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함대' 스페인이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짐을 쌌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은 우승후보들이 연이어 조기탈락하면서 예측불허의 양상으로 물들고 있다.

스페인은 1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16강전에서 개최국 러시아에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스페인은 전·후반과 연장까지 2시간 동안 내내 경기 주도권을 움켜쥐고도 러시아의 견고한 육탄방어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은 세 번째 키커 코케와 다섯 번째 키커 이아고 아스파스의 슈팅이 러시아 골키퍼 아킨페프의 선방에 막히며 패배가 확정됐다.

'황금세대'의 몰락, 통하지 않는 티키타카 축구

 1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러시아와의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 스페인 제라드 피케(오른쪽)와 세르히오 부스케츠(가운데)가 아쉬워하고 있다.

1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러시아와의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 스페인 제라드 피케(오른쪽)와 세르히오 부스케츠(가운데)가 아쉬워하고 있다. ⓒ 연합뉴스/AP


러시아 월드컵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분류됐던 스페인이 FIFA 랭킹에서 무려 60계단이나 낮은 러시아에 일격을 당한 것은 엄청난 이변이다. '전통 강자들'의 몰락이 두드러지는 월드컵이다. 이미 지난 월드컵 우승팀 독일이 한국에 패하며 80년 만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고, 준우승팀 아르헨티나와 2016 유럽선수권 우승국 포르투갈도 각각 16강의 벽을 넘지 못했다. 또 다른 전통의 강호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칠레 등은 아예 유럽-남미 지역예선에서 무너지며 본선조차 오르지 못했다.

이로서 현재 6월 피파랭킹 상위 10팀 중 벌써 6팀이 탈락했고, 월드컵 우승경험이 있는 8개국 중 4개국(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이 일찌감치 짐을 쌌다.

스페인의 탈락과 함께 기묘한 '개최국 무승 징크스'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스페인은 그동안 월드컵 본선에서 개최국을 만났을 때 4전 전패로 한번도 이기지 못하는 징크스가 있었다. 유럽 선수권대회까지 범위를 넓혀도 스페인은 최근 9번이나 개최국과 맞대결했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스페인은 지난 2002 한일 월드컵 8강에서도 한국에 승부차기 끝에 패한 바 있다. 월드컵 같은 큰 무대일수록 객관적 전력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스페인의 몰락은 2000년대 후반부터 계속된 '황금세대'와 '티키타카'의 전성기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다. 스페인은 공간장악-패스-점유율-압박으로 요약되는 기술축구와 화려한 테크니션을 앞세워 유로 2008-2010 남아공월드컵-유로 2012까지 메이저대회를 3연속 제패하는 위업을 세우며 최전성기를 달렸다. 스페인의 자국 리그인 프리메라리가는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바르셀로나-아틀레티코-세비야 등 명문 클럽들을 앞세워 유럽 리그 파워랭킹 1위를 수성하고 있으며 유럽 클럽대항전을 수년째 독식하는 등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세계 축구계가 조금씩 스페인식 축구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티키타카는 더 이상 스페인 축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철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티카타카에 대한 전술적 공략법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2014 브라질 대회에서 같은 조에 편성된 네덜란드와 칠레가 특유의 '속도와 역습'을 통하여 스페인을 침몰시킨 것은 전환점의 서막이었다. 스페인은 전 대회 우승팀이 다음 대회에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피하지 못했다.

3연속 세계 대회서 부진한 스페인, 과거 명성은...

무적함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케르 카시야스, 카를로스 푸욜, 사비 에르난데스, 다비드 비야, 세스크 파브레가스 등 핵심 선수들이 이제 대부분 노장이 된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대표팀을 은퇴하기도 했다. 물론 현재 스페인의 스쿼드도 세계 정상급이지만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다비드 실바 등은 모두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는 선수들이고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줄 확실한 해결사도 없었다.

스페인 축구의 중추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FC에 각각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와 같은 확실한 해결사가 있는 것과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반면 호날두의 포르투갈과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클럽에서의 성적과는 달리 원맨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무너진 것과도 대조를 이룬다.

리더십의 공백도 또다른 악재였다. 스페인은 2년간 팀을 이끌어온 홀렌 로페테기 감독이 돌연 레알 마드리드 사령탑으로 선임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한 스페인축구협회로부터 월드컵 개막을 하루 앞두고 경질당했다. 기술고문이었던 페르난도 이에로 감독이 급하게 투입되어 월드컵을 지휘했으나 임시 감독의 특성상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운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지난 유로 2016에서도 16강에 그친 데 이어 이번 월드컵에서도 조기탈락하며 최근 5년간 세 번의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8강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부진을 이어갔다. 스페인의 명성을 감안하면 실망스러운 성적표다.

스페인은 최근 몇 년간 강력한 압박과 수비 조직력을 바탕으로 끈질긴 늪축구를 구사하는 팀에게 유독 고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스페인은 조별리그에서부터 포르투갈에 비기고 모로코와 이란에게 고전하는 등 한 번도 시원한 승리를 거둔 일이 없다. 16강에서 만난 러시아 역시 일찌감치 라인을 내리고 엄청난 활동량과 촘촘한 공간장악을 통해 빈틈을 내주지 않는 텐백 수비로 스페인의 패스플레이를 좌절시켰다.

낡은 티키타카 축구의 대안은

역전골 환호하는 스페인 나초 스페인 페르난데스 나초(오른쪽)가 15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 피시트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B조 1차전 포르투갈과 경기에서 3-2로 앞서는 역전골을 터뜨린 뒤 이니에스타와 환호하고 있다.

▲ 역전골 환호하는 스페인 나초 스페인 페르난데스 나초(오른쪽)가 15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 피시트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B조 1차전 포르투갈과 경기에서 3-2로 앞서는 역전골을 터뜨린 뒤 이니에스타와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때 스페인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높은 점유율이 더 이상 승리의 보증수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번 월드컵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스페인 못지않은 점유율 축구를 펼치던 독일을 비롯해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이 모두 패한 경기에서 상대보다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도 결과가 정반대로 나온 것이 좋은 예다.

기록으로 보면 스페인은 러시아전에서 무려 1137개의 패스를 시도하여 이 중 1029개를 성공시키며 팀 전체 패스성공률이 91%, 경기 점유율은 74%에 이르렀다. 연장까지 가는 경기였음을 감안해도 한 경기에서 1000개가 넘는 패스가 나온 건 월드컵 사상 처음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골문을 가른 것은 상대 자책골로 넣은 한 골 뿐이었다. 다시 말하여 실속없이 볼만 돌리다가 상대의 역습 한 방에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페인은 이미 공략법이 노출된 티키타카를 대체하고 진화시킬만한 새로운 전술적 대안이 없었다.

스페인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려한 선수구성에 비하여 모래알 조직력으로 국가대항전만 나오면 약해진다는 징크스를 안고 있던 팀이었다. 한때 티키타카를 앞세워 세계축구의 트렌드를 이끌며 전성기를 호령하던 스페인은 이제 10년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다시 과거로의 퇴행을 걱정해야할 과도기에 놓여있다. 역습과 속도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최근의 현대축구에서 스페인이 찾아야할 낡은 티키타카의 대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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