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변산>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개봉을 1주일 앞둔 영화 <변산>을 수식하는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6년 째 힙합 오디션 프로에 도전하는 주인공 학수(박정민)를 다루고 있기에 청춘 영화, 힙합 영화라고 홍보되는 중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힙합 음악이 채우고 있고, 뮤지션이 되겠다는 주인공의 목표 의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청춘 영화로 볼 법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정의한다면 <변산>을 띄엄띄엄 본 것일 터. 오히려 건달 출신 아버지(장항선)와 고향에서 삶을 꾸리고 있는 과거 친구들을 만나면서 겪는 변화를 영화가 그리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청춘'보다는 더 큰 단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을 지난 25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직접 물었다. "청춘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인생 여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그는 답했다.

<변산>의 정체성  

<변산>의 시작은 4년 전이었다. 함께 오랜 시간 영화 작업을 해온 조철현 타이거픽쳐스 대표의 추천으로 처음 시나리오를 접한 이준익 감독은 사실 긍정적이진 않았다. 본래 시나리오에선 래퍼가 아닌 단역 배우의 이야기였다. "4년 뒤에도 조철현 대표가 해보자고 해서, 그래! 각색하자고 했던 것"이라며 이준익 감독이 말을 이었다.

"<사도>를 찍었을 무렵이었나? 그때 처음 받았는데 (시나리오가) 촌스러웠다. 지금도 영화 보면 촌스럽잖나. 각색을 많이 했다. 어찌 각색해서 시나리오를 돌리려 하는데 이런, <럭키>가 개봉하더라. 그래서 엎었다. 이후 <동주>를 찍고, <박열>을 찍는데도 이 작품이 떠나지 않더라. 그 두 줄의 시가 계속 내게 남아 있었다.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노을밖에 보여줄 것이 없네'. 마침 <쇼미더머니>가 한창이었고 힙합 붐이 일고 있었다. 힙합 가수로 각색해보자는 제안해 좋다고 한 거지. 박정민(<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았다)에게 연락해서 랩 잘 하지? 너 시간 되냐? 그래서 해보게 된 것이다.  

원래 시나리오의 주제는 고향에서 (인생의) 길을 찾는다는 것었다. 계속 도망만 치던 젊은이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그 여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지 사실 래퍼는 일종의 기능일 뿐이다. 이야기의 목적은 내면의 과거와 싸우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면이라고는 해도 대상은 있기 마련이지. 학수에겐 아버지였고, 그 다음부터 쭉 이어지지 초등학교 동창 용대(고준), 짝사랑 했던 미경(신현빈) 등."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이 열거한 인물들은 모두 영화에서 래퍼로 성공하고 싶었던 학수의 발목을 잡는 존재들이다. 집안을 등한시 하고 엄마를 버린 아버지는 불치병이라는 이유로 아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이고, 학수가 괴롭혔던 용대는 동네 건달이 돼 있다. 한 사람의 흑역사가 이렇게 집대성 될 수도 있냐는 물음에 감독은 "원래 불행은 한 번에 오잖나. 인생을 요약해 보면 충분히 한 사람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라고 답했다.

금의환향 콤플렉스

<변산>을 결코 청춘영화로 생각하고 만들지 않았다는 감독의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음악영화인가? 게다가 이준익 감독이 평소에 밝혔듯 힙합 장르는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이준익 감독이 일부 긍정했다. "<라디오 스타>를 찍었지만 음악영화는 평생 찍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그가 운을 뗐다.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는 음악영화를 찍는 게 쉽지 않아서 그렇지 음악영화는 항상 해보고 싶었다. 만약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같은 영화를 따라하려 했다면 <변산>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힙합은 해외에서 건너와 한국 땅에 떨어진 것 아닌가. 우리 토양에서 잘 자란 힙합 음악이 있다고 생각한다.

록과 랩은 같으면서도 다른 게 둘 다 저항의 의미가 있지만 록은 공동체의 가치관을 노래하고 랩은 공동체의 가치관을 강조하는 걸 꼰대라고 본다. 랩은 개인의 의미를 노래하거든.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랩은 시끄러울 수 있다. <변산>에선 랩이라는 게 한 인간의 내면에 깊이 접근해서 주장하고 고백하는 음악임을 보이고 싶었다." 


힙합이 학수의 목표였다면 고향 변산은 학수가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대부분 사건은 변산에서 벌어졌고, 그곳에서 학수는 아버지와 친구들과 뒹굴며 각성한다. 그래서 고향에 대해 이준익 감독에게 물었다. 사실 급격한 도시화 이후 시골 혹은 고향이라는 공간은 젊은 세대에겐 거의 없다시피 한 개념이지 않나. 이 질문에 이준익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게 물리적 고향은 의미 없는 곳인 게 맞다. 정말로 구석진 시골이 아니라면 본인들이 태어난 곳 대부분은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고, 많이 변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말한 건 물리적 고향이 아닌 정서적 고향이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 제목도 'Sunset In My Hometown'이다. 어려서 자의식이 생길 때까지 사람은 부모나 친구, 선배와 후배 등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게 일종의 정서적 고향이다. 그걸 평생 안고 살아가곤 한다. 학수는 물리적 고향도, 정서적 고향도 존재하는 사람인데 물리적 고향에 가서 정서적 고향을 만난 셈이지.

그래서 이 영화의 장소가 변산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다! 목포인들 뭐 어떤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와 정서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고향일 것이다. 그래서 금의환향 콤플렉스를 영화에서 언급한 것이다. (물리적) 고향이 없는데 무슨 금의환향이냐고?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이나 어렸을 때 친구들 모임을 생각해보자. 아직 인생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모임에 가기를 주저하곤 하잖나. 그 콤플렉스가 있는 셈이지." 


이준익 감독은 시나리오를 쓴 김세겸 작가를 언급했다. "작가의 고향이 바로 변산반도 줄포라는 곳이고, 고깃배가 드나들던 번성했던 곳이었는데 자연 침식으로 뻘이 생기면서 폐항이 된 곳"이라며 "영화에 나오는 시를 본인이 쓴 건데 촌스러운 정서 안에 그만의 독창성이 확실하게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 독창성이 힙합과 묘하게 정서적으로 교감했다는 게 이준익 감독의 결론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꼰대론'

 영화 <변산>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변산>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감독의 의도와 기획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잘 해내는 배우가 없다면 빛이 바래기 마련. 이준익 감독은 박정민과 김고은을 언급했다. <동주> 때 이미 송몽규 역으로 가능성을 보인 박정민을 보다 넓은 장에 풀어놓고 싶었다는 감독의 복안이 있었고, 김고은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내심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동주> 회식 때 노래방에 갔는데 정민이가 랩만 하더라. 그래서 <변산>을 래퍼로 각색할 때 전화했다. 그가 갖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다. 감독은 배우를 볼 때 해당 캐릭터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동주> 때는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 모습이 박정민이 아닌 송몽규였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도 정민이가 안 보이잖아.

그리고 김고은은 자기 역할을 위해 스스로 살을 8kg나 찌웠다. 내 입장에선 고맙지. 얼굴이 공갈빵이 돼가지고 나타났어! 본인이 영화를 대하는 자세이고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고 본다. 배우는 이유 없이 살을 찌우지 않는다. 학수를 짝사랑하던 존재감 없는 선미 역이지 않나. 그 반대편엔 학수가 짝사랑하던 미경이가 있었고. 미경이가 더 반짝거리게 나와야 하는데 실제 인지도는 고은이가 높다. 그걸 지우려 한 것이다. 김고은은 존재감 없음을 영화에서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영화 <변산> 관련 사진.

영화 <변산> 관련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이처럼 이준익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연기 지시를 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디렉션을 하지 않아도 영화가 된다는 걸 보이고 싶다"며 이준익 감독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쓸데 없이 권위 내세우지 않기. 이런 태도는 <변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학수가 아버지의 반성과 사과를 받지 않다가 끝내 주먹으로 그를 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관객에 따라선 '그래도 아버지인데 어떻게 때릴 수 있냐'며 불편해 할 수도 있는 지점이다.

"기성세대를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혹은 영화에서 용서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점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학수가 마지못해 아버지를 용서하는지 자발적으로 하는지가 중요하다. 학수는 아버지가 두 번 사과하는데 받지 않는다. 그걸 선미는 다 목격했고, '넌 아버지랑 똑같은 새끼야'라고 한다. 그 상황을 봤으니 선미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학수가 받지 않자 아버지는 어떻게 했나. (학수가 주먹으로 아버지를 치는) 그 장면은 잘 보면 학수가 때리는 게 아닌 아버지가 학수에게 맞으려고 애를 쓰는 신이다. 서툴게 사과했는데 아들이 안 받았어, 두 번이나. 곧 죽을 것을 아는 아버지는 '값나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는 살지 말자'던 건달이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 나를 밟고 무거운 과거를 넘어가라!' 이게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태도였던 것이다.

만약 안 때리고 학수가 그냥 무시하거나 피했다면? 걔도 꼰대가 되는 것이다. 꼰대를 피하지 말라! 심지어 눈앞에 꼰대가 자기를 쳐보라고 하지 않나. '꼰대를 주먹으로 날려라, 자신에게 솔직해져라' 그런 의미로 볼 수 있다."


인물들의 위악적 태도로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된다. 이준익 감독은 <변산>이 세대 간 화해를 강요한 게 아닌 자연스럽게 권하는 영화임을 분명히 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몇 가지 갈래로 관객에 따라 이입할 여지가 크다. 누군가는 가족 관계에 몰입할 것이고, 누군가는 선미의 마음을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는 학수에게 몰입할 것이다.

그래서 <변산>을 관람할 때 박정민이 직접 썼다는 랩의 가사와 후반부 학수 아버지를 맡은 배우 장항선이 남기는 유언에 집중해 보자. 둘 중 하나는 분명 마음을 건드릴 것이다.

 영화 <변산>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변산>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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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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