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잘싸'는 '졌지만 잘 싸웠다'의 줄임말이다. 흔히 승부의 세계에 2~3등은 필요없다고 하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패자들이 상처뿐인 승자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경우도 있다. 부득이한 실력차 혹은 불운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보여준 패자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가 서서히 종반을 향해가면서 16강 진출 팀의 윤곽이 하나둘씩 가려지고 있다. 총 9팀이 조별리그 통과를 확정했다. A조의 우루과이-러시아, B조의 스페인-포르투갈, C조의 프랑스, D조의 크로아티아, F조의 멕시코, G조의 벨기에-잉글랜드가 주인공이다. 유럽이 무려 7팀으로 절대강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북중미의 멕시코와 남미의 우루과이가 자존심을 세웠다.

탈락이 확정된 것도 9팀이다. A조의 사우디-이집트, B조의 이란-모로코, C조의 페루, E조의 코스타리카, G조의 튀니지-파나마, H조의 폴란드 등이 아깝게 짐을 싸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프리카가 3팀으로 가장 많고 아시아와 북중미가 각 2팀, 남미와 유럽이 각 1팀씩 낙마했다.

폴란드가 유럽팀이자 톱시드팀으로 유일하게 탈락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됐지만, 전반적으로 이번에도 '제3세계'(비유럽-남미) 국가들의 한계가 두드러진 결과였다. 또다른 축구 강국들이 몰려있는 남미도 현재 우루과이를 제외하면 브라질-아르헨티나-콜롬비아 등 전통의 강호들이 모두 최종전을 앞두고 16강행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16강 진출에 성공한 승자들에게 더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지만 잘싸운 패자들의 분전도 돋보였다. 특히 최종전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자국의 자존심을 지킨 모로코-이란-사우디 등에게 박수가 쏟아지고 있다.

스페인-포르투갈 상대로 한 이란-모로코의 분전이 남긴 교훈

 26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B조 3차전 포르투갈과 이란의 경기.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란의 오미드 에브라히미와 공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26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B조 3차전 포르투갈과 이란의 경기.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란의 오미드 에브라히미와 공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당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뚜렷한 양강 구도가 예상되었던 B조를 막판까지 죽음의 조로 몰고가는 대혼전으로 만든 것은 이란과 모로코의 선전 덕분이었다.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이 이끄는 이란은 비록 1승1무 1패로 승점 4점을 따고도 조 3위에 그쳐 탈락한 팀이 됐다. 첫 경기에서 모로코를 자책골로 잡아내는 행운을 누렸던 이란은 유럽 정상권의 강호로 꼽히는 스페인-포르투갈을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 않는 특유의 '질식축구'를 과시하며 월드컵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최종전에서는 득점왕을 노리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PK를 막아내는 등 끈질긴 승부로 포르투갈을 탈락 위기까지 몰아가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역시 공격력의 한계였다. 이란은 이번 대회 2실점밖에 내주지 않았으나 골도 2골을 뽑는 데 그쳤다. 그나마 한골은 상대 자책골, 한골은 PK로 필드 플레이에 의한 득점은 전무했다. 서아시아 특유의 강력한 피지컬과 케이로스 감독이 7년을 다져온 수비 조직력은 월드컵에서도 위력을 발휘했지만 선수 개개인의 결정력과 기술이 요구되는 공격력에서는 대형 선수와 세밀한 부분 전술의 부재라는 약점을 다시 드러냈다.

모로코는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실력 대비 운이 없었던 팀으로 꼽힌다. 이란과의 첫 경기에서 내용상 우위를 점하고도 막판 자책골로 분루를 흘려야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상대로는 모두 VAR 판독 결과로 골 판정이 바뀌면서 치명적인 손해를 봤다.

호날두의 프리킥 포르투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0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B조 모로코 경기에서 프리킥하고 있다. 2018.6.20

▲ 호날두의 프리킥 포르투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지난 20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B조 모로코 경기에서 프리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포르투갈전에서 수비수 페페의 노골적인 핸드볼이 나왔지만 파울이 선언되지 않아 동점 페널티킥 기회를 놓쳤다. 스페인전에서는 2-1로 승리를 눈앞에 둔 막판 이아고 아스파스에개 내준 동점골이 처음에는 부심의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으나 VAR을 통해 판정이 번복되며 뼈아픈 동점골을 허용했다. 모로코로서는 이미 16강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기는 했으나 거함 스페인을 잡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마저 날렸으니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전에서 이란을 포르투갈과 1-1, 모로코는 스페인과 2-2로 비겼다. 사실상 이란과 모로코가 모두 승리할 기회가 있었던 경기였고 우승후보 포르투갈 혹은 스페인이 탈락하는 상황도 나올 수 있었다. 이번 러시아월드컵 최고의 반전드라마가 나올뻔 했던 경기였기에 패자들의 남긴 여운이 더 짙었다. 승리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16강 진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국 언론으로부터 저조한 경기력으로 뭇매를 맞았던 것과도 대조를 이룬다.

동네북이 될 뻔했던 사우디도 최종전에서 이집트를 꺾고 자존심을 지켰다. 첫 2경기에서 각각 러시아와 우루과이에 패하며 일찌감치 조별리그에서 광탈했던 사우디와 이집트였지만 최종전에서 멋진 승부를 펼치며 박수를 받았다. 사우디는 후반 추가시간 극적인 결승골을 넣으며 유종의 미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사우디가 승점 3점을 획득하면서 이번 대회에 출전한 아시아 5개국(호주 포함) 중 한국을 제외하고 모두 승점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졌잘싸'라는 말을 들으려면...

탈락팀들의 분전은 한국축구에게도 메시지를 준다. 한국은 이미 스웨덴과 멕시코에 잇달아 패하며 아직까지 승점 1점도 획득하지 못했다. 조별리그 첫 두 경기에서 연달아 패한 것은 1998년 프랑스 대회 이후 20년 만이다. 현재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최악의 성적이다. 그나마 2패를 당하고도 산술적으로 16강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불행 중 다행이지만, 마지막 남은 최종전 상대가 월드컵 우승국인 독일이라 반전의 가능성이 희박한 게 사실이다. 만일 독일전에서 패배할 경우 1990년 이탈리아 대회 이후 28년 만에 본선을 3전 전패로 마감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현재 신태용호를 바라보는 팬들의 분위기는 승리나 16강에 대한 기대보다도 그저 '완패만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 만큼 기대치가 낮다. 답답한 공격력과 불안한 수비조직력, 벤치의 알 수 없는 용병술, 선수들의 자신감 상실이 겹쳐서 비관적인 분위기만 감돌고 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모로코나 사우디는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선수들이 투지를 잃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모로코가 스페인을 패배 일보 직전까지 몰고가리라고 예상한 이들이 몇이나 될까. 공은 둥글고 축구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한국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1998년 프랑스 대회에서 한국은 멕시코와 네덜란드에서 먼저 2패를 당하고 차범근 감독까지 대회 중도에 경질되며 최악의 분위기에 맞이한 벨기에전에서 선수들의 온몸을 던지 투혼을 발휘하며 1-1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설사 실력이 모자라서 패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부디 마지막 경기에서는 최소한 '졌잘싸'라는 박수라도 받을 수 있는 대표팀의 모습을 기대하는 이유다.

[월드컵] 서로 격려하는 한국 선수들 (로스토프나도누=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나노두 로스토프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 1-2로 패한 한국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서로 격려하는 한국 선수들 지난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나노두 로스토프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 1-2로 패한 한국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러시아월드컵 이란 축구대표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