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MC인 방송인 송해가 향년 95세 나이로 8일 별세했다. 지난 2018년 진행된 인터뷰에는 방송인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에피소드, 못다 이룬 꿈, 그리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편집자말]

 

 송해는 무대에 오르며 관중들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띄웠다.

송해는 무대에 오르며 관중들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띄웠다. ⓒ 이희훈

 

 인천 미추홀구 주민들이 막대풍선과 노란색 모자를 쓰고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의 노래에 맞춰 흥겨워하고 있다.

인천 미추홀구 주민들이 막대풍선과 노란색 모자를 쓰고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의 노래에 맞춰 흥겨워하고 있다. ⓒ 이희훈

 

 송해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자 시작된 밴드의 연주에 관중석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송해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자 시작된 밴드의 연주에 관중석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 이희훈


"전구우우우우욱!"

구성진 송해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장이 크게 들썩였다. 모인 관객들은 그제야 "노래자랑!"이라고 힘차게 합창했다. 송해의 한 마디에 사방이 술렁댔다.

"전국에 계신 전국노래자랑 가족 여러분 한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전국노래자랑> 사회 담당,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안녕하세요! 많이들 오셨네요, 모두들 건강하시죠?"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크게 손을 뻗어 인사를 건네자 관객들도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어마어마한 무대 장악력이었다. 한 관객은 송해를 두고 "송해 오빠"라 부르면서 환호하고 수줍게 웃었다.

오로지 송해를 보기 위해 전국노래자랑 녹화장을 찾은 관객들도 많았다. 중년의 남성 관객 이상헌씨는 "송해 선생님 얼굴 보러 왔다, TV에서 보는 것 보다야 실물로 보는 게 낫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송해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녹화 현장에 온 팬들의 특권이다.

송해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녹화 현장에 온 팬들의 특권이다. ⓒ 이희훈

 전국노래자랑의 숨은 상징 '딩동댕 실로폰'

전국노래자랑의 숨은 상징 '딩동댕 실로폰' ⓒ 이희훈

 

 분위기를 띄운 초대가수 홍진영과 송해가 무대 위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분위기를 띄운 초대가수 홍진영과 송해가 무대 위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전국노래자랑이 곧 송해이고, 송해가 곧 전국노래자랑이다. 1988년 5월부터 사회를 시작해 올해로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잡은 지 꼭 30년이 된 그다. 그는 녹화 시작 전, 현장 관객들만을 위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띄웠다. 송해가 준비한 사전 무대는 '비방용'이다. <전국노래자랑> 현장에 온 사람들만 볼 수 있는 특권이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송해의 노래를 따라 일어서서 슬렁슬렁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되는 녹화지만, 송해는 한결같이 오전 8시면 현장에 도착해있다. 보통 9시부터 시작되는 리허설을 꼼꼼히 살펴보고 참가자들과 교감하기 위함이다.

송해는 "참가자들 모두 만나서 오늘 어떤 노래를 할지도 물어보고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고 안정시켜놓아야 한다, 무대에 오르면 생각했던 것도 잊어버린다"며 "마음 놓고 놀게 해야 재밌는 게 나온다"고 말했다. 30년의 진행 관록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지 30년이 넘었고 어느덧 92세로 방송계의 최장수 MC가 됐지만 그 열정만큼은 변함없다. <전국노래자랑> 녹화장에 있던 한 스태프는 "여름에 녹화장에 비가 올 때도 있는데 송해 선생님께서 '다들 밖에서 비 맞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비 좀 맞으면 안 되냐'면서 비를 맞고 녹화를 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고 언급했다.

전국노래자랑 인천광역시 남구편 본선 녹화가 있던 지난달 16일 리허설 한 시간 전, '영원한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를 만났다. 송해는 간이 대기실로 꾸려진 관광버스에 타서 대본을 미리 보고 있었다. 그는 "해질 정도로 이거를(대본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가 직접 200자 원고지에 자필로 써놓은 원고를 든 송해는 파란색 펜으로 원고에 줄을 그으면서 숙지하고 있었다.

"전국노래자랑은 공부하는 프로그램"

 

 리허설 도중 출연자들의 노래를 듣던 송해는 노래 가락에 젖어 생각에 잠겼다.

리허설 도중 출연자들의 노래를 듣던 송해는 노래 가락에 젖어 생각에 잠겼다. ⓒ 이희훈

 

 리허설을 지켜보며 200자 원고지에 파란색 펜으로 직접 원고를 만지며 방송 순서를 꼼꼼히 챙기고 있는 송해.

리허설을 지켜보며 200자 원고지에 파란색 펜으로 직접 원고를 만지며 방송 순서를 꼼꼼히 챙기고 있는 송해. ⓒ 이희훈

 

 리허설을 보며 원고를 정리하던 송해는 출연자들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손발을 맞췄다.

리허설을 보며 원고를 정리하던 송해는 출연자들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손발을 맞췄다. ⓒ 이희훈


- 평소에도 이렇게 녹화 현장에 일찍 오시나.
"우리는 일찍 다닌다. 녹화 장소가 중요하다. 오늘은 문학경기장 북문에 특설무대를 만들었는데, 주변 분위기를 다 봐둬야 한다. 리허설도 봐야 하고, 내가 하는 진행은 그런 거다. 나는 큐시트만 갖고 진행을 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과 행동도 같이 해야 한다."

- 몇 년 전 기사를 보면 녹화 전날 동네 목욕탕에 직접 가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신다던데.
"체험을 한다. 사람 많이 모이는 데가 어디냐 하면 시장통과 목욕탕이다. 거기서 지역 사람들을 만난다. 그쪽 상황을 묻는 거다. 서로 벌거벗고 이야기하는 걸 상상해보라. (웃음) 얼마나 재밌나. 재래시장도 가서 판자로 만든 의자 위에 딱 앉아서 돼지고기 한 점 굽고 먹으면서 지역 사정도 알아본다. 그 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 요즘도 그렇게 하시나.
"지금도 그렇게 한다. 목욕은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한다. 피로 푸는 데 목욕 이상 좋은 게 없다. 노폐물도 빠지고! 뜨거운 물에서 땀 한 번 내고 5분 정도 쉬었다가 냉탕에 들어가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 한 프로그램을 30년 동안 변함없이 하셨는데, 사실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전국노래자랑>을 공부한다고 (생각하면서) 한다. 시대 상황이나 세상의 변화나 천태만상 아닌가. 사람들의 성격도 다 다르고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재능도 다르다. 그런 걸 발굴하는 공부를 한다. 내 나오는 분들에게 늘 '예심 통과하신 분들은 어떤 재능이든 당신만큼 하는 사람이 없으니 특수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하라'고 말한다."

- 맨 처음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시던 게 기억이 나시나.
"아직도 환하다."

-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어떤 게 달라졌을까.
"그때는 여성들이 다 한복을 입고 나왔다. 파마도 하고. 요즘은 한복 입고 나오라고 사정을 해야 나온다. 옛날처럼 파마한 사람 봤나. 못 보셨을 거다. 또 지금은 무대에 나오면서부터 몸을 흔든다. (웃음) 그렇게 동적(動的)이 됐다는 거다."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방송인 송해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방송인 송해 ⓒ 이희훈



- '진행자 송해'는 그 시절과 비교해 어떤 것이 달라졌나.
"나는 출연자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춤추면 나도 춰야 하고, 아이돌 노래도 잘 모르지만 할 땐 또 해줘야 한다. <전국노래자랑>은 남녀노소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다섯 살짜리도 나오고 90대도 나온다. 또 직업의 높낮이가 없다. 똑같은 자격으로 나와서 실력 발휘하고 들어간다. 국회의원이 나와도 다 똑같은 자격이다. 높다고 봐주지 않는다. 이런 무대가 어딨나. 나와서 수많은 관객들을 웃기고 감동을 주고 그런 사람이 이 프로그램의 스타다. 사회자는, 그 자리에 죽은 고목이 나와도 꽃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 출연자가 말을 잘 못해도 잘 풀어주는 게 사회자지, 흉보고 그런 건 사회자가 아니다. 사회자가 웃기는 것도 좋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웃겨줘야지."

- 대상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게 있더라, 하는 비법이 있을까.
"이건 콩쿨 대회가 아니고 재밌어야 하니까, 재미 안에 노래도 좋아야 한다. 물론 노래의 기본은 갖춰야 하지만 명가수를 뽑는 게 아니다 보니 재미있고 자유롭게 마음 놓고 하라고 한 다음 대상을 뽑는다."

- <전국노래자랑> 하면 또 특산물 아닌가. 각지에서 출연자들이 가져온 특산물이 참 많은데, 그 중에서 못 먹는 음식이 있진 않았나.
"갖고 나오는 특산물을 우리가 소개도 해준다. 그걸 프로그램에서 정말 명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실 먹는 것을 갖고 나오면 꺼려진다. 바닷가에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가면 30도가 넘는 날씨에 회 같은 걸 많이 가지고 나오신다. 30분만 있어도 상할 수 있는데, 그런 걸 줄 때 정말 아찔하다. 만인이 다 보고 있는데 먹지 않을 수도 없고 뱉어낼 수도 없다. 그냥 마음 놓고 다 먹는다. 그런데 그렇게 먹어서 지금껏 탈이 난 적이 없다. 이것도 하나의 기록이지. 탈이 난 적도 없고 주는 걸 먹지 않은 적도 없다. 아! 특산물 질문 중에 뭐가 제일 많냐면 '그거 다 받아서 혼자 집에 가져가냐'고 하는데, 여기 일행이 한 70명 정도 된다. 다 골고루 나눠 먹는다. 녹화할 때 내 입으로 들어오는 것만 내 것이다. (웃음) 나머지는 다 나눠준다."
 

 뜨거운 날씨가 계속된 녹화 현장에서 송해씨가 잠시 땀을 닦고 있다.

뜨거운 날씨가 계속된 녹화 현장에서 송해씨가 잠시 땀을 닦고 있다. ⓒ 이희훈



"북한에서 노래자랑 열 거다"

-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시지 않나. 최근 북한과 분위기가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 북한판 <전국노래자랑>도 꿈꾸실 것 같다.
"해주에서 한 160리 정도 더 가면 재령군이라고 있다. 거기가 내 고향이다. 사실 그 질문은 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2003년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했다. 벌써 15년이 됐다. 그때 개성공단, 원산, 충진, 신의주, 그리고 내 고향 해주! 그렇게 다섯 군데서 <전국노래자랑>을 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내 고향에 그저 무대 세워두고 '전국노래자랑 고향에 왔습니다!'하면 얼마나 좋나. 그런데 그동안 분위기가 악화되지 않았나. 요즘은 희망이 있는 분위기다. 이번에는 가자, 약속한 데 꼭 가자 싶고, 이렇게 다섯 군데는 꼭 갈 거다. 어떤가? 아아, 정말 좋겠지."

- 2003년에 평양에 가셨을 때는 어떠셨나.
"그때는 출연자랑 말도 못하게 했다. 아니, 출연자랑 말을 못하게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감시원이 좌측에 있으면 내가 우측 무대로 몰래 뛰어나가고 그러기도 했다. (웃음) 두세 번 뛰어나가니 '나가지 말라니까 왜 나갔어요' 그런다. 몰래 뛰쳐 나가니 또 재미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마음 놓고 웃었지."

- 고향 해주에 가시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너무 세월이 오래 돼 어머니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가족들 생사도 모른다. 내가 이만큼 살았으니 세상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눈물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엎드려서 울고 싶지. 70년이 넘는 통한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이 이야기만 하면 글썽글썽한다. 만일 세상을 떠나셨다면 무덤 앞에 가서 절이라도 한 번 해야 할 것 아닌가. 남아 있는 식구들이 있다면 그동안 살면서 나누지 못했던 정도 나눠야 한다. 난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송해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자 시작된 밴드의 연주에 관중석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송해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자 시작된 밴드의 연주에 관중석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 이희훈

 
- 지난번 아이돌 가수를 비롯해 남측 예술단들이 북한에 다녀올 때 가고 싶으셨을 것 같다.
"<전국노래자랑>이 2003년에 평양을 갔을 때 준비 기간만 7년을 끌었다. 우리는 밖에서도 공연을 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니 '그게 사실입네까? 자료 좀 보내달라요' 해서 또 몇 년을 끌었다. '에이 안 되나 보다' 싶었던 게, 나는 한국전쟁 당시 일반 시민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군에 들어갔고, 저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특급 반역자다. 그 사람이 사회자를 한다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사회자는 안 와도 된다'는 거다. 그래서 '아니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을 10년을 넘게 했는데, 꼭 가야한다'니깐 또 '생각해봅시다'하면서 1년이 넘어갔다. 그러고 있다가 남쪽 사회자 송해, 북쪽 사회자 전성희, 이렇게 못박고 갔다. 여기서는 한 번 방송되고 말았지만 북한에서는 네 번이나 재방송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 놓고 '껄껄' 대는 프로그램이 없었으면 그러겠나. 이런 저런 고충을 겪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번에 가게 되면 적어도 5~6군데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을 열 것이다."

- 북한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여는 것 말고 송해의 다른 꿈이 궁금하다. 더 하고 싶은 건 없나.
"걸어온 길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끼리 놀아도 내가 놀이대장을 많이 했다. 그때부터 음악도 해보고 연극도 해보다가 이게 주업이 돼버렸다. 그런데 사실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땐 부러워하는데 우리 직업이 사실 위험할 때가 많다. 지금껏 3년 계획을 세워보질 못했다. <전국노래자랑> 초기에는 춘하추동, 이렇게 4번 개편을 했다. '여름 넘어가면 개편에 살아남을까' 이 고민을 계속 했지."

- 지금은 그런 고민을 안 하실 거 아닌가.
"그렇지. 연예인이라면 가수도 있고 코미디언도 있고 진행도 있고 분야가 아주 다양한데, 난 아주 진땀이 물씬 나는 드라마, 이걸 한 번 해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 줄거리가 있고, 감정 연기를 하는 그런 '진짜' 드라마! 지금도 그 꿈은 갖고 있다."

- 드라마 같이 하자고 제안 오는 데가 있었을 것 같다.
"있다. 있는데 또 내가 생각을 해봐야지. (웃음) 저걸 해서 득이 있겠느냐 실이 많겠느냐 생각하다가 '하던 거나 계속 하자' 이렇게 되기도 했고."
 

 초대가수를 소개하며 무대를 내어준 송해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초대가수를 소개하며 무대를 내어준 송해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 이희훈



- <전국노래자랑>이 송해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인지 궁금하다.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라 좋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토막토막 인생사가 다양하게 섞인 프로그램이 또 없다. 즐거워서 나온 사람, 슬퍼서 나온 사람, 노래 잘 해서 나온 사람까지 답답할 때 쭉 보면 어딘지 모르게 속이 트인다. 만인이 다같이 공감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덕분에 난 영원히 공부하는 사람이 됐다. 그건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아까 고향에 대한 시큰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사람들의 서린 애환도 다 풀어줘야 한다. 응어리를 풀어주고 너도 풀고 나도 풀고. 이북에 이번에 가게 된다면 고향 분들을 앞에 앉혀놓고 '오랫동안 우리가 아픈 세월을 보냈다'고 '이제 빨리 건강해지자'고 소리치면 좀 좋나.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싸우고 있느냐고도 말해야 한다. 빨리 (북한에) 가야 한다."  

태어난 고향 해주 이야기를 하면서 송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따뜻했던 인터뷰 시간도 잠시, 이내 리허설 시간이 되자 송해는 녹화장으로 향했다. 그는 '매의 눈'으로 리허설을 지켜보고는, 녹화를 앞두고 긴장한 출연자들을 만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데뷔해 64년차 '현역 방송인'으로 지내는 송해의 모습은 '프로'의 그것이었다.

송해 전국노래자랑 북한 황해도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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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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