쳤다.

스웨덴의 전술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조별리그부터 16강까지 거의 고정된 4-4-2 포메이션에 선발명단도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상대팀들은 스웨덴의 전술이나 선수들의 플레이스타일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고서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만큼 스웨덴이 상대의 장단점을 의식하기보다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플레이에만 최대한 집중한 결과다.

월드컵을 앞두고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이브라히모비치의 대표팀 복귀 불가 결정도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 스웨덴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스타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이브라히모비치는 올해 초부터 월드컵 출전에 대한 열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지만 야네 안데르손 스웨덴 대표팀 감독은 이브라히모비치의 복귀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각에서는 공격력이 허약한 스웨덴이 이브라히모비치를 합류시켰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지난 14일(한국 시각), 유로 2016 조별리그 아일랜드전에 출전한 스웨덴 축구 대표팀의 주장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조별리그 E조에 속한 스웨덴은 1무 2패(승점 1점)를 기록하며 조 꼴찌로 탈락했다. 즐라탄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지난 2016년 6월 14일(한국 시각), 유로 2016 조별리그 아일랜드전에 출전한 스웨덴 축구 대표팀의 주장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조별리그 E조에 속한 스웨덴은 1무 2패(승점 1점)를 기록하며 조 꼴찌로 탈락했다. 즐라탄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힌 바 있다. ⓒ 연합뉴스/EPA


지금 와서 돌아보면 스웨덴이 이브라히모비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브라히모비치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개성이 강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으로 호불호가 엇갈리는 선수다. 이브라히모비치가 활약하던 시절의 스웨덴도 다크호스였지만 이브라히모비치의 컨디션에 따라 팀 분위기가 좌우되는 원맨팀 이미지가 강했다. 이브라히모비치의 마지막 국가대항전이었던 지난 유로 2016에서 스웨덴은 조별리그 무승으로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러시아월드컵에서의 스웨덴은 이브라히모비치의 이름값과 공격력을 포기한 대신 더 끈끈한 '원 팀'으로 거듭났다. 모든 선수들이 개인플레이보다는 약속된 전술에 따라 움직이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공격과 수비 모두에 활발하게 가담하는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이브라히모비치가 월드컵 최종명단 탈락 이후 한동안 공공연하게 불만을 터뜨리며 외부에서 스웨덴 대표팀의 분위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인 것은 역설적으로 이래서 이브라히모비치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명이 되었을 뿐이다.

'돌풍' 일으킨 러시아, 실리 축구로 반전 보여줬다

 2018년 7월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월드컵 16강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 러시아의 표도르 스몰로프(오른쪽)가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꺾은 후 팀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2018년 7월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월드컵 16강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 러시아의 표도르 스몰로프(오른쪽)가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꺾은 후 팀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개최국 러시아도 실리축구로 반전을 이룬 또 다른 사례다. 러시아는 피파랭킹에서 이번 대회 출전국 중 가장 낮았고 전력상으로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예상을 깨고 8강까지 진출했다. 1970년 대회 이후 무려 48년만의 결실이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 이후 국제무대에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0년 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었던 유로 2008에서 한 차례 4강에 오른 것 정도가 21세기 이후 가장 돋보이는 성과였다. 러시아 선수 중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대형 선수는 거의 없고 유럽 기준으로 자국 리그의 경쟁력도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조별리그에서는 비교적 약한 상대들을 만났던 탓에 화끈한 다득점을 펼친 경기도 있지만 백미는 역시 스페인과의 16강전에서 보여준 수비력이었다. 최약체로 꼽히던 러시아가 우승후보 스페인을 격침시킨 것은 이번 대회 최고의 이변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는 이날 점유율에서 스페인에게 26%-74%로 거의 일방적인 밀렸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견고한 두 줄 수비로 끝까지 상대를 괴롭히며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몰고간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티키타카'의 원조이자 점유율 축구의 대표주자인 스페인은 당시 경기에서 월드컵 사상 최고로 1000개가 넘는 패스를 성공시켰지만 한골도 제대로 뽑아내지 못했다. 그나마 스페인의 유일한 득점은 러시아의 자책골이었다.

'점유율 축구', 러시아 월드컵 계기로 내리막 접어들까

굳이 스웨덴이나 러시아만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지난 한국-독일전, 이란-모로코전, 아이슬란드-아르헨티나전, 우루과이-포르투갈전에 이르기까지 경기 점유율에서 뒤진 팀들이 오히려 실리를 가져가는 경우는 이번 월드컵에서 유독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다. 수비와 역습이 이번 월드컵 전술 트렌드의 대세를 이루면서 한동안 세계축구를 호령하던 점유율 축구의 시대가 내리막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또한 수비축구가 유행한다고 해서 무작정 라인을 끌어내리거나 공격을 포기하고 지키기만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번 대회에서 약팀들이 강팀을 잡아낸 경기를 보면 하나같이 수비라인의 절묘한 위치선정과 전술적 움직임이 뒷받침된 경우가 많았다. 한국-독일전이나 러시아-스페인전을 보면 점유율을 내주면서도 지속적인 압박으로 상대에게 결정적 크로스나 중거리슛을 허용할 공간을 내주지 않았고, 공을 빼앗으면 단시간에 역습으로 전환할수 있는 롱패스 위주의 약속된 공격패턴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선수들의 엄청난 활동량과 체력, 톱니바퀴 같은 호흡이 모두 맞아 떨어졌을 때만 가능한 플레이였다.

공격은 선수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이 더 요구되지만 수비는 팀플레이의 산물에 가깝다. 흔히 수비축구를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이유로 비난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더 많은 팀원들의 노력과 전술적 고민을 거쳐야 완성될 수 있는 조직력의 결실이다.

[월드컵] 손흥민 1%의 기적 (카잔=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골을 넣고 있다.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독일에 2-0으로 승리했다.

▲ 손흥민 1%의 기적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골을 넣고 있다.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독일에 2-0으로 승리했다. ⓒ 연합뉴스


'침대축구'나 '소림축구' 같이 도를 넘어선 비매너 플레이가 아닌 이상은, 객관적인 전력에서 뒤진 약팀들이 단기전에서 강팀들을 상대로 이변을 기대할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도 하다. 지난 7~8년간 스페인 점유율 축구의 유행을 어설프게 모방하다가 어느새 본연의 색깔마저 잃어버린 한국축구도 지난 '카잔의 기적'(독일전)이 남긴 교훈에서 배워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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