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사를 만나 자신의 운명을 바꾼 레이디, 둘시네아 지난 5월 2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뮤지컬 배우 최수진을 만났다. 이번 시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둘시네아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수진. <뉴시즈>의 캐서린이나 <사의 찬미> 윤심덕처럼 굳세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던 그녀가 새로운 역할에 도전했다.

▲ 기사를 만나 자신의 운명을 바꾼 레이디, 둘시네아 지난 5월 2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뮤지컬 배우 최수진을 만났다. 이번 시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둘시네아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수진. <뉴시즈>의 캐서린이나 <사의 찬미> 윤심덕처럼 굳세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던 그녀가 새로운 역할에 도전했다. ⓒ 곽우신


스페인의 어느 지하 감옥. 별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이곳은 기약 없이 끌려갈 날만을 기다리는 죄수들의 공간이다. 감옥 구석에는 어떤 여자 죄수가 앉아 있다. 그의 죄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그저 꺼질 듯 말 듯 간신히 제 온기를 지키고 있는 화로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이 감옥의 유일한 빛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만 간신히 그 반짝임이 머무른다.

그 공간에 낯선 남자 둘이 들어온다. 미겔 드 세르반테스와 그의 친구는 종교재판을 앞두고 지하감옥으로 끌려왔다. 부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귀족, 시인, 극작가 그리고 세금징수원인 세르반테스는 감옥 속 신사 숙녀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관례에 따라 죄수들은 신입 죄수들을 심문하고 그들만의 재판을 시작하려 한다. 세르반테스의 목을 조르던 여자 죄수는 지하감옥 죄수들의 실질적 지배자인 도지사의 명에 따라 그를 풀어준다.

국법에 따라 교회에도 세금을 징수하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세르반테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무의미한 원론을 읊는 그를 보다가 견디지 못한 다른 죄수가 그를 기소한다.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그리고 고지식한 인간으로.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원고가 죄수들에게 압수당해 불쏘시개로 쓰일 처지에 놓이자, 세르반테스는 이 감옥 안의 재판을 받겠다고 나선다. 대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형태인 '공연'을 통해서.

도지사는 재미있겠다며 그의 변론을 허락한다. 이 소동의 와중에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화로 속 침잠하는 불꽃만 바라보던 여자 죄수. 감옥 속 죄수들에게 자신의 극본에 어울리는 역할을 하나씩 맡기던 세르반테스는 이 죄수에게도 손을 내민다. '아주 특별한 여인'을 맡아달라고. 고개를 돌리며 세르반테스의 손길을 거부하던 여인은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이 감옥 속 공연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공연이 시작된다.

최수진, 이름 없는 죄수가 되다

실제 최수진이 가장 많이 닮은 캐릭터 "도지사가 연기하는 여관 주인이요! 일단 이 캐릭터가 먹는 걸 되게 중요시하잖아요 (웃음). 돈키호테 밥 먹는 것도 신경써주고. 그리고 누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리액션도 같이 해 주고, 공감해주고, 막 흥을 북돋아주고. 삭막한 인생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다른 사람들을 챙겨주는? 이런 모습들이 많이 비슷한 것 같아요."

▲ 실제 최수진이 가장 많이 닮은 캐릭터 "도지사가 연기하는 여관 주인이요! 일단 이 캐릭터가 먹는 걸 되게 중요시하잖아요 (웃음). 돈키호테 밥 먹는 것도 신경써주고. 그리고 누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리액션도 같이 해 주고, 공감해주고, 막 흥을 북돋아주고. 삭막한 인생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다른 사람들을 챙겨주는? 이런 모습들이 많이 비슷한 것 같아요." ⓒ 곽우신


"저는 이 역할을 사실 11년 동안 꿈꿔왔었어요. 그래서 1막 마지막에 '임파서블 드림(Impossible Dream)'이 항상 매회 불리지만, 저에게는 정말 '이루어진 꿈'을 이 무대 위에서 여러분께 증거하고 있었거든요. 여러분 모두 꿈이 있으시겠지만, 저를 보시면서 '아, 나도 꿈꾸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지난 3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서울 공연 마지막날. 여자 죄수 그리고 극 중 극의 알돈자 아니 둘시네아를 맡은 배우 최수진은 관객들 앞에 이렇게 인사했다. 최수진에게 <맨 오브 라만차>라는 공연 자체가 꿈이었다. 최수진은 배우지망생 시절 윤공주 배우의 알돈자를 보고 이 역할을 해내리라는 소망을 가슴 속에 품었다. 그리고 2018년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 역에 윤공주 배우와 더블 캐스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많은 배우들 중에서도 윤공주 언니와 함께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았죠. 그런데 이제는 친해져서 좀 무뎌졌어요. (웃음) 밖에서 사적으로 만나서 커피까지 마실 수 있는 사이가 될 정도로 언니가 정말 편하게 해 주셔서 좋았고, 너무 고맙죠. 제가 연습 기간에 한참 런을 시작할 때, 발에 깁스를 해서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언니가 제 대신 2번씩 런을 해 주셔서 너무 죄송하고 신경이 쓰였었어요. 그런데 언니가 제 회복이 먼저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셔서, '진짜 천사가 아닌가' 생각 했어요. (웃음)

<맨 오브 라만차>는 윤공주 배우님 이름 하나 보고 간 작품이에요. 10년도 더 전에, 제가 아직 지망생일 때 언니의 공연을 보고 '저 배우는 뭐지?'하는 마음에 집에 와서 열심히 찾아봤죠.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소극적이고, 여린 사람이었는데도 집에서 맨날 알돈자의 노래를 연습해 보고 그랬어요.

그만큼 꿈의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 보다는 하고 싶은 역할을 맡고 싶어요. '나 같지 않은 것', '스스로 만들어서 꺼내야 하는 캐릭터'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알돈자도 저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죠. 누가 보기에는 '쉬운 길 가지, 왜 굳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요. 실제로 듣기도 했어요. (웃음) 주변에서 알돈자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시작하기 전에는 스스로 조금 부담스럽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행복하고, 재밌어요."

배우 최수진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주체적이고 강인한 캐릭터를 소화한 경험이 여럿 있다. <록키호러쇼>의 자넷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성격이 급격하게 변하는 이이고, <어쩌면 해피엔딩>의 클레어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능동적인 캐릭터였다. <사의 찬미>의 윤심덕은 국내 뮤지컬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고, <뉴시즈>의 캐서린도 주변의 편견에 맞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기자였다. 그러나 <맨 오브 라만차>에 합류하는 건 최수진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이유이다.

"아무래도 이때까지 했던 역할 중에서는 제일 강하잖아요. 우리나라 여자 배우가 하는 역할 중에서는 가장 거친 캐릭터가 아닐까 해요. 그래서 아마 모든 사람이 의심했을 것 같아요. '잘 해낼까?'하고 의구심을 가지셨을 것 텐데, 기대가 별로 없으셔서 '잘한다'라고 봐주시는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저는 매회 스스로에게 의심을 가지며 (웃음) 하고 있어요. 사실 전 매 공연이 행복하거든요. 그런데 알돈자는 마냥 행복한 캐릭터가 아니니까, '내 심신이 지쳐 있고 덜 행복하다면 알돈자가 더 잘 묻어날 수 있을 텐데'하는 아쉬움도 있고…. 그래서 관객 분들이 봐주시는 것 보다 스스로를 더 엄격히 평가하고 있어요."

이름 없는 죄수, 알돈자가 되다

기사를 만나 운명을 바꾼 레이디, 둘시네아 지난 2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뮤지컬 배우 최수진을 만났다. 이번 시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둘시네아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수진. <뉴시즈>의 캐서린이나 <사의 찬미> 윤심덕처럼 굳세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던 그녀, 새로운 역할에 도전했다.

ⓒ 곽우신


배우 최수진의 무기 "긍정적인 힘? (웃음) 긍정의 힘 덕분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최수진이 연기하는 알돈자는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 주셨으면 좋겠어요. 공연을 보고 나가는 관객 분들이 어떠한 긍정적인 힘도 얻어 가시기를 항상 바라고 있죠."

▲ 배우 최수진의 무기 "긍정적인 힘? (웃음) 긍정의 힘 덕분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최수진이 연기하는 알돈자는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 주셨으면 좋겠어요. 공연을 보고 나가는 관객 분들이 어떠한 긍정적인 힘도 얻어 가시기를 항상 바라고 있죠." ⓒ 곽우신


상술한 것처럼, <맨 오브 라만차>는 극 중 극의 형태를 취한다. 이름 없는 여죄수는 세르반테스의 제안을 수락해 그의 변론 속 술집 몸종 알돈자로 분한다. 하기 싫었던 것치고는 죄수는 알돈자로 첫 등장할 때부터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자신을 희롱하고 추행하는 이들에게 굽히지 않고 거세게 받아치는 억센 면모를 지녔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똥통 속 구더기'에 비유하고는 한다.

"공연 때마다 좀 달라지는 편이예요. 사실 이게 대본에도 정해져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여죄수의 내면과 행동 동기에 대해 설정했던 것들을 조금씩 바꿀 때, 관객 분들께서 이 미묘한 차이를 잘 알아채지 못하시는 경우도 있고요. 사실 이게 초반 20~30분 동안 계속 진행되다 보니 극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극중극에 잘 집중하지 못하시거나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제 동생이 공연 보러 와서는 '알돈자가 여죄수가 연기하는 역할이었어?'라고 하더라고요. '저 죄수 원래 배우하던 사람이냐, 왜 이렇게 잘하느냐'라고…. (웃음)

저는 극이 진행되면서 죄수가 알돈자의 모습으로 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둘이 많이 닮아 있는 거겠죠? 차별 당하고, 상처받고, 이런 부분에서 서로 닿아 있는 인생이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 즉흥으로 연기할 때에도 알돈자의 모습을 잘 연기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꼭 마지막 시퀀스가 아니라 그 앞에도 죄수가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작품을 공부하고 분석하기 전에는 사실 이 역할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작품을 맡고, 연기를 하며 알돈자를 더 깊이 이해하고 나서는 여자 죄수가 극을 여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느껴요."

그런 알돈자를 보자마자 돈키호테는 그를 둘시네아라고 칭한다. 돈키호테는 현실을 직시하는 이가 아니라 되어질 모습을 흠모하는 이이다. 그에게 알돈자는 고귀한 둘시네아, 자신을 다 바쳐 섬기며 승리의 영광을 돌릴 레이디이다. 처음에는 그저 미친 늙은이의 헛소리로 여기던 알돈자는 점차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사내라면 자신에게 원하는 것 똑같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가 보낸 서신을 소중히 여긴다. 그의 꿈을 조롱하고 침을 뱉지만, 돈키호테는 그를 억지로 붙잡지도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할 뿐.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돌아보지 않고, 멈추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1막 No.14 '불가능한 꿈(Impossible Dream)' 중에서


알돈자는 '운명의 길'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자 돈키호테는 '불가능한 꿈'을 노래한다. 순간, 돈키호테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미친 기사가 아니라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세르반테스가 된다. 세르반테스가 이름 없는 죄수에게 불러주는 노래인 셈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알돈자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일지 모른다. 알돈자의 눈에 그 노래를 부를 때의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며 영광의 길을 달리는 기사였다. 이름 없는 죄수의 눈에 화로의 불꽃이 아닌 별빛이 담긴 그 순간.

알돈자, 둘시네아가 되다

<맨 오브 라만차> 덕분에 성장한 부분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이전에는 좀 전전긍긍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이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하지’하는 걱정이랑 긴장도 공연 끝날 때까지 계속 했고요. 이상하게 이 작품은 대극장, 큰 작품인데도 부담과 걱정과는 별개로 ‘이젠 좀 여유가 생겼구나’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저를 믿어 주시고 항상 지지해 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하죠."

▲ <맨 오브 라만차> 덕분에 성장한 부분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이전에는 좀 전전긍긍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이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하지’하는 걱정이랑 긴장도 공연 끝날 때까지 계속 했고요. 이상하게 이 작품은 대극장, 큰 작품인데도 부담과 걱정과는 별개로 ‘이젠 좀 여유가 생겼구나’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저를 믿어 주시고 항상 지지해 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하죠." ⓒ 곽우신


그러나 돈키호테 덕분에 꿈을 꾸게 된 알돈자에게 돌아온 건 엄청난 크기의 폭력과 상처였다. 자신의 원수이기도 한 노새끌이들의 상처를 돌봐주러 갔지만, 선의와 꿈은 배신과 좌절로 돌아왔다. 다시 만난 돈키호테에게 알돈자는 소리친다. 당신이 제일 잔인하다고, 제일 꿈꾸게 하지 말라고. 마침 그 앞에 나타난 거울의 기사에 의해 돈키호테도 무너진다. 알돈자의 꿈도 무너졌고, 그 꿈을 처음 보여준 돈키호테도 무너졌다. 그런데 알돈자는 굳이 늙은 지주 알론조 키하나로 돌아간 돈키호테를 찾으러 간다. 그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이성적인 현실만을 직시한다면 '알돈자에게 왜 이렇게 커다란 변화가 생겼나?'라고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알돈자의 마음속에 항상 있었던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돈키호테로 인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알돈자의 가슴 속에 불꽃이 터져서, 어떻게 해도 꺼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걸 끝내고 싶어'라는 마음보다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원망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남은 상처도 있지만, 알돈자를 '둘시네아'라고 불러줬던 것을 한 번 더 듣고 싶은 열렬한 마음도 있는 거죠.

들으러 왔지만, 결국 듣는 게 아니라 제(알돈자)가 말을 하게 되잖아요. 그 장면에 담긴 의미가 뭐라고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것 같아요. 그 장면에서 알돈자가 돈키호테에게 예전의 영광과 열정을 다시 한 번 이야기 해 달라고 하는 건, 그녀가 그 마음을 다시 느끼고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돈키호테가 말해주지 않으니 제가 말하게 된 거죠. 예전에 꺼졌다고 생각했던 불꽃이 저도 모르게 타오르고 있는 거죠."


극 중 극의 마지막 시퀀스는 '즉흥극'이라는 설정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거울의 기사 앞에 쓰러지고 현실을 깨닫게 되는 데까지밖에 작품을 쓰지 못했다. 그 뒤는 완성하지 못한 채였고, 종교재판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이야기는 지금까지 극을 함께 이끌어 온 죄수들과 즉흥으로 풀어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알돈자의 대사는 세르반테스가 쓴 대사들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 앞에 돈키호테를 찾아온 알돈자, 그 알돈자가 뱉는 말들은 알돈자 자신 그리고 그를 연기하는 죄수의 사상이고 신념이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 "'날 다른 이름으로 불렀잖아요'를 제일 좋아해요. 세르반테스에게 '기억 좀 해봐요'라고 다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알돈자의 여러 감정을 그 말 하나에 다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울컥해요."

▲ 가장 좋아하는 대사 "'날 다른 이름으로 불렀잖아요'를 제일 좋아해요. 세르반테스에게 '기억 좀 해봐요'라고 다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알돈자의 여러 감정을 그 말 하나에 다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울컥해요." ⓒ (주)오디컴퍼니

"저는 <맨 오브 라만차>가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알돈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알돈자는 돈키호테의 환상을 위해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알돈자가 돈키호테를 감화시키기 위해 마지막에 찾아간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 거죠. 저는 알돈자가 돈키호테의 조력자라기보다는, 알돈자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돈키호테를 선택한 것 같아요. 너무 제 위주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웃음) 알돈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듣는' 알돈자에서 '말하는' 알돈자로 바뀌잖아요. 돈키호테는 이미 완성된 인물이었어요.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알돈자는 둘시네아가 돼죠. <맨 오브 라만차>의 진짜 주인공은 둘시네아 아닐까요? (웃음)"

죽을 시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알론조 키하나에게 알돈자는 눈물로 호소한다. 그때의 그 영광을 다시 내게 보여달라고, 다시 한번 나를 둘시네아로 불러달라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알돈자는 '불가능한 꿈'과 '둘시네아'를 불러준다. 노래를 듣던 알돈자는, 노래를 부르는 둘시네아가 된다. 레이디의 부름에,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다는 기사가 부활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돈키호테가 돌아왔고, 그는 '맨 오브 라만차'를 열창하다가 끝까지 부르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그러나 알돈자는 믿는다. 죽은 건 알론조 키하나이지 돈키호테가 아니라고. 돈키호테는 살아있다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둘시네아라고.

"저는 둘시네아가 행복했을 것 같아요. 이미 가슴 속에 불꽃이 터졌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거라면 '내 이름은 둘시네아예요'라고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너무 동화 같은 상상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귀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거든요. 더 이상 예수님은 우리 앞에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이 저희의 현실을 이적과 기적으로 바꿔 주시지 않는데도 계속 우리는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따라가잖아요. 돈키호테 때문에 알돈자의 현실이 급격하게 바뀌진 않겠지만,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둘시네아는 자신을 만지려는 페드로의 손목을 잡을 것이고, 페드로의 짤랑거리는 돈주머니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던 삶을 살지 않겠죠."

작품의 마지막. 극 중 극이 끝나고 한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재판에 회부되는 인기 있는 피고인 세르반테스는 종교 재판을 위해 지하 감옥을 나선다. "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라고 외치며 "용기를" 주문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둘시네아가 제일 먼저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노래 '불가능한 꿈'을 앞서 선창하기 시작한다. 함께 세르반테스의 이야기 위에서 연기하고 노래했던 죄수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쌓아가며, 지하 감옥을 울리는 합창이 된다. 세르반테스가 걷는 계단은 화형 위기에 놓인 죄수의 길이 아니라, 잡을 수 없는 별을 향하여 걷는 길이 된다. 그를 바라보는 죄수들의 눈은 별빛으로 반짝인다.

둘시네아, 라만차의 기사가 되다

최수진에게 <맨 오브 라만차>는? <맨 오브 라만차>는 저에게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요?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이런 분장을 하고 설 수 있는 캐릭터를 잘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 저는 언제나 어떤 캐릭터든 소화할 수 있는 스케치북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어떤 이미지든 어울리는 그런 배우이고 싶거든요. 제가 어떤 새로운 모습도 맡을 수 있는 배우라고 이 작품 후에도 느껴주셨으면 좋겠고요. 이 역할을 통해 한 번에 많은 계단을 밟아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굉장히 어려운 역할이다 보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성장한 것 같은 느낌도 있고요.

▲ 최수진에게 <맨 오브 라만차>는? <맨 오브 라만차>는 저에게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요?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이런 분장을 하고 설 수 있는 캐릭터를 잘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 저는 언제나 어떤 캐릭터든 소화할 수 있는 스케치북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어떤 이미지든 어울리는 그런 배우이고 싶거든요. 제가 어떤 새로운 모습도 맡을 수 있는 배우라고 이 작품 후에도 느껴주셨으면 좋겠고요. 이 역할을 통해 한 번에 많은 계단을 밟아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굉장히 어려운 역할이다 보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성장한 것 같은 느낌도 있고요. ⓒ 곽우신


<맨 오브 라만차>는 이처럼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지고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진부하고 폭력적인 작품이다. 400년 전(1615년)에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돈키호테>, 이를 원작으로 삼아 50년도 더 전(1964년)에 쓰인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국내에서는 2005년 초연 이후 이번 2018시즌이 8번째 공연이다.

오래된 공연인 만큼, 이 작품에는 강간을 통해 여성의 고통을 전시하는 낡은 클리셰가 존재한다. 심지어 그 전시의 수위가 지나치게 강하고 폭력적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왔다. 이번 시즌에서는 알돈자가 성폭행 당하는 장면의 묘사를 다소 순화시켰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현재진행형이다.

"여성으로서 그런 문제 제기에 대해 굉장히 공감해요. 알돈자에게 '순결한 성 처녀'라느니, '바느질에 수를 놓느라' 같은 부분을 보면 '창녀 혹은 성녀'에 갇힌 게 사실이에요. 시대적인 배경상 어쩔 수 없이 설정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맨 오브 라만차>뿐만이 아니라, 여성이 '약자'로 표현되며 고통 받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작품을 볼 때 인간 최수진으로서 굉장히 속상하죠.

지금 작품을 연기할 때는, 이번에 수위가 조절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변화가 생긴 건 아주 고무적이에요. 극에 있어서 이 장면은 분명히 어떠한 장치로서 작용되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이렇게 바뀌는 건 정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맨 오브 라만차>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고전으로서 앞으로도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시대에 뒤처진 작품이 되어 더 이상 소구되지 않고 박물관에 남게 될까. 지금 시점에서 예단할 수는 없다. 만약 <맨 오브 라만차>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계속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게 굳이 '화냥년'이라는 '없던' 대사를 극 중에 추가하는 프로덕션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토록 작품의 가치를 믿고 진정성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들 덕분일 것이다. 극을 열고 닫는 여자 죄수처럼, 마지막에 불가능한 꿈을 가장 먼저 부르는 그처럼, 최수진은 또 한 명의 '라만차의 기사'였다.

3일로 서울 공연을 끝낸 <맨 오브 라만차>는 14일부터 16일까지 울산 현대 예술회관 공연까지 마치고 22일부터 24일까지 김해서부문화센터 하늬홀에서 관객을 맞는다. 7월 6일부터 8일까지 성남아트센터,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부산 소향씨어터,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고양 아람누리,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인천 문화예술회관,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광주 문화예술회관 공연으로 이어진다.

"몇 천 명의 관객 분들이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하실 수는 없겠죠. 그래도 다들 마음속에 무언가 하나씩 생각하고,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 무언가가 <맨 오브 라만차>의 여성혐오적 요소에 대한 비판이나 불호점이라도 말이에요. <맨 오브 라만차>가 비판적이더라도 관객이 계속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관객 분들의 생각과 후기를 존중합니다! (웃음)"

둘시네아에게 하고 싶은 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게 제일 커요. 제가 행복하니까, 최수진으로 둘시네아를 연기하면서 너무 행복했거든요."

▲ 둘시네아에게 하고 싶은 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게 제일 커요. 제가 행복하니까, 최수진으로 둘시네아를 연기하면서 너무 행복했거든요." ⓒ (주)오디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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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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