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변산>에서 학수(박정민)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장항선을 만났다.

영화<변산>에서 학수(박정민)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장항선을 만났다. ⓒ 이희훈


드라마 <전우>(1975) 속 장 하사, 그리고 <실화극장>에 이은 <형사 기동대>(1983) 속 그 형사는 기성세대에겐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반공드라마와 각종 형사물에서 온몸을 던진 배우 장항선(72)은 그렇게 몸을 잘 쓰는 통쾌한 연기로 대중에게 친숙하게 알려졌다. '전쟁 신에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소릴 들었다. 크고 작은 역할을 오가며 말 그대로 치열하게 연기했다.

"먹고 사는 문제였으니까..." 지난 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항선은 나지막이 말했다. 영화로는 <마마> 이후 7년 만, 작품 전체로 따지면 M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이후 4년 만에 대중 앞에 서는 자리였다. 곧 개봉을 앞둔 이준익 감독의 신작 <변산>에서 장항선은 래퍼를 꿈꾸며 고향을 떠난 학수(박정민)의 아버지 역을 맡았다.

"왜 하필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노을이 아름다운 작은 마을 변산. 학수에게 변산은 피하고 싶은 곳이었고, 건달 생활과 노름으로 가정을 저버린 아버지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에 마지못해 학수가 고향을 찾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설정만 놓고 보면 마냥 무겁고 우울할 것 같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반대다. 인생사 폼이 우선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꿀리기 싫어 애써 씩씩한 척한다. 고향 친구들의 익살맞은 태도가 <변산>의 묘미기도 하다.

장항선은 <왕의 남자>(2013)로 10여 년 전 이준익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재회한 소감이 궁금했다. "그때 감독님 느낌이 참 좋았다. 배려심 있고, 꼭 다음에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운을 뗀 장항선은 담담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배우 장항선은 담담하게 그간의 일을 전했다.

배우 장항선은 담담하게 그간의 일을 전했다. ⓒ 이희훈


"연기자로서의 욕심이지만 좋은 작품에서 다시 만나 내가 그간 못했던 걸 감독의 도움을 받아 표출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연락한다거나 차를 마신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서로 바쁘기도 했고. 다만 그때 내가 괜찮았다면 다음에 불러주겠지 하고 생각만 했었지. <오만과 편견>이 끝나고 쉬던 터에 그러니까 재작년에 속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갔다. 대장암이라더라. 병원에서 '잘 왔고,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더라. 의사 분이 믿음이 가서 8시간에 걸쳐 수술했다.

병실에 있으면서 내 앞날을 생각했다. 이게 길면 3년도 간다는데, 왜 하필... 이런 병이 내게 왔을까. 드라마나 영화를 병실에서 보는데 저 역할을 내가 했으면, 또 이것도 해봤으면 하는 환상에도 빠지고 화도 났다. 그렇다고 주변에 알리긴 싫었다. 대장암이라고 소문나면 일을 안 줄까봐 쉬쉬했다. 다만 혹시라도 내 스케줄을 묻는 전화가 올까봐 항상 휴대폰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그렇게 지내니 내 스스로 참 우스워지더라.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연기했고, 손가락질 받진 않을 정도로는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프니까 점점 집념도 약해지더라. 그러던 차에 이준익 감독에게 전화가 온 거다. 처음엔 받질 못해서 내가 전화했다. '왜 했을까? 나 아픈 게 소문나서 안부 전화한 건가' 그러던 차에 감독이 '작품 하나 들어가는데요' 하더라. 순간 온 몸에서 전율이 일더라. 주인공의 아버지 역인데 대장암 걸린 아버지라기에 혹시 제가 아픈 걸 아셨는지 물었다. 괜히 얘기했나 싶었지(웃음)."


장항선은 "그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받아서 보니 자신이 겪은 고통을 투영해선 안 되는 캐릭터였다. "병하고는 상관없는 캐릭터더라"며 그는 이준익 감독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고 전했다. "오랜 만에 작품을 하게 돼서 행복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데, 혹시나 오버를 하게 되면 잘 누르고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영화<변산>에서 학수부 역을 맡은 배우 장항선.

영화<변산>에서 학수부 역을 맡은 배우 장항선. ⓒ 이희훈


 "그렇게 지내니 내 스스로 참 우스워지더라.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연기했고, 손가락질 받진 않을 정도로는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프니까 점점 집념도 약해지더라."

"그렇게 지내니 내 스스로 참 우스워지더라.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연기했고, 손가락질 받진 않을 정도로는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프니까 점점 집념도 약해지더라." ⓒ 이희훈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보통의 이야기라면 장항선이 맡은 역할은 주인공의 보조적 기능을 하고 말았을 테지만, <변산>은 조금 달랐다. 홍보 과정에선 '청춘영화', '음악영화'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세대 간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가족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이준익 감독 역시 "기성세대로부터 온 무거운 짐을 털고 넘어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배우든 열 가지를 하면 영화화 과정에선 몇 개가 잘리는 경험을 한다. (편집에 따라서) 내 캐릭터는 그냥 젊은 시절 술 먹고, 바람피우다가 병이 들어 아들과 다투는 게 될 수도 있다. 포스터를 봐도 젊은 친구들이 랩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젊은 영화라 내가 굳이 뭘 할 게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기에 실제로 그의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기자가 설명했다- 기자 주).

마지막 유언도 솔직히 멋진 말을 하고 싶었다. 아들을 '똥 치우는 막대기' 취급하다가 죽는 거 아닌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에겐 행복하라고 울컥하는 말을 하고 싶을 텐데 시나리오를 보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부터 들었다. 촬영을 마친 이후에도 사실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수 아버지가 이런 말밖에 못하는 무식이구나!' 싶었지. 가장 신경 쓴 장면이기도 했다. 만약 그 장면이 괜찮았다면 전적으로 감독과 작가의 공이다. 배우는 그저 재료일 뿐이다(웃음)."


장항선은 해당 장면을 설명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시 연기를 재연까지 했다. 계속 자신에게 뻗대는 학수를 향해 주먹으로 쳐 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었다.

"커몬! 드루와! 쳐봐! (웃음) 학수가 건달이 된 동창 친구 용대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나. 아버지 입장에선 속이 어떻겠나. 산처럼 바위처럼 여겼던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날릴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산을 넘어야 학수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확인하고 싶은 거지. 이게 사실 모든 아버지의 꿈인 것 같다. 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로서 많은 사람들이 <변산>을 봐주셨으면 한다. 그래서 가정의 달인 5월에 개봉했으면 하는데 7월에 한다고 하네? (웃음)." 

 " 시나리오를 보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부터 들었다. 촬영을 마친 이후에도 사실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수 아버지가 이런 말밖에 못하는 무식이구나!' 싶었지."

" 시나리오를 보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부터 들었다. 촬영을 마친 이후에도 사실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수 아버지가 이런 말밖에 못하는 무식이구나!' 싶었지." ⓒ 이희훈


실제로 장항선은 자신의 아들에게도 꽤 냉정한 편이다. 아버지처럼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 김혁은 몇몇 예능 프로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한 바 있다. 영화 <쏜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등에 아들과 함께 출연한 장항선은 "아들과 한 작품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조심스러웠다"고 과거 인터뷰에서 밝혔고, 김혁 역시 "아버지 후광 없이 내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맞다. 그랬었지. 어떤 선배가 '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러면 겉으로는 '예, 알겠습니다' 하겠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아들에겐 모방에 의한 창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아들은 내게 대본을 잘 안 보여준다. 큰 역할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 나는 또 아들 몰래 아들이 표시해 놓은 부분을 본다.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말지. 아들도 연기한 지가 10년이 넘어서 나름 능구렁이가 다 됐다. 아버지가 얘기하는 건 참견이고 잔소리지. 저 또한 스승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장항선은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간 스태프나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촬영이 끝나면 현장을 떠나는 사람이었다면 이번 현장에서는 살가운 모습을 보인 것. "교만했던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과거의 모습이 교만하게 보였을 것"이라며 그는 "스태프들이 좋다면 나 역시 달라질 수 있다"며 나름의 다짐도 전했다.

"그간 영화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변산>으로 행복했다. 수술 뒤 잠시 실의에 빠져서 어쩌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지 모르는 찰나에 타이밍이 맞았다. 무사히 잘 끝낸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영화<변산>에서 학수부 역을 맡은 배우 장항선.

영화<변산>에서 학수부 역을 맡은 배우 장항선. ⓒ 이희훈


어떤 외길 인생
 
인터뷰 중 수술 경과를 묻는 말에 그는 "아프다고 하기 싫다"며 "지금도 2층에서 뛰어내리라면 뛸 수 있다"고 웃어 보였다. 스스로를 전문적인 연기를 사사받은 전문가가 아닌 의지로 배우고 익힌 사람이라 표현했다. 겸손과 자신감이 동시에 묻어나는 말이었다.

48년 차. 누가 뭐래도 한 길을 긴 시간 걸었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하다. 연상호 감독이 자신의 작품 <사이비> 속 민철 캐릭터를 만들 때 장항선과 일본 배우 기타노 다케시의 개성을 끌어왔다는 건 영화계에 유명한 일화다. 

"연기를 하고 싶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골 극장에 몰래 숨어들어가 영화를 보곤 했다. 흔히들 '쌔비'라고 하지(웃음). 무대 밑에 숨어 있다가 영화가 시작할 때 기어 나와서 봤다. 배우가 돼야 겠다! 지금처럼 전문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마냥 부딪혀서 KBS 9기로 들어갔지. 그땐 말라서 반공 드라마에 북한군으로 자주 출연했다. <형사기동대> 할 땐 11층 아파트 창문에 밧줄 타고 맨몸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고. 사극하면서는 말에서 꽤 떨어졌었지. 갈비뼈도 부러져 보고.  

배우는 이름을 남기잖나. (다쳐서) 어디가 잘못 돼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가끔은 아, 내가 열심히는 했구나 생각하긴 한다. 연기 말고는 먹고 사는 수단이 없었으니까. 재산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했다. 포졸 역할을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으면 다음에 안 불러주니까 최소한 '싹이 보이네?' 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압축된 사연에서 그의 표정은 다양했다. "내 스스로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사실 우리 나이에 맞는 개성 있는 역할을 맡고 싶다"며 그는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외국영화 보면 노인들도 갱 역할을 하더라!" 웃어 보였다. 다양한 표정과 이 말 자체가 그의 여전한 연기 열정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간 영화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변산>으로 행복했다. 수술 뒤 잠시 실의에 빠져서 어쩌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지 모르는 찰나에 타이밍이 맞았다. 무사히 잘 끝낸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간 영화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변산>으로 행복했다. 수술 뒤 잠시 실의에 빠져서 어쩌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지 모르는 찰나에 타이밍이 맞았다. 무사히 잘 끝낸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 이희훈


예명 '장항선' 어떻게 탄생했을까?

배우 장항선의 본명은 김봉수. 예명 자체가 충청남도 천안과 전라북도 익산을 잇는 철도에서 따온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왜 하필 철도였을까. 보다 자세히 질문했다.

"탤런트가 되면서 내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근데 예명을 지을 정도로 특수한 상황도 아니어서 고민 좀 했지. 어느 날 분장실에서 선배인 문오장씨 등 몇 분이 예명에 대해 얘기하고 있더라. '여자 중에선 김지미씨 예명이 좋고, 남자 중에선 신성일, 최불암이라는 예명이 좋아! 문오장도 삼장도 사장도 아닌 오장이라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편해!' 그러시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저도 예명을 생각한 게 있습니다. 장항선요. 제가 장항선을 타고 통학했거든요' 그 말에 선배들이 '경부선으로 하라'며 웃더라.

2주인가 후에 AD에게 사정했다. 자막에 나가는 이름을 장항선으로 바꿔달라고. 충청도 출신이고, 나름 구수한 맛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웃음). 근데 가끔 돌아가신 장학수씨로 잘못 아시는 분도 있고 그랬다. 예전 TBC에 경인선이라고 미녀 탤런트가 있었다. 선배들이 한때 장난삼아서 '장항선과 경인선이 결혼하면 자식은 경부선이겠네' 하고 놀리기도 했지."


장항선 변산 박정민 이준익 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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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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