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이창동 감독, 5번째 가는 칸 이창동 감독이 24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버닝> 제작보고회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이 8년만에 선보이는 <버닝>은 세 청춘의 만남과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비밀스럽고 강렬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5월 17일 개봉.

이창동 감독ⓒ 이정민


아마도 영화계 블랙리스트의 시초였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영화인들은 그렇게 '증언'해 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0점 심사' 논란이 벌써 지난 2010년 일이다. <시>는 제6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뒤늦게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가 2009년 마스터영화제작지원 사업 심사에서 이 작품에 '0점'을 준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이 됐다.

당연했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뒤따랐다. 이미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밀양> 등 전작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이창동 감독의, 게다가 칸에서 각본상을 받은 작품에 하필 '0점'이라니.

심사 후 1년 뒤 불거진 논란에 조희문 위원장 체제의 당시 영진위는 <시>가 시나리오 형식이 아닌 트리트먼트 형태로 제출됐고, 심사위원 중 1명이 제출서류 요건 미비를 문제 삼아 0점을 줬지만 심사 평가 자체에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영진위의 해명에도 이창동 감독과 제작사 측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을 두고 "억울한 피해자" 마냥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영진위는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영진위로부터 투자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음으로써 사실과 다른 논란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이창동 감독 측을 압박했다. <시>의 제작 당시 영진위가 출자한 다양성영화투자조합이 간접지원 방식으로 총 5억 원의 투자를 받은 것을 두고 '생색'을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랏돈을 투자 받아 영화를 완성했으면서 왜 영진위가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나서지 않느냐는 힐난 아닌 힐난을 퍼부었던 셈이다. 당시 영진위원장이었던 조희문은 <시> 논란 이후 영화계의 반발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질책을 뒤로 한 채 그해 11월 결국 해임됐다(그리고 조희문 전 위원장은 2014년 3월 채용비리로 구속되기도 했다).

누가 영화를 정치적으로 사고했는지, 그런 사고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더 큰 비극이라면, 그 이후로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전방위적으로 악용했다는 점이겠지만.

영화 <시> '0점 심사' 사태를 다시금 끄집어 올린 이유는 이웃 나라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감독 역시 이와 유사한 힐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올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자 곧 개봉을 앞둔 <어느 가족>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말이다. 일본 문화청과 아베 수상까지 엮인 이 사례를 통해 분명 우리가 곱씹을 만한 교훈이 있을 법하다.

 영화 <어느 가족> 공식 포스터.

영화 <어느 가족> 공식 포스터.ⓒ 티캐스트


<시> '0점 심사'와 <어느 가족>의 아베 논란

아베 신조 총리는 집권 이후 '쿨 재팬'을 문화홍보수출 전략으로 밀고 나갔다. '망가'로 일컬어지는 출판만화와 저패니메이션을 비롯해 이와 연계된 게임 산업과 장르소설 산업 등 일본 대중문화는 그 뿌리부터 현재적·세계적 저변까지 경쟁력 넘치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16년 리우올림픽 폐막식에서 아베 총리가 유명 게임 캐릭터인 슈퍼마리오 분장을 하고 등장했던 모습도 바로 이러한 '쿨 재팬' 홍보의 일환이었다.

그 아베가, 일본 정부가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감독을 '홀대'했다. 통상 아베 총리는 국제적인 스포츠나 문화 이벤트에서 수상을 한 자국인에게 축전이나 축하 전화 등 인사를 보내는 걸로 유명했다. 더군다나 <어느 가족>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일본영화로서는 무려 21년 만의 쾌거다. 자국 홍보의 기회를 눈 뜨고 놓칠 리 없는 아베 총리, 그러나 그 배경엔 역시나 정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쿨 재팬'이란 구호를 내세우고 정부에서도 뒤늦게나마 일본의 대중문화를 해외에 계속 수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영화에도 그런 지원 자체는 필요하다. 문제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하느냐다. 일본의 올림픽 유치 활동을 보면서, 스포츠라는 문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할 올림픽 개최가 '지금 우리에게는 올림픽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주객전도되어 문화를 왜소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중략).

단순히 영화의 해외진출로 외화를 벌겠다는 발상이라면, 그런 태도는 '쿨'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속내는 어떻든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기 위해', 즉 '영화 문화 그 자체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하는 가치관을 내걸고 임하지 않는 한, 그 대응이 세계 영화인들에게 존경받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런 접근이 영화의 현재와 이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난 2013년 발간된 고레에다 감독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 중 '칸 영화제에서 돌아와' 챕터에 실린 글이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칸을 둘러봤던 감독의 단상은 그렇게 '영화와 문화의 다양성'과 '미디어의 국가주의 보도 경쟁'을 거쳐 '영화는 올림픽이 아니다'라는 어쩌면 보편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쿨 재팬'을 향한 비판도 그러한 사고와 젖줄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5번이나 칸에 진출했던 감독이 자국에서 느꼈다는 '문화의 왜소화'는 아이러니하게도 황금종려상 수상 직후 극대화된 셈이 됐다. 지난 6월 아베 총리의 이례적인 '침묵'이 평소 '반'아베 성향을 숨기지 않았던 고레에다 감독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는 일본발 기사가 잇따랐다.

그러자 일본 우익 정치인들과 넷우익들이 나섰다. 감독의 정치적 성향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좀도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유사 가족을 다룬 <어느 가족>이 일본사회의 이면을 건드렸다며 영화의 주제까지 문제 삼고 나섰다. 심지어 <어느 가족>이 일본 문화청의 지원을 받은 것을 두고 "세금으로 만든 영화로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비판까지 일었다.

뒤늦게 일본 문부과학대신이 <어느 가족>의 수상을 축하한다고 밝혔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자신의 홈페이지 게시글을 통해서다. 고레에다 감독은 지난 6월 7일 쓴 글을 통해 "한때 일본영화가 국책에 동원돼 불행을 초래하기도 했다"며 "공권력과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논란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느 가족>은 개봉 3주째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다.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이창동, 한국과 일본

"지금의 일본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일본인만으로 한정되는 게 아니라)에게 가장 불행한 것은, 이 정신적 외부에 있어야 할 미디어가 완전히 내부의 세상과 일체화되고 그 가치관에 영합해 오히려 마을의 외벽을 보강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국가적 가치관과 개인의 가치관, 그 이쪽과 저쪽에 대해 비평적인 입장으로 접근해 타자와의 접촉의 장을 여는 것으로 양자의 성숙(상대화)을 촉진함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는 미디어가 외부에 있지 않고 국가와 개인과 동심원상에 겹쳐 있다.

미디어는 정부의 홍보 도구이며(TV를 오래 보는 사람일수록 자민당 지지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원래라면 제4의 권력으로서 경찰 권력의 행사를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솔선해서 범인 색출에 협력하고 사법에 앞서 사회적(세간적) 제재를 가한다."

같은 에세이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일본의 '섬나라 근성'을 언급하며 "서로 감시하는 세간에만 둘러싸인 답답함에서 인간이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현재 자살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게 아닐까?"라고 한탄하고 있었다. 언론과 미디어, 이와 결합한 국가 권력을 비판하는 글이었지만 분명 일본인이 바라보는 통렬한 '내부적' 시각이라 할 만하다.

우경화와 '쿨 재팬'을 동시에 외치는 아베 정권의 집권이 벌써 7년째다. 일본의 우경화가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지만, 블랙리스트의 암흑기를 통과해 온 우리 입장에서 이번 고레에다 감독을 둘러싼 일본 내 논란은 결코 강 건너 불구경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지난 9년간 '문화의 왜소화'와 정부의 홍보도구로 전락했던 미디어 등을 경험하지 않았나.

고레에다 감독과 이창동 감독은 이번 칸 경쟁부문에 나란히 진출했다. 이들은 각각 <어느 가족>과 <버닝>으로 언제나 그랬듯 가족(과 청춘)을 화두삼아 동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이 두 예술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금으로 만든 영화로 왜 논란을 일으키느냐"는 비판과 논란을 샀다는 사실을 동아시아의 특수성(중국과 북한은 또 어떠한가)이라 묶을 생각은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있다. 문화의 왜소화를, 미디어와 정권의 밀월을, 그러한 우경화와 '일체화'를 좌시한다면 언제라도 그러한 '쿨'하지 못한 세상이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으로 귀환하리란 점 말이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어느 가족> 홍보차 내한을 확정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과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의 글이 아닌 말을 통해 직접 들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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