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한국 시각) 러시아 볼보그라드에서 진행된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16강 진출을 확정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자축하고 있다.

28일(한국 시각) 러시아 볼보그라드에서 진행된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16강 진출을 확정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자축하고 있다. ⓒ 연합뉴스/AP


일본이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상처뿐인 영광'에 불과했다. 명예를 포기하고 결과를 얻는 데는 성공했으나 돌아온 것은 박수가 아닌 싸늘한 야유였다.

일본은 29일(한국시간) 러시아 볼고그라드 아레나에서 열린 폴란드와 러시아 월드컵 H조 조별리그 3차전에서 0-1로 패했다. 조별리그 1승1무1패(승점 4점)를 기록한 일본은 하마터면 탈락 위기에 몰릴 뻔했지만 콜롬비아(2승1패·승점 6점)가 세네갈을 1-0으로 잡아준 덕에 조 2위로 간신히 16강행 티켓을 차지했다. 2010년 남아공 대회 이후 8년 만이다.

세네갈보다 '페어플레이' 점수에서 앞선 일본

일본은 세네갈과 골득실, 다득점, 상대전적 등에서 모두 동률을 이뤘지만 '페어플레이 점수'에서 앞서 가까스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페어플레이 점수는 옐로카드에 -1점, 경고 누적에 의한 퇴장에 -3점, 경고 누적이 아닌 곧장 레드카드를 받은 경우에 -4점을 각각 부여한다. 조별리그 3경기에서 총 6장의 경고를 받은 세네갈에 비하여 4장에 그친 일본이 페어플레이 점수에서 2점 앞서서 16강 진출의 마지막 주인공이 됐다. 이번 대회에서 페어플레이 점수로 16강행이 결정된 것은 일본이 유일하다.

정상적인 과정이었다면 일본의 16강 진출은 박수받을 자격이 충분했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호주 등 AFC를 대표하여 출전한 다른 국가들은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4년 전 브라질대회에 이어 자칫 2회 연속 조별리그 전멸의 수모를 당할 수도 있었던 아시아의 자존심을 그나마 일본이 살린 셈이었다.

아시아 국가 중 16강에 3번(2002, 2010, 2018)이나 진출한 것도 일본이 최초다. 월드컵 개막을 불과 두 달 앞두고 바히드 할릴호지치 전 감독을 경질하며 자국 출신 니시노 아키라 감독을 선임하는 모험수를 선택하고도 대반전을 일궈냈다는 점에서도 화젯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그러나 일본이 16강으로 가는 길은 결코 당당하지 못했다. 폴란드와의 최종전은 지난 26일 프랑스-덴마크의 C조 최종전과 더불어 이번 월드컵 '최악의 경기'로 남을 전망이다. 일본이 후반 14분 폴란드에 선취골을 내주고 0-1로 끌려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같은 시간 콜롬비아가 세네갈에 후반 29분 득점을 뽑아내며 1-0으로 리드를 잡았다. 이대로라면 콜롬비아가 조 1위, 일본이 2위가 되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비매너 플레이... 경기장에 쏟아진 야유

일본은 이때부터 공세를 늦추며 적극적으로 만회골을 뽑아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라인을 내리고 자기 진영에서 의미없이 볼을 돌리기 바빴다. 이대로만 끝나도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만큼 이날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의도가 명백했다.

폴란드 입장에서도 이미 승패와 무관하게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데다 먼저 리드를 잡고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었다. 두 팀 모두 사실상 정상적인 경기를 이어나가지 않으면서 곳곳에서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그러나 양팀 벤치와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유리한 상황에 놓인 팀이 점수를 관리하기 위하여 완급조절을 하거나 수비적으로 임하는 정도는 축구에서 흔한 일이지만 이날 일본의 플레이는 정도가 지나쳤다. 우리가 흔히 '안티 풋볼'이라고 비난하는 침대축구나 승부조작과 비교해도 나은 게 없어 보일 정도였다. 일본은 이날 경기후반 사실상 축구 자체를 포기했다.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를 기다려온 축구 팬들이 고작 이런 경기를 기대하며 경기장까지 달려간 것은 아닐 것이다.

콜롬비아-세네갈의 경기는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만일 콜롬비아와 세네갈이 이날 무승부를 기록했다면 일본이 아닌 두 팀이 나란히 콜롬비아와 세네갈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네갈이 한 골만 터뜨렸다면 일본도 한가롭게 공 돌리기만 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조 1위를 노리는 콜롬비아로서도 세네갈을 적당히 봐주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축구 팬들이 기대하는 '정의 구현'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일본은 폴란드에 패하고도 16강 진출이라는 실리를 챙겼다. 잘 싸우고도 탈락한 세네갈은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정작 페어플레이와는 가장 거리가 먼 비매너를 보여준 일본이 페어플레이 점수로 16강에 올랐다는 점이 아이러니 했다.

멋진 승부 보여주고도 탈락한 아시아 팀들, 더욱 아쉽다

일본의 '비겁한 16강 진출' 사태는 FIFA 규정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는 점에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경고를 적게 받았다는 이유로 더 페어플레이를 했다는 해석 자체가 잘못된 규정이다. 차라리 일본처럼 공격 의지없이 아군 진영에서 볼만 돌리는 행위야말로 축구의 재미를 해치는 '언페어 플레이'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차라리 노골적인 시간지연 플레이에 옐로 카드를 강화하는 규정을 도입했다면 어땠을까.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끝까지 멋진 승부를 보여준 다른 아시아 팀들의 탈락이 더욱 안타까워 보이는 이유다. 한국은 비록 조별리그에서는 탈락했지만 최종전에서 월드컵 우승국 독일을 2-0으로 격침하는 대회 최고의 이변을 연출하며 외신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란은 승점 4점으로 일본과 동률을 기록하고도 스페인-포르투갈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우승후보들을 상대로 막판까지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우디조차 이미 16강 탈락이 확정된 최종전에서 이집트를 잡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일본은 이번 대회 내내 운이 좋았다. 조 추첨부터 비교적 수월한 H조에 편성되었고, 첫 경기 콜롬비아전에서는 경기 초반 상대 선수의 퇴장으로 인한 페널티킥과 수적 우위라는 행운이 따라줬다. 심지어 마지막 경기에서는 패하고도 콜롬비아 덕에 기사회생했다. 논란의 여지없이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했던 2002년과 2010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결과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물론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결과에만 집착하고 감동이 없는 스포츠는 존재 의의가 없다. 일본의 16강은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가장 부끄러운 오점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