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 콜럼비아 픽쳐스


데뷔 초 제임스 딘을 닮은 외모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제임스 프랭코. 2002년 <스파이더 맨>에서 피터의 친구 해리 역을 따냈을 때 그의 할리우드 입성은 순조로워 보였다. 잘생긴 외모로 이후 여러 영화의 주연을 맡게 되지만 처음에 기대했던 스타배우로서의 활약은 미흡했고 치열한 할리우드에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로 방황하게 된다. 그러던 중 묵직하고 진지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왔던 그의 연기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 준 작품을 만나게 되는데 그 영화가 바로 2008년 개봉한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콜럼비아 픽쳐스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는 우연히 마약 두목의 살해현장을 목격한 데일(세스 로건)이 마약 딜러 사울(제임스 프랭코)과 함께 마약 조직원들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겪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로 두 남자의 버디 무디이며, 액션 영화이자, 아무 생각 없이 실컷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영화이다.

코미디 영화의 거물 주드 아패토우가 제작하고,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세스 로건과 에반 골드버그가 대본을 썼으며, 데뷔작부터 평론가 로저 에버트와 선댄스 영화제의 극찬을 받은 영화감독 데이비드 고든 그린이 연출한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는 미국 개봉 첫 주에 제작비의 대부분을 거둬들일 만큼 흥행에 성공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위 '병맛' 유머가 가득하지만 영화의 짜임새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탄탄해서 코미디 영화를 얘기할 때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콜럼비아 픽쳐스


두고두고 회자되는 코미디 영화

이 영화에서 제임스 프랭코는 전에 본 적 없는 백치미 가득한 마약 딜러 사울을 연기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망가지는 그의 연기가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 출연한 세스 로건에 있을 것이다. 우선 그에게 이 영화의 출연을 제의한 사람이 바로 세스 로건이다. 두 사람은 1999년 TV드라마 <프릭스 앤 긱스>에서 연을 맺은 이후로 좋은 우정을 유지해왔으나 영화계에서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달랐다. 세스 로건은 저예산 코미디 영화의 작가나 조연배우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있었고, 제임스 프랭코는 할리우드 영화의 차세대 스타로 주목을 받았으나 주연을 맡은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와 함께 연기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소속사의 요구에 따라 영화에 출연한 것에 대한 불만과 답답함이 해소되어서였을까.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에서 제임스 프랭코는 이제야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찾은 듯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 편안해보이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콜럼비아 픽쳐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장르 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만 조금씩 비껴나 있고, 각각의 비껴난 틈들이 서로 맞물리며 웃음을 만들어낸다. 세스 로건이 연기한 데일은 우리가 흔히 '루저'라고 부르는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인물로 멋지고 쿨한 것의 정반대 지점에 있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지질함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또한 그의 푸근한 인상과 선함은 그가 아무리 지저분한 농담을 내뱉어도 그를 역겹게 만들지 않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이 점은 그가 출연한 대부분의 코미디 영화에서 똑같이 작용한다). 거기다 10대 때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면서 갈고 닦은 유머감각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연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제임스 프랭코의 터닝포인트

반면 제임스 프랭코의 경우에는 철저히 망가지되 보기에 불편하지 않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 대부분의 미남 배우들이 코미디 연기를 할 때 백치미 가득한 인물을 맡게 되는 것은 백치가 만들어내는 귀여움이 잘생김을 무시하면서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고 캐릭터와 배우 모두를 살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에서도 사울은 데일보다 엉뚱하고 일반성에서 비껴나 있는 인물로 저렇게 순진하고 멍청해서 마약 딜러는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대책 없이 사고를 치지만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사울과 데일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환상의 호흡으로 새로운 코믹 콤비의 탄생을 보여준다.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단지 영화 속 대사인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처럼 여겨질 만큼 궁합이 좋아 더욱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콜럼비아 픽쳐스


많은 코미디 영화들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초반에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중반까지 긴장을 유지하며 몇몇 중요 지점에서 계산된 웃음을 만들어내고 실망스러운 결말로 이어지면서 용두사미의 구조를 가진 반면,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는 영화가 끝나는 시점까지 아니, 끝나고 나서도 재미의 여운이 남을 만큼 이야기가 촘촘하다.

112분이라는 코미디 영화치고는 꽤 긴 러닝타임에도 이 영화가 재미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역시 주드 아패토우 사단이라고 불리는 세스 로건, 에반 골드버그, 제임스 프랭코, 대니 맥브라이드, 크레이그 로빈슨 등등으로 구성된 제작진과 배우들의 완벽한 호흡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함께한 대부분의 영화(<슈퍼 배드> <디스 이즈 디 엔드> 등등)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극의 긴장감을 점차적으로 고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리듬을 가지고 재치 있는 대사와 연기로 재미를 만들어낸다는 특이점이 있다. 그것은 마치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재밌는 상황을 하나 만들어 각자 아이디어를 첨가해가면서 이야기를 완성해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콜럼비아 픽쳐스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의 성공은 제임스 프랭코의 커리어에 굉장한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이후 그가 출연한 데니 보일 감독의 < 127시간 >과 <혹성 탈출 : 진화의 시작>의 성공보다도 더 큰 활력일 것이다.

성추행 폭로, 불투명한 앞날

지난 20년의 활동 기간 동안 1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고(물론 그중에는 조연과 단역 출연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장단편 영화, 광고, TV드라마 등등 수십 편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소설과 시나리오를 쓸 만큼 제임스 프랭코의 창작욕은 엄청나다. 그럼에도 그가 출연한 영화들에서 그의 존재가 그의 다작만큼 인상적이지는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2017년은 그의 해였을 것이다. 이전까지 자신이 연출한 영화들이 혹평 일색이었던 반면 2017년 미국에서 개봉한 <더 디제스터 아티스트>는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이 영화로 그는 골든 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데뷔 이래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는 평까지 들으며 연기와 연출력, 대중과 평단.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듯 보였다.

그러나 올해 초, 그가 다섯 명의 여성 영화인을 성추행했다는 혐의가 폭로됐다. 그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이 어떤 결론을 맺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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