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손'이라 놀림 받던 골키퍼 아킨페예프 주장이 놀라운 순발력을 자랑하며 개최국 러시아를 8강에 올려놓았다. 월드컵 개막 직전에 급하게 감독을 바꾼 스페인은 결국 패스 축구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드러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공 점유율이나 패스 성공률 면에서 상대를 압도하면서도 결과로는 패하고 마는 이러한 현상은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8년 7월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월드컵 16강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 러시아의 표도르 스몰로프(오른쪽)가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꺾은 후 팀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2018년 7월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월드컵 16강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 러시아의 표도르 스몰로프(오른쪽)가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꺾은 후 팀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스타니슬라프 체르체소프 감독이 이끌고 있는 러시아 남자축구대표팀이 한국 시각으로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모스크바에 있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16강 세 번째 경기에서 강팀 스페인과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이겨 8강에 진출하는 감격을 누렸다.

점유율과 패스 성공률의 허상을 보다

러시아의 동점골이 나오기 직전까지 스페인은 슛 기록 하나도 없이 1-0으로 앞서나갔다. 11분에 러시아 수비수 이그나셰비치의 자책골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른쪽 측면 프리킥 세트 피스 기회에서 스페인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를 전담 마크하던 베테랑 수비수 이그나셰비치의 오른발 뒤꿈치 부분에 맞은 공이 골문 안으로 날아들어간 것이다.

스페인은 이 행운의 골로 개최국 러시아의 돌풍을 쉽게 잠재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골잡이 디에고 코스타는 물론, 공격형 미드필더 이스코, 아센시오, 다비드 실바의 슛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러시아의 철벽 수비 '지키기 전술'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러시아는 40분에 코너킥 세트 피스 기회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내 점수판을 1-1로 만들어, 뒷문을 잘 지키다가 역습이나 세트 피스로 실리를 노리는 축구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체격 조건 좋은 골잡이 아르톰 주바의 헤더가 바로 앞에서 솟구친 스페인 수비수 피케의 치켜든 왼팔에 맞은 것이다. 비외른 쿠이퍼스(네덜란드) 주심은 점프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팔 동작이 아니라 피케가 공의 진행 방향을 일부러 막았다고 판단했다.

이 귀중한 기회를 아르톰 주바가 오른발 인사이드 킥으로 성공시켰다. 스페인 골문은 여전히 다비드 데 헤아가 지키고 있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공 속도였다.

그런데 1-1 점수판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다. 후반전도 모자라 연장전 30분 그 이상의 시간까지 러시아 골문은 굳게 닫힌 그대로였다. 그만큼 스페인의 티키타카를 대비하기 위한 러시아의 지키는 축구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F조 마지막 경기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잡은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16강 두 번째 경기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포르투갈을 우루과이가 2-1로 물리친 것처럼 러시아도 수비벽을 단단히 쌓아 상대가 조금씩 무너질 때까지 잘 버틴 것이다.

이는 압도적인 점유율 차이(스페인 74%, 러시아 26%)와 패스 성공률 차이(스페인 91%, 1029 패스 성공 / 러시아 71%, 202 패스 성공)를 충분히 뒤집어버릴 수 있다는 현대 축구의 새로운 믿음이 통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다. 한국과 우루과이, 그리고 러시아가 결코 우연의 일치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번 월드컵이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승부차기, 아킨페예프의 슈퍼 세이브

스페인의 이에로 감독은 67분에 다비드 실바를 빼고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들여보내 보다 날카로운 전진 패스로 러시아 골문을 두드렸다. 85분에는 이니에스타가 직접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러시아 골문을 노렸지만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예프가 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그 공을 쳐냈다. 곧바로 이어진 아스파스의 2차 슛까지 아킨페예프가 침착하게 쳐냈다.

지난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의 이근호가 찬 비교적 평범한 중거리슛을 잡아내지 못하고 뒤로 흘리는 바람에 '기름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아킨페예프가 러시아 팀 주장으로서 가장 든든하게 골문을 지켜낸 셈이다.

 2018년 7월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월드컵 16강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 러시아의 골키퍼 아킨페프가 승부차기에서 상대팀의 슈팅을 막아내고 있다.

2018년 7월 1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열린 러시아월드컵 16강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 러시아의 골키퍼 아킨페프가 승부차기에서 상대팀의 슈팅을 막아내고 있다.ⓒ AP/연합뉴스


아킨페예프의 활약은 연장전 이후에 벌어진 승부차기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그의 순발력은 스페인의 세 번째 키커 코케의 오른발 슛이 날아들었을 때 또 한 번 빛났다. 이니에스타의 중거리슛을 막았을 때처럼 아킨페예프의 세이브 방향은 역시 그의 오른쪽이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다섯 번째 키커 이아고 아스파스의 왼발 슛이 가운데 쪽으로 날아올 때에도 아킨페예프는 역시 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내던지며 왼발 끝을 들어올려 기막히게 막아냈다. 마치 최고의 골잡이가 아름다운 발리 슛을 꽂아넣는 순간처럼 놀라운 타이밍과 순발력을 자랑한 것이다.

이렇게 스페인의 두 선수 킥이 아킨페예프에게 걸리는 사이에 '스몰로프, 이그나셰비치, 골로빈, 체리셰프'의 킥은 모두 다비드 데 헤아가 지킨 스페인 골문을 통과했다. 120분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스페인의 파상 공격에도 잘 버틴 러시아의 수비 축구가 승부차기 4-3으로 활짝 웃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지난 달 27일 카잔 아레나에서 한국의 수비 축구도 독일을 2-0으로 이길 때 공 점유율은 30%밖에 안 됐으며, 패스 성공수는 독일(635개)에 비해 28.7%에 불과했다. 이 경기 앞에 열린 16강 두 번째 경기 승리 팀 우루과이도 공 점유율이 39%였다. 패스 성공수 또한 포르투갈(489개)의 37.8%에 해당하는 185개뿐이었다.

연장전 기록까지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차이가 발생했지만 러시아는 스페인의 1029개 패스 성공수에 비해 19.6%밖에 안 되는 202개의 패스를 성공시켰을 뿐이다. 그런데 점유율 26%밖에 안 되는 러시아가 공식 기록으로는 1-1 무승부, 승부차기 4-3 승리의 감격을 누렸다.

다른 기록 더 찾을 필요도 없이 '한국, 우루과이, 러시아' 이 세 경기 사례만 놓고 봐도 현대 축구의 특징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결과물이 보인다. 점유율과 패스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축구의 승리 공식과는 특별히 상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 골문 안으로 얼마나 효율적인 슛을 날려 '골'이라는 실리를 정말 챙길 수 있는가 하는 가장 단순한 '축구의 승리 방식' 그것으로의 귀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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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2018 러시아 월드컵 16강 3경기 결과(1일 오후 11시, 루즈니키 스타디움, 모스크바)

★ 러시아 1-1 스페인 [득점 : 아르톰 주바(41분,PK) / 이그나셰비치(11분,자책골)]
- 연장전 후 승부차기 4-3으로 러시아 8강 진출!
- 관중 : 7만8011명

◎ 러시아 선수들(감독 : 스타니슬라프 체르체소프)
FW : 알렉산드르 골로빈, 아르톰 주바(65분↔페도르 스몰로프)
MF : 유리 지르코프(46분↔블라디미르 그라나트), 달레르 쿠자예프(97분↔알렉산드르 에로킨), 로만 조브닌, 알렉산더 사메도프(61분↔데니스 체리셰프), 마리오 페르난데스
DF : 페도르 쿠드랴쇼프,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 일리야 쿠테포프
GK : 이고르 아킨페예프

◎ 스페인 선수들(감독 : 페르난도 이에로)
FW : 디에고 코스타(80분↔이아고 아스파스)
AMF : 마르코 아센시오(104분↔로드리고), 이스코, 다비드 실바(67분↔안드레스 이니에스타)
DMF : 세르히오 부스케츠, 코케
DF : 호르디 알바, 세르히오 라모스, 헤라르드 피케, 나초(70분↔다니 카르바할)
FW : 다비드 데 헤아

◇ 주요 기록 비교
유효 슛 : 러시아1개, 스페인 9개
막힌 슛 : 러시아2개, 스페인 10개
코너킥 : 러시아 5개, 스페인 6개
프리킥 : 러시아 6개, 스페인 20개
오프 사이드 : 러시아 1개, 스페인 1개
공 점유율 : 러시아 26%, 스페인 74%
패스 성공률 : 러시아 71%(202/285개), 스페인 91%(1029/1137개)
뛴 거리 : 러시아 146km, 스페인 1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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